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3. 00:42ㆍ문화재
탑골공원과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1919년 3·1 운동의 발상지로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외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곳인 탑골공원(塔谷公園)은
사적 제354호로 지정된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이다.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圓覺寺)로 건립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1920년에 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원 내에는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댕겼던 탑골 공원 팔각정(서울 시도유형문화재 제73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탑골 공원에 있는 3·1 운동 서판>
1919년 3·1운동 당시 시내 청년 학도와 애국시민이 이곳 파고다 공원에 모여
학생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였던 곳을 기념하기 위한 서판이다.
손병희선생 동상
<팔각정(八角亭)>
(서울 시도유형문화재 제73호)
조선 고종(재위 1863∼1907) 때 영국인 브라운이 조성한 현대식 공원으로
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 10층 석탑으로 인하여 파고다공원 또는 탑동공원이라 불렸으며,
이때 팔각정도 함께 지었다. 황실 공원으로 제실, 음악 연주 장소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1913년부터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이 이 앞에 모여
학생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시민들이 울적해진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이곳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 보물 제3호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
조선 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 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0층 사리탑을 세웠다.
대원각사비는 보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의 전체 높이는 4.9m, 비신 너비는 1.3m로 보호각 안에 봉안되어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金守溫), 성임(成任),
뒷면의 추기(追記)는 서거정(徐居正), 정난종(鄭蘭宗)이 각각 짓고 썼다.
대리석제의 비(碑)는 마멸이 심하여 전혀 알아볼 수 없는데,
다행히 비문의 내용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려 있다.
비는 이수(머릿돌)를 따로 얹지 않고 비신(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반구형(半球形)으로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수 아래쪽에는 ‘大圓覺寺之碑(대원각사지비)’라는 전액(篆額)을 강희맹(姜希孟)의 글씨로 새겼다.
귀부(龜趺)는 거북 모양을 한 석비의 받침돌을 말한다.
이는 중국 전설 속의 비희(贔屭)가 유래인데,
비희는 용왕의 아홉 자식 중 하나로 거북의 등딱지에 용의 몸을 하고 있으며
무거운 것을 짊어지는 것을 좋아한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대원각사비는 이와는 달리 통상의 탑비인 용 모양이 아닌 거북으로 묘각되어 있다.
돌거북으로 조형한 대원각사비의 귀부는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일반적인 육각형 귀갑문 대신에 사다리꼴 평행 세선(細線)을 새겼으며
연잎 모양의 비좌(碑座)와 물고기 비늘을 조각한 꼬리와 다리가 특이하다.
특히 꼬리를 3개로 묘각한 것은 거북이 꼬리로서는 유례가 없는 특이한 조형이다.
전체적으로 당비(唐碑)의 형식을 따른 복고적인 석비(石碑)로,
조각이 번잡하고 사실적인 표현에서 미숙하나
조선 시대의 독특한 조각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원각사의 유래>
원각사는 고려 시대부터 있던 흥복사를 세조가 효령대군의 건의로 중창한 절이다.
1466년 완공하고 1467년 원각사지 십층 석탑을 세웠다.
세조와 예종이 죽은 뒤 백제(百齊: 망자를 위해 100일째 지내는 佛供)를 원각사에서 지냈다.
성종 19년 화재로 소실된 뒤 수리하였으나
연산군 10년(1504년) 연산군은 불상을 끌어 내리고 공자의 입석을 세웠으며,
절은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방(妓房)으로 만듦으로써 승려들이 머물 수 없게 되었고,
1512년(중종 7)에 원각사를 헐어서 그 재목을 나누어 줌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원각사 대종(大鐘)은 1536년에 숭례문(崇禮門)으로 옮겨
보루(報漏)의 종으로 사용하다가 1594년(선조 27)에 다시 종각으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 원각사 자리였던 탑골공원에는
국보 제2호로 지정된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보물 제3호인 대원각사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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