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죽음의 문제

2020. 4. 15. 19:55삶 속의 이야기들

 불교와 죽음의 문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죽게 된다는 이 필연의 결과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삶 속에서 이를 알면서도 언제나 죽음의 문제는 뒤켠에 놓아두고

 마치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거나,

 지금의 그런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식으로 방기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가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면서 죽음이란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내가 죽으면 어떠하지?”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이 화두는 파고 들어갈수록

 삶의 무상(無常)을 느끼게 되고 생의 허무와 천당과 극락이라는

사후(死後) 세계에 미련을 갖는 답 없는 질문만 반복하게 된다.

그런데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의 문제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홀연히 찾아오는 이 불청객 같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 서양의 한 철학자와

티베트의 승려가 된 부자(父子)간의 대화가 책으로 출간되어 한때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 당시(1997)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했던 책으로

한국에서는 창작시대에서 <승려와 철학자>로 출간했다.

 

아버지 장 프랑수아 르벨은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언론인으로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프랑스 한림원의 정회원이다.

아들 마티유 리카르는 프랑스 분자생물학 분야에서 국가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불교에 귀의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티베트로 건너가 승려가 된 분이다.

 

1부 불교와 죽음

장 프랑수와(아버지): 세상으로부터 은거한다는 것은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관점에서도 일종의 죽음 준비를 의미한다. 파스칼 같은 합리적인 기독교인은 유일한

실제는 神性뿐임을 이해하게 된 순간부터 속세의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그 순간부터는 창조주 앞에 나아간 상태로 살아가야 하며,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과 같은 상황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스칼은 팡세에는 이러한 생각이 상당히 자주 나타나는 데

이는 <주께서 우리를 어느 순간에 부르실지,

10년 후일지, 10분 후일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라고 한 복음서에서 비롯된다.

종교적 의미와는 관계가 없다고 할지라도 철학은 그것이 죽음의 준비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몽테뉴의 수상록에는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배우는 것>이란 대목이 있다.

나는 죽음의 준비라는 개념, 轉移라는 개념이 불교 교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고 있다.

죽음 후에 <옮겨 감>, 그것을 불교에서는 <바르도>라고 하는 것 같더구나.

정말로 <바르도 >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 바르도(Bardo)는 불교에서 사유(死有)에서 생유(生有)로 이어지는

 중간적 존재인 중유(中有, antarabhāva)를 말한다.

중음(中陰), 중간계(中間界)라고도 번역한다. 바르도는 티베트 불교의 용어이다.


 

마티요(아들): 사실입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항상 수도자의 정신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슬픔이나 병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내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매 순간을 활용해야 한다는,

귀중한 삶의 한순간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자극으로 작용하지요.

죽음이란 유한성을 생각지 않은 채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나는 우선 내 일상사를 정리하고 모든 계획을 완수하겠다.

이 모든 것을 끝마치고 나면 나는 사물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고,

정신적인 삶에 나를 더 바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남은 생이 얼마 없는 것처럼 살지 않고 마치 영원한 시간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 가장 치명적입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아무 순간에나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순간과 죽음을 이끌어 오는 상황은 예견할 수가 없습니다.

걷고 먹고 자는 일상생활의 모든 상황이 갑자기 죽음의 원인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수도자는 항상 이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隱者는 아침에 불을 켤 때 그다음 날에도 불을 켤 수 있을지 자문합니다.

숨을 내어 뱉을 때 다시 숨을 드릴 킬 수 있는 자신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유한성에 대한 죽음의 숙고는 끊임없이 정신 수행을 하도록 북돋아 주는 자극입니다.

 

장 프랑수아: 불교도들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냐?

마티유: 죽음에 대한 태도는 수련의 정도에 따라 바뀝니다.

상당한 정신적 성숙을 이루지 못한 초심자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그는 덫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슴과 같습니다.

하지만 수도자는 <어떻게 하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라고 자문하는

 대신에 다음과 같이 자문합니다.

<어떻게 하면 불안 없이 신뢰와 평정으로 바르도의 중간 상태를 지날 수 있을까?

그러고는 씨를 뿌리고 노동을 하고 수확물을 살피는 농부의 자세로 돌아갑니다.

날씨가 어떻든지 농부는 어떤 후회도 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전 생애를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바쳐온 수도자는

아무런 후회 없이 평온하게 죽음에 다가갑니다. 최고의 수도자는 죽음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현상의 견고함, 소유에 대한 모든 애착이 사라진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죽음은 친구 같은 존재, 삶의 한 단계, 단순한 옮겨감일 뿐입니다.

 

장 프랑수아: 과소평가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그러한 식의 위안은 그다지 독창적이지 못하다. 여기에 덧붙일 말은 더 없느냐?

마티유: 죽음의 과정과 그때 다가오는 다양한 경험들은 불교개론사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의식과 육신이 몇 단계에 걸쳐 분리된 뒤에 숨이 멎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물질계가 우리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의식이 육신과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가 인식했던 제약된 상태와는 반대되는,

 절대의 상태로 우리의 영혼이 혼합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의식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절대 차원의 광명 공간> 속으로 흡수되었다가

 다시 나와 중간 상태인 바르도를 지나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새로운 삶, 즉 환생하게 됩니다.

명상은 바로 이 바르도의 다양한 경험들이 다가오기 전에

사물의 궁극적인 본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절대 상태에 머무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장 프랑수아: 결국 철학과 종교의 역사는 인간 존재가

죽음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인식하게 해주는 온갖 추론들로 점철되어 있구나.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내세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내세가 존재하고 우리 안에 영적 근원 즉 영혼의 불멸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피하거나 그 죄들을 고해신부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내세에서는 좋은 조건으로 살아남으리라고 안심하게 되지.

