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 현기탑비

2020. 2. 28. 21:20문화재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 현기탑비

 

탑비명: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塔碑)

조성시대: 고려 태조 22(939)

문화재지정: 보물 제361

크기: 높이 3.5m

재료: 귀부는 화강암, 비신은 사암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塔碑)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 862930)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태조 22(939)으로,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본래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보리사(菩提寺) 터에 서 있었는데

1914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대경대사는 9세에 출가하여 교종을 배웠으나, 나중에는 선()을 연구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고려 태조는 그를 존중하여 보리사의 주지로 머물게 하였다.

69세에 이 절에서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대경’, 탑 이름을 현기라고 내렸다.

 

 

 

@양평 보리사(楊平 菩提寺)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 수 없다.

대경국사 여엄(大鏡國師 麗嚴, 862~930)은 중국에서 909(혜공왕 13)에 돌아와서

얼마 되지 않아 태조의 배려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이 절의 주지로 봉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이미 신라 말기에 절이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07(태종 7)의 기록에 의하면 보리사는 조계종의 대표적인 사찰로써,

보리갑사라 불렀으며 또한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도 불구하고

보리사의 사격(寺格)은 자복사로 지정될 만큼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자복사(資福寺)는 조선 초에 고려의 비보 사찰을 재정비하여 지정한 지방 군현의 중심 사찰을 일컫는다.

 그로부터 120여 년 뒤인 1530(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

이때까지도 사찰이 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이후의 내력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리적 요충지임을 고려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 절이 무너졌을 가능성이 크다.

1799(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이미 폐사되었다고 나와 있다.

 

 

 

높이가 3.5인 이 탑비는, 거북받침돌은 구슬을 물고 고개를 쳐들고 일어서는 머리 모양을 하고 있고,

거북 등 주위에는 꼬아 놓은 실 모양의 무늬가 띠를 두르듯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거북돌이 크기에 비하여 납작하며,

비의 갓인 머릿돌은 너무 크게 만들어져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다만 머릿돌에 새겨진 구름과 용의 무늬가 매우 힘차게 조각되어 눈여겨볼 만하다.

거북받침돌은 화강석, 비몸돌은 사암(砂岩)이며,

 

 

 

 머릿돌의 제액(題額)은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말미에 天福四年歲次己亥라 적혀 있어 태조 22(939)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탑비에 따르면 대경대사의 성()은 김()이고, 충남 남포(藍浦) 출신인데,

 신라 경문왕 10(870) 9세 때 무량수사(無量壽寺)로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주종(住宗) 법사에게서 화엄(華嚴)을 공부하고,

뒤에는 선종에 치중하여 성주사(聖住寺)의 무염(無染) 선사에게 선()을 배웠다.

그 후 당나라로 가서 운거 도응(雲居道膺)으로부터 법을 배운 후

 효공왕 13(909)에 귀국하여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소백산에 은거했는데, 고려 태조가 그를 맞이하여 법을 듣고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인 지평(砥平) 보리사(菩提寺)의 주지로 봉했다.

대경대사는 이곳에서 태조 13(930)에 입적하였는데,

그때의 나이는 69, 법랍은 60세였다.

태조는 대경(大鏡)이라는 시호와 현기(玄機)라는 탑호를 내리는 한편,

최언위(崔彦撝)에게 비문의 글을 짓게 하고 이환추(李桓樞)에게 글씨를 쓰게 하였다.

939년에 이르러 대경대사의 제자 최문윤(崔文尹)이 비문을 새겨 비가 세워졌으며,

 태종 25(942)에 그의 문도들의 이름이 비몸돌 뒷면에 새겨졌다.

 이 음기에 의해서 그 문하에 융천(融闡흔정(昕政연육(連育총혜(聰惠

장초(莊礎정잠(定岑) 500여 명이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비문의 글씨는 폭 2.5정도의 구양순체(歐陽詢體)의 해서로,

획의 모서리를 날카롭게 살린 데서 오는 강인함이 묻어나는데,

고려 전기의 특징이 잘 담겨 있는 부분이다.

 

양평에는 대경대사와 관련된 또 하나의 사찰이 있다.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 있는 용문사의 말사인 사나사(舍那寺)인데

이 절은 923(태조6) 고려 태조의 국정을 자문한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 862~929)

제자 융천(融闡)과 함께 세웠다고 전해진다.

봉은사 본·말사지에 의하면 창건 당시

비로자나불상과 오층석탑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본방 양평 용문사 사나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