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10. 21:06ㆍ문화재
파사석탑(婆娑石塔)
가야국을 세운 김수로왕의 비인 허태후(許太后)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왔다는 돌에 대한 이야기는 2곳에 전하고 있다.
하나는 우리나라 3대 해조관음상이 있는 보리암에 있는
원효(元曉)대사가 신문왕 3년(693년) 금산개산(錦山開山)을 기념하기 위하여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인 허태후(許太后)가
인도의 월지국(月之國)에서 가져온 돌로 탑을 세웠다는 3층석탑이고,
다른 하나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다.
이 석탑은 지난 2월 <가야본성-칼(劍)과 현(絃)>이란 테마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특별전에서 전시되었기에 우연히 친견하였다.
이 석탑은 원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석조 불탑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로 지정 되어 있는 것으로
전시를 위해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현재 파사석탑이 봉안된 곳은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190번길 1 (구산동)이다.
이 파사석탑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을 보면:
『한문음으로 ‘파사석탑’이라고 표기하나 범어(梵語)로는 ‘바사석탑’이라고 하는데,
파(婆)는 범어로 바(bha)이며 그 뜻은 유(有)이고,
사(娑)는 발음이 사(sa)로서 그 의미는 사성제(四聖諦)라고 할 때 그 <제(諦)>의 의미다.
그러므로 파사는 유제(有諦)로서, 일체의 지혜가 현증(現證) 한다는 뜻이다.
현재 남아있는 석탑은 4각형의 지대석 상면에 높직한 굄대가 있어
그 위에 여러 개의 부재(현재는 6석임)를 받고 있는데,
각 부재의 측면과 하면 등에서 다양한 조각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전체적으로 파손과 마멸이 심하다.
(탑신의 아래쪽이 목조탑의 흔적이 보인다)
이 석탑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권 제3 탑상편
제4 금관성파사석탑조(金官城婆娑石塔條)에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금관성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읍(邑)이 금관국으로 되어 있을 때,
세조 수로왕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어버이의 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오려고 하다가
파신(波神)의 노여움에 막혀서 할수없이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 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물가에 와서 닿았는데,
비범(緋帆 : 붉은색의 배)·천기(茜旗 : 붉은 색의 기)·주옥(珠玉)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므로
지금도 이곳을 주포(主浦)라 한다.
…(중략)… 탑은 사면으로 모가 나고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에는 조금씩 붉은 반점이 있고
석질이 매우 부드럽고 특이하여 이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이 아니다. ”
이와 같은 내용에서 파사석탑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호계사에 있던 탑을 조선시대에 이르러 김해부사로 있던 정현석(鄭顯奭)이
“이 탑은 허황후께서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황후릉에 두어야 한다. ”고 하여
현재의 자리에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한편, 이 탑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김해도호부 고적조(古蹟條)에
“婆娑石塔 在虎溪邊 凡五層 其色赤斑 其質良脆 彫鏤甚奇
世傳許后自西域來時 船中載此塔 以鎭風濤
(파사석탑 재호계변 범5층 기색적반 기질양취
조루심기 세전허후자서역내시 선중재차탑 이진풍도)”라 보인다.
《삼국유사》에서 5층탑의 조각이 매우 기이하다고 표현한 것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 내용이 일치하나
현존 실물이 크게 파손되어 있어 매우 유감스럽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파사석탑을 가져왔다는 수로왕비 허황옥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그녀는 48년 가야국 김수로왕(伽倻國 金首露王)을 처음 만나
자신을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이며 16세’라고 소개한다.
왕비묘 근처에 서 있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우리나라 돌이 아니고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비문에 허황옥을 보주 태후(普州太后)라 칭한 것을 토대로
학자들이 추적한 결과 아유타국은 인도의 아요디아(Ayodhia-阿踰陀) 지역을 말하고
그 왕국의 집단이 어느 시기에 중국 양자강(揚子江) 근처 보주(普州)로 이동했고
황옥은 그 곳에서 서기 32년에 태어났음을 밝혀냈다.
후한 광무제(後漢 光武帝) 23년인 서기 47년에
보주가 속한 사천성(四川省)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혼란 속에 허황옥 세력이 동으로 이동하여 1년 뒤인 48년 김해(金海)에 도착한 것이다.
*이러한 전설을 담고 있는 파사석탑의 신비를 풀려고,
국립중앙박물관이 고려대 산학협력단에 이 탑의 산지와 특성을 분석 의뢰했더니
파사석탑의 돌이 국내에서 출토되지 않은 돌이라고 같은 결론을 지었다.
또한 중국 남북조시대 국가의 하나인 동한(東漢)시대에 출간된 신농본초(神農本草)에
닭볏의 피를 찍어서 이 파사석을 시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내에서 출토된 돌은 아님이 분명하다.
*동한(東漢)은 후한(後漢, 25년~220년)을 가리키며,
전한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로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수로왕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라고 했는 데,
아유타국은 아요디아(Ayodhya) 또는 한국식 한자음 아유타(阿踰陀)라고 하는데
이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갠지스강의 지류인 고그라강 연변에 있었던
고대부터 번영한 오래된 도시이며, 힌두교 7성지 가운데 하나이면서,
또한 코살라왕국의 초기 수도로 불교시대(기원전 6~5세기)에는
100여 개의 사원이 늘어선 불교 중심지로 야유타국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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