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5. 20:39ㆍ삶 속의 이야기들
불교의 죽음 제2부 장기기증과 안락사와 자살의 문제
장 프랑수아: 오늘날에는 안락사 문제도 대두되었다.
서양에서는 온갖 형태의 문제가 제기되지.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을 선택할 권리가 있을까?
자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병자가 정신을 잃었을 때,
또는 더는 고통을 참을 수 없을 때 그에게 죽음을 요구할 권리가 있을까?
의사는 그 사람이 죽도록 도울 권리가 있을까?
그것은 낙태와 마찬가지로 윤리의 법적인 측면에서 생겨나는,
앞서 논의했던 사회 문제가들에게 속하는 질문이다.
게다가 그 문제는 지금 대단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1996년 5월에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던 교황은 諭示를 통해 이른바
‘죽음의 세력들’이라고 불리는 낙태와 안락사 찬성자들에게 항의하였다.
불교는 안락사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지?
마티요: 정신 수행자는 삶의 모든 순간을 귀중하게 여깁니다.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데 모든 순간과 사건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 직면하면, 사물의 궁극적인 본성에 대해,
고통 안에서조차 정신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그러한 본성은 기쁨이나 고통 때문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명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고 상당히 안정적인 정신 수행을 해나가는 사람은
가장 격렬한 고통의 순간들조차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데 활용할 수 있습니다.
장 프랑수아: 「병의 유익한 활용」은 그 자신 역시 병으로 고통스러워했던 파스칼이 쓴 小論의 제목이지.
마티유; 자신이 직접 겪는 고통은 무수한 중생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상기시키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되살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통은 나쁜 업을 쓸어내는 <빗자루>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고통은 과거에 저지른 부정적인 행위의 결과이므로
정신수련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동안 빚을 갚는 것이 좋죠.
어떠한 이유로도 안락사와 자살은 인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희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조리하고
무익한 방식으로 생명을 연장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 돌이킬 수 없는 혼수상태에 빠진 생명을
몇 시간 연장하기 위한 생존 기계를 사용하거나,
악착스럽게 치료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게 하면 인간의 의식은 오랫동안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돌게 되고 의식이 동요될 뿐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온한 의식 속에서 살다가 가도록 두는 편이 좋습니다.
장 프랑수아: 하지만 불교도가 아닌 경우에는?
마티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면,
그리고 그 고통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약간의 평온마저 빼앗아 간다면...
장 프랑수아: 일반적으로 그렇지.
마티유: 그런 경우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단지 하나의 고문일 뿐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불교에서는 고통을 우연, 운명이나 신의 의지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저질은 과거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죽음 너머로까지 우리의 업을 가져가는 것보다는 그것을 소멸시키는 편이 낫습니다.
죽음 후에 다가오는 존재의 상태가 어떤 것일지 누가 알겠는가.
안락사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장 프랑수아: 안락사의 도덕성 문제는
단지 자신의 고통을 덜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돕는 사람, 다시 말해 결과적으로 한 인간 존재를 죽이고
한 생명을 제거하게 되는 사람에게도 제기된다.
그 점에서 나는 불교가 명확한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생명도 결코 파괴해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마티유: 자신의 생명 등, 타인의 생명도 안 됩니다.
사실 우리가 안락사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는 슬픈 현실 자체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가치들이 거의 사라졌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어떠한 원천도, 영감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티베트 사회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티베트인들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성찰했던,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었던 가르침들에 의지한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은 指標와 내적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삶과 죽음 모두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알기 때문이죠.
게다가 일반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부터 영감과 열기에 휩싸이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이는 미국의 캐보키언과 같은 <사형 집행자> 의사가 출현한 것과 특히 대조됩니다.
그 의사들의 행동 동기가 무엇이든 이러한 상황은 참으로 가련한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은, 재난을 맞이하는 듯한 서양의 감상적인 분위기
또는 많은 서양인이 그 속에 갇힌 채 죽어가는 무거운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대조됩니다.
*註: 잭 캐보키언(Jacob jack Kevorkian)은 죽음의 의사로 불리는 미국인으로
그는 '죽을 권리'라는 인간의 새로운 권리를 주장했고,
그걸 주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불치병이나,
말기 환자들을 선별해 안락사를 도움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의사다.
실제로 그는 1990년대에는 52세의 루게릭병 남환자를 안락사시키는 전 과정을 촬영하여
미국 CBS 방송국을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장 프랑수아: 불교에서는 장기기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마티유: 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죽음이 타인에게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매우 칭찬받을 만한 일이죠.
장 프랑수아: 그럼 자살은?
마티유: 설령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생명을 빼앗는 행위입니다.
더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짓은 집착이고 파괴적인 것이기에 여전히 사바세계,
즉 삶의 순환에 속박된 것입니다.
자살하면 단지 상태가 변화될 뿐, 결코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장 프랑수아: 그렇고. 그것은 기독교와 마찬가지구나.
그런데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천벌을 받는 거냐?
마티요: 불교에서는 천벌이 없습니다.
행위에 대한 업보는 처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결과이요.
사람들은 자기가 뿌린 씨를 그래도 수확할 뿐입니다.
공중에 돌을 던지고서 그 돌이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진다고 놀라면 안 되죠.
그것은 <죄>의 개념과는 약간 다릅니다.
로랑스 프리드란 신부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어로 죄는 <과녁을 맞히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죄란 진리로부터 의식을 일탈시키는 것입니다.
환상과 이기주의의 결과인 죄는 처벌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을 벌하지 않습니다. 제가 충분히 강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교에서는 선과 악의 개념이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선과 악이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행위들 즉 말과 생각들은 동기와 그 결과에 따라,
그로 인한 고통과 행복에 따라 좋은 것이기도 하고 나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살은 부정적이다.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비추어 볼 때
자살은 곧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살함으로써 자기가 지닌 가능성, 현재의 삶에서 우리 안에 존재하는
변화의 잠재력을 현실화할 가능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허약함과 게으름의 한 형태인 굴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생각하면서 내적 변화의 가능성을 제거한다.
장애를 극복한다는 것은 그 장애를 발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큰 시련을 극복한 사람들은 그 시련을 통해
교훈과 정신적 구도에 대한 강한 영감을 끌어내게 된다.
간략히 말한다면 자살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문제를 다른 상태로 옮겨 놓은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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