 죽음은 일종의 병과 같은 육체적 시련을 통해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신부들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이러한 <옮겨 감>에 대해 가지는 불안을 덮어 주는 데 공헌한다.

사람들은 죽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통해 위안을 받는다.

불안의 유일한 주제는 <내가 구원을 받을까요, 아니면 지옥에 떨어질까요?>라는 것이다.

 

죽음에 관한 두 번째 유형의 추론은 지극히 철학적이며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효력을 발휘한다.

수많은 동물 가운데 하나인 <> 라는 생물학적 실체가 소멸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당연한 사건이며,

이를 체념할 줄 알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말함으로써 일종의 체념, 절제를 기르게 된다.

 철학자들은 죽음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감미로운 추론들을 제공하려고 애써 왔다.

이에 관한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논증이 있다.

 그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할 때는 죽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 것이고,

죽음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때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헛된 일이다.라고 말했다.

 에피쿠로스는 신, 죽음, 자연현상들, 번개, 번개, 지진에 대한 공포와 같은

무익한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위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이것을 아주 현대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분명한 원인과 법칙을 따르는 현상들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아무튼, 사람들은 죽음에 관한 위와 같은 두 가지 설명 중 하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불교를 첫 번째 유형으로 분류하겠다. 불교가 유신론적인 종교가 아니라 할지라도

 죽음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정신적 기법은

죽음을 하나의 끝으로 설명하지 않은 형이상학에 근거한다.

 죽음이 끝이라고 해도 그것은 유익한 끝이 된다.

죽음은 곧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윤회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대 서양에서는 종종 죽음을 일종의 수치스러운 일로 받아드리고 감추려 하는 것 같다.

구체제에서 죽음은 공공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말하자면 며칠에 걸쳐서 죽어간다고 할까.

 온 가족이 죽어가는 사람 주위에 모여 그의 마지막 권고를 듣고 신부들이 열을 지어 의식을 행하고,...

군주의 죽음은 궁정 전체가 참여하는 장대한 규모의 행사였다.

 반면에 오늘날의 죽음은 숨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침묵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임상의들이 생겨났는데 그들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준다.


 

마티유: 우리 시대는 죽음 앞에서, 모든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죽음에 관해 느껴지는 거북함은, 아주 오래 그리고 가능한 한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서양문명의 이상이 극복할 수 없는 유일한 장애가 바로 죽음이라는 사상에서 기인한다.

게다가 죽음은 사람들이 가장 집착하는 대상인 바로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종말은 어떤 물질적 수단으로 치료할 수가 없다.

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자신의 관심 밖으로 던져버리고,

허약하고 인위적이며 피상적인 행복이 들려주는 부드러운 소리를 되도록 오랫동안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며 단지 사물들의 본성과 대면하는 시기를 늦출 뿐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그러한 불안 속에서 살아가지는 않았다고 주장하겠지만,

<잃어버린 이 시간> 동안 생명은 조금씩 메말라 간다.

고통의 진정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 문제의 중심에 가까이 가는 데 이용되지 못한 채 말이다.

우리는 매 순간의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몰랐고,

삶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장 프랑수아: 그래서 불교가 제안하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마티유: 현실적으로 죽음에 접근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마치 불이 꺼지는 것처럼 혹은 물이 마른 땅에 스며들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존재가 그 끝에 이른 것으로 생각하던지,

니면 죽음이란 하나의 이행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의식의 흐름이 일단 육신과 분리된 후에도

다른 존재로 계속 옮겨간다는 것을 믿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불교는 사람들이 평온하게 죽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소갈 린포체의 저서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가 성공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책의 대부분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것,

죽음의 과정 자체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갈 린포체는 말한다.

<죽음은 우리가 가장 집착하는 대상인 우리 자신에 대한 파괴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자아와 영혼의 본성에 대한 가르침들이

어느 정도까지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죽음에 다가갈 때는 자신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과 기쁨을 키워야 한다.



장 프랑수아: 불교는 우리가 앞에서 구별했던 두 가지 유형을 결합한 것이구나.

마티유: 대부분의 종교에서 죽음을 통한 의식의 성숙 또는 정신적 근원의 성숙은 계시적 교리에 속한다.

 불교의 경우에는 물론 일반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어도

 상당한 많은 사람에 의해 체험적 직접적인 경험에 근거한다.

어쨌든 삶의 마지막 순간을 불안보다는

즐거운 평온 속에서 보내는 편이 더 낫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가족들과 재산을 남겨두고 간다는 생각, 육신이 파괴될 거라는

강박 관념 속에 살면서 고통받는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불교에서는 죽음을 육체적 시련보다 정신적 고통으로

 느끼게 만드는 질긴 집착들을 모두 없애라고 가르친다.

특히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지 말라고 강조하고,

죽음의 시간은 정신적 구도를 실천하기 시작하는 데 이상적인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미래를 걱정한다. 돈과 양식이 부족해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죽음은 다가올 모든 사건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존재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삶의 모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하나의 경고로만 사용한다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의기소침해질 만한 일은 아니다.

티베트에는 다음과 같은 교훈이 있다.

 <항상 죽음을 관조한다면 너희들은 정신 수행에 힘을 쏟고,

정신 수행하고자 하는 열정을 새롭게 할 것이며,

죽음을 절대 진리와의 결합으로 보게 될 것이다.>

~제2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