충주 창동리 오층석탑과 약사여래입상
2020. 6. 2. 20:52ㆍ문화재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과 약사여래입상
국보 제6호인 충주 중앙탑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창동리 오층석탑과 약사여래입상을 들렸다.
중앙탑에서 승용차로 8분 정도 거리였다.
한적한 마을 입구에 오층석탑과 약사여래입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보물급 문화재가 아니라서 그런지 방문객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
시대: 고려
문화재 지정: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8호
건립 시기: 고려 중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 높이 2.4m.
이 탑은 본래 고려 시대 절터로 추정되고 있는 창동리의 민가 뒤뜰에 있었으나
보존과 관리를 이유로 1977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현재 높이가 2.4m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크기의 이 탑은
지대석(地帶石) 위에 5단의 기단부(基壇部)와
오층의 탑신부(塔身部)만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 뿐,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결실되어 없어져 버리고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상·하 2층 구조에 각 층의 면석(面石)마다 한 개의 탱주(撑柱)와 우주(隅柱)만 새겨져 있을 뿐
아무런 조각도 없어 단정한 느낌을 주는 기단부는,
나지막하고 적당한 크기로 전체적인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상층기단 갑석(甲石) 위의 탑신 역시 아무런 장식 없이 우주(隅柱)만 새겨져 있다.
옥개받침이 5단으로 다소 두꺼워진 옥개석(屋蓋石)은
낙수면(落水面)의 경사가 수평선에 가까울 만큼 완만할 뿐만 아니라,
옥개석 네 모서리의 전각(轉角)도 거의 반전(反轉)이 이루어지지 않아 둔중한 느낌을 준다.
이 탑은 비록 상륜부가 결실되어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소형 탑이지만,
완만한 체감률을 보여주는 탑신부와
적당한 크기의 기단부가 이루어내는 조화로 말미암아 안정감이 있으며
중후한 맛까지 느끼게 한다. 조성수법·크기·비례 등으로 미루어보아
이 탑이 건립된 시기는 고려 시대 중엽 경으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서>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忠州倉洞里 五層石塔)
이 탑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는 창동리 인근의 절터에 있던 것을
1978년 남쪽으로 100m 지점인 이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몸돌 부분을 형성하고,
상륜부에는 노반만이 남아 있는 일반형 석탑이다.
초층의 몸돌보다 2층 이상의 몸돌은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으며
지붕돌의 층급받침도 1.2층은 4단에서,
2.4층은 3단, 5층은 2단으로 줄어들고 있음이 특징이다.
@약사여래입상
시대: 고려
문화재 지정: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
위치: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 243-7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 창동리 노천에 있는 고려 시대의 석조(화강암) 약사여래입상이다.
이 불상은 원래 청금산장 인근의 폐광에서 발견되어 1977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는데,
원위치는 창동사지로 짐작되는 곳이다.
절터에는 자기편과 기와편, 그리고 주초석 등이 남아 있었고 5층 석탑도 조성되어 있었는데,
5층 석탑은 이 불상과 함께 현재의 자리로 함께 이전되었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호리병 모양의 광배(光背) 안에
얕은 부조(浮彫)로 조각된 이 불상은
왼손에 약함으로 보이는 지물(持物)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불로 판단된다.
육계(肉髻)는 옆으로 넓고 크며, 둥근 윤곽의 얼굴은 전체 신체에 비해 매우 크다.
부조 자체는 깊지 않으나, 안면부의 양감을 비교적 풍부하게 처리하여
부처의 미소가 완연하게 드러난다.
목이 매우 짧고 얼굴에 비해 짤막한 키이지만,
두툼한 인체의 양감 묘사는 이 불상을 친근하면서도 제법 당당하게 보이게 한다.
양어깨를 덮은 착의법을 보이며, 오른손은 설법의 수인(手印)을 결하고 있다.
가슴에서 아래로 늘어지는 옷 주름은 간략하면서도 큼직한 선으로 처리되었고,
왼손 팔뚝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사 자락이 매우 강조되어 표현된 점이 독특하다.
이러한 표현은 고려 불화의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티프이기도 하다.
불상의 왼손 팔뚝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사 자락이 매우 강조되어 표현된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표현은 고려 불화의 아미타내영도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불상은 전반적으로 많이 간략화된 작품이지만,
윤곽선만으로 깊이감이 풍부한 양감을 성공적으로 표현해내고 있으며,
온화한 안면처리에서 매우 뛰어난 조각가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현지안내서>
이 불상은 근처의 폐광에서 발견되어 1977년 이곳으로 옮겨 왔는데
원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 위치의 서쪽 언덕이 옛 절터이므로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강암 판석(板石)의 한쪽에 불상과 광배(光背)를 함께 부조(浮彫)한 입상(立像)으로
손에 약합(藥盒)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불임을 알 수 있다.
불상은 마치 판화와 같이 5cm 정도로 얇게 양각되었으며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육계(肉髻)는 반구형으로 낮게 얹었고 이마의 백호는 표현되지 않았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둥글고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어 부처의 자비로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눈과 눈썹 그리고 코와 입이 뚜렷하게 조각되었고, 반원형을 이루는 눈썹은 콧날과 바로 연결되었다.
귀는 매우 크고 길게 늘어져서 어깨에 닿았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가슴에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한채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이 맞닿게 표현하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 아래에 대고 약합을 들고 있다.
법의(法衣)는 좌우대칭을 이루는 통견(通肩)으로 양쪽 어깨와 팔에 걸친 옷자락이 발목까지 흘러내렸다.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하나로 붙인 보주형(寶珠形)이다.
받침돌은 후대에 보강한 것으로 윗면 중앙에 홈을 파서 불상을 세우고 홈 둘레에는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보아 조각이 정교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여 조각함으로써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전체 높이 168cm, 불상의 높이는 145cm이다.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제1부 - 청룡사와 충주 청룡사 위전비 (0) | 2020.06.17 |
---|---|
충주 중앙탑공원과 국보 제6호 탑평리 칠층석탑 (0) | 2020.06.04 |
대한불교총본산 조계사 (0) | 2020.04.12 |
파사석탑(婆娑石塔) (0) | 2020.03.10 |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 (0) | 2020.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