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총본산 조계사

2020. 4. 12. 18:18문화재

대한불교총본산 조계사

 

대한불교조계종의 총무원과 종회사무처(宗會事務處)가 본부를 두고 있는

 포교전법도량(布敎傳法道場)으로 대한불교 조계종의 직할교구 본사이다.

 

 

조계사는 이전의 중동중학교 자리에 있었던 각황사(覺皇寺)를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지은 것이다.

1910년 전국 승려들의 의연금으로 창건한 각황사는

 원흥사(元興寺)에 있던 조선불교중앙회무소(朝鮮佛敎中央會務所)를 옮겨놓은 것이다.

 

1915년 초 포교와 교육사업의 일원화를 위해 각황사에 30본산 연합사무소를 설치하였고,

19221월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총무원을 설치했으나,

같은 해 5월 조선불교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이 설치됨에 따라 각황사 안에는

상반된 두 개의 종무기관이 존립하게 되었다.

1925년 총무원과 교무원은 타협을 보고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어

통일적인 중앙 통할의 종무기구가 세워졌다.

 

 

192913104명의 승려가 각황사에 모여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를 열어

 종헌을 비롯한 교무원 규정·교정회법(敎正會法종회법(宗會法) 등을 제정하였다.

19373월 각황사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는 공사를 시작하여

193810월 준공한 뒤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여

절 이름을 태고사라고 하였다.  

그 뒤 불교계의 중심 사찰로 명맥을 이어 오다가

1955년 불교계의 정화운동이 일단락된 뒤 태고사를 조계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대한불교조계종의 행정 중심 사찰이 되고 있다.

 

 

조계사 일주문은 <대한불교총본산조계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4개의 기둥에 주련을 달고 그 앞에 사천왕상이 조성되어 있다.

일주문의 사천왕상은 19131126일에 조성된 것인데

이는 조계사의 주지 도문 스님이 조계사에 사천왕상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차에

금속공예가 이근세를 만나 6개월간의 제작 기간을 걸쳐 3년간 공들여 철판으로 조성된 것이다.

그 사천왕상의 각 무게는 1.000kg에 달한다.

 

일주문의 주련

以心傳心是何法(이심전심시하법)

佛佛祖祖唯此法(불불조조유차법)

曹溪山上一輪月(조계산상일륜월)

萬古光明長不滅(만고광명장불멸)

 

마음이 마음으로 전하는 법이 무엇인가?

부처님과 역대 조사가 오직 이를 전하였네.

조계산 꼭대기에 걸린 둥근 달처럼

만고에도 이 지혜광명 영원히 멸하지 않으리

 

 

@대웅전

대한불교 총본산 본사인 조계사의 대웅전(曹溪寺 大雄殿)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조계사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1937년에 한용운·박한영 등이 중심이 되어 현재의 위치에

불교의 총본산을 건립하는 불사를 추진할 때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 건물은 본래 1922년에 지은 전라북도 정읍의 신흥종교였던

보천교의 법당인 십일전을 1936년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죽은 후 이를 매입하여

19371938년 사이에 옮겨와 태고사의 대웅전으로 사용하다가

조계사 대웅전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현재의 대웅전은 2000910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앞면 7·옆면 4칸으로

지붕의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을 이용하였다.

특히 모든 벽에 있는 문은 꽃 모양으로 장식된 문살로 되어

예술적 화려함과 정교함을 갖고 있다.

이 건물의 모든 것이 1920년대 조선 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을 받아들이면서

전각의 대형화를 이룬 것이 특징이다.

   

 

 

  대웅전 내부의 불단에는 1938년 도갑사(道岬寺)에서 옮겨온

목조 석가여래좌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6)을 봉안하였으나

불상이 적어 1938년 대웅전을 중건할 때 지금의 삼존불로 대치되었다.

현재의 삼존불은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봉안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다.

불단 뒷벽에는 1938년 대웅전을 중건할 때 그려진

후불탱화와 최근 1970년대에 그려진 천불탱화가 걸려 있다  

현판은 조선 제14대왕인 선조의 여덟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의 해서체 글씨로,

화엄사 현판 글씨를 그대로 복사하여 만든 것이다

 

(옛 보천교 십일전)  

@조계사 대웅전은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普天敎) 십일전(十一殿)

이전·건축하였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보천교(普天敎)와 십일전(十一殿)은 보천교의 주법당이며 보천교는

태을교, 훔치교라고도 불리는 신흥종교로 일명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리는

월곡 차경석(車京石)이 증산도의 창시자인 강일순(姜一淳)을 만나면서 세운 종교이다.

 지금의 보천교는 그 교세가 미미하지만 1919년경에는

임명된 간부가 557700명이고 신도가 600만 명이라고

스스로 내세울 만큼 큰 세력을 지닌 신흥종교였다.

민족주의 색채가 강하였고 당시 독립운동에도 자금과 인력이 결합했다.

 

<도갑사에서 옮겨 온 목조불좌상>

영암 도갑사(道岬寺)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1938년 옮겨온 것이다.

현재의 대웅전도 원래는 전북 정읍에 있던 보천교 십 일전(十一殿)을 옮겨온 것인데,

이때 불상을 새로 조성하지 않고 전국의 사찰에서 물색하여

도갑사로부터 이관하여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1938년에 옮겨온 이후 줄곧 조계사 대웅전의 주존불상으로 봉안되었으나

대웅전의 규모에 비해 불상의 크기가 작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2006년에 새로 조성한 삼세불상과 교체되었다.

지금은 대웅전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여 따로 봉안하고 있다.

 

 

(조계사 석가불도)

 

 

<조계사 10층석탑>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이 10층 석탑에는 1913

스리랑카의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수행자인 다르마팔라(Dharmapāla, 1864-1933)가 모셔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원래는 각황사에 봉안하려고 하였다가 당시의 각황사가 누추하다고 판단되었는지

잠시 동대문 밖 원흥사에 잠시 안치한 후 각황사 대웅전을 일본식 건물로 개축한 후 봉안했다가

 2009년에 조계사 앞마당 10층 석탑의 건립 시 이를 봉안했다고 한다.

 

 

 

 

 

조계사 대웅전에는 벽화변상도가 그려져 있다.

변상도는 불교 신자들에게 경전의 의미를 알기 쉽게 설하고,

교의(敎義)를 널리 알리고자 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불교의 경전을 일반인이 알기 쉽게 바꾼 문장이 변문(變文)이고,

변문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회화화한 것이 변상도이다.

그리고 불교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를 위해 속승(俗僧)이라는 승려가 출현하여

변상도 등을 앞에 놓고 이 그림을 설명하게 했던 것이 변문이라는 설도 있다.

변상도의 기원은 당대(唐代)에 그려진 둔황[敦煌]벽화에서 볼 수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 전파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주요 변상도는 석존의 상세한 행적과 불법의 계승

그리고 중국 불교의 전개를 400항목으로 정리하여

그림과 내용을 나란히 새겨 간행한 석씨원류응화사적(釋氏源流應化事蹟)이나,

조선 후기에 많이 읽혔던 팔상록(八相錄)으로

 석가여래성도기주의 팔상 구분에

 석씨원류응화사적의 석존 행적 부분을 내용은 물론 그림까지 옮겨 엮은 것을 인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