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360호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2020. 2. 11. 21:12문화재

보물 제360호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月光寺址 圓郞禪師塔碑)

 

탑명: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堤川 月光寺址 圓朗禪師塔碑)

탑 높이: 전체 높이 3.95m, 비신 높이 2.26m, 너비 97, 두께 24

조성 시대: 통일신라 말기 신라 진성왕 4(890)

재질: 화강암

문화재지정: 보물 제360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승탑(부도)이나 탑비는 대개 박물관에서는 옥외전시장에 전시하는 데

유일하게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로비에 전시한 것이 특이하다.

이 비의 원위치는 충청북도 제원군 한수면 송계리 월광사지였는데

월광사가 폐사된 상태에서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22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경내로 옮겨 봉안되었다.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비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지대석과 같은 돌로 만들어진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구성되었다.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圓朗禪師塔碑)>는 진성여왕 4(890) 915일에 세웠다.

이 탑비의 주인공은 원랑선사 대통(大通, 816883)

성주산문 초조인 낭혜(朗慧)화상 무염(無染, 800888)의 제자이다.

다만 스승보다 5년 먼저 돌아가서 스승의 비석보다 앞서 세워진 것이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비(국보 제8)는 본방 보령 성주사지 참조)

  


 

  

이 비문을 지은 사람은 헌강왕 10(884)에 세워진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를 썼던 김영(金穎)이다.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이 돌아가고 나서

헌강왕 9(883) 315일에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기 시작하여 그해에 이를 끝마쳤던 듯,

비석은 그다음 해(884) 919일에 세워진다.

(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제157)는 본방 장흥보림사 참조.)

 

 

 

<귀부부>

비는 거북 받침돌 위로 비 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거북받침은 네 발이 몹시 작고 짧은 목과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데,

이는 신라 후기에 나타나는 형식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귀두(龜頭)는 역시 용두화(龍頭化)되어 있고 목은 짧고

인갑문(鱗甲紋)을 옆으로 중첩되게 조식(彫飾)하였다.

 

 

 

 목 부분 밑으로는 복갑(腹甲)을 파상문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귀부의 등에는 5각형의 귀갑무늬[龜甲紋]가 어깨너머까지 덮고 있고,

귀갑문 안에는 꽃 모양 1개씩을 또다시 화려하게 장식했다.


 

 

등 중앙에 마련한 비좌에는 운문(雲文)이 소용돌이치듯 힘차게 조식 되어 있고

운문 중간중간을 변화된 연판문(蓮瓣文)으로 보충하고 있어

운문과 연판문이 서로 교대로 배치된 듯 변화 있게 조식 되었다.

 

 

 

이와 같은 문양 위로 양 측면에 2

그리고 전·후면에 5구의 안상(眼象)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로 또다시 복련판(覆蓮瓣)을 정교하게 둘렀으며

특히 등의 귀갑 중심선인 등줄기 부분에는 낮게 도드라져

중첩되어 내려진 듯한 고기 비늘과 같은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귀부의 중앙에 있는 비좌에는 구름무늬가 힘차게 조각되어 있고,

군데군데에 변형된 연꽃무늬가 배치되어 있다.

옆면에는 안상이 모각되어 있고 그 위에는 복련의 연꽃이 돌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귀부는 방형의 대석 위에 네 발을 딛고

 짧은 목에 직립한 용두화(龍頭化)된 귀두로 되어 있으나

귀부 전체와 비교하면 네 발이 왜소하고 귀갑은 둔탁하고 두껍게 되어 있다.

 

 

<이수>

이수는 매우 길게 조각한 운문 사이에서 반룡(蟠龍)이 쟁주(爭珠)하듯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이수 전체가 약동하는 듯 보이며

 상부 중앙에 보주(寶珠)를 두었고,

구름 속에서 사방으로 머리를 들고나오는 아홉 마리의 용을 입체적으로 새겼다.

 

 

 

이수 상부 좌우에는 보주를 꽂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중앙에 설정한 방형(方形) 제액(題額) 내의 비명은

파손과 풍화작용 때문에 판독하기 힘들다.

 

 

 

그러나 전체 이수의 조각 수법 등은 사실성을 강하게 나타낸

우수한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비의 하나이다.

 

 

<비신부>

비의 건립 연대는 진성여왕 4(890)으로 비신의 높이는 226cm이며,

폭은 97cm, 두께는 24cm로서, 재질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자경 2.1cm의 구체(歐體) 해서(楷書)

세선(細線)의 방안(方眼)내에 음각하였으며

제액(題額)은 파손되었고,

비제(碑題)□□□□□강부월암산월광사 조시원랑선사대보선광영탑비병서

(□□□□□江府月巖山月光寺 詔諡圓朗禪師大寶禪光靈塔碑幷序)’라 하고

금성태수 김영(金潁)의 찬문(撰文)이며

오등산보리담사석가사문순몽(五騰山菩提潭寺釋迦沙門淳蒙)의 서자(書字)임을 서두에 열기하였다.

 

 

 

@제천 월광사

제천 월광사(月光寺)는 신라 효소왕 때의 승려 도증(道證)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창한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제자인 원랑선사 대통(圓朗禪師 大通)이 머물렀던 곳이다.

 

 

 

월광사는 원래 법상종 계열로 존속하다가 경문왕 때에

대통(大通)이 선 사상을 전파하면서 선종계 사찰로 바뀌었다.

월광사 옛절터 초입 송계계곡에서 고려 시대에 제작된 대불정주비(大佛頂呪碑)가 발견되어

고려 시대에도 선종 계통의 사찰로 법맥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절터에서 조선 시대 기와 조각과 백자 편이 수습되는 점을 볼 때

 조선 전기까지 존속하다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랑선사(圓郞禪師)>

원랑선사(圓郞禪師: 816~883)의 행적은 이 탑비를 통하여 알려졌다.

원랑선사는 헌덕왕 8(816)에 태어났고, 원랑선사의 이름은 대통(大通)이고,

자는 태융(太融)이며, 속성(俗姓)은 박()이다.

어려서부터 제자백가에 통달했는데, 뒤에 불교 경전을 읽고 무상을 느껴 출가하였다 한다.

 신라 문성왕 7(845) 성린(聖鱗)에게서 비구계를 받고, 단엄사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

그의 사형(師兄)인 자인(慈忍)이 당나라에서 돌아오자

그에게서 자극을 받고 분발하여 선정(禪定)을 닦는 데 매진하였다.

문성왕 18(856)에 사신을 따라 당나라 앙산(仰山)에 가서 징허(澄虛)를 스승으로 섬겼고,

황매(黃梅)의 심인(心印)을 받은 후 경문왕 6(866)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월광사에 머물면서 법요를 널리 전하여 선문(禪門)을 빛나게 하였으며

그의 이름이 궁중에 알려져 경문왕의 존경을 받았다.

 

 

 

원랑선사는 헌강왕 9(883) 105일에 나이 68세로 입적하는데,

 이 비는 그로부터 7년 후인 890년에 세워졌다.

헌강왕이 원랑선사’(圓郞禪師)라고 시호를 내리고

대보선광’(大寶禪光)이라는 탑명을 내려 김영(金瑛)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비문의 글씨는 순몽(淳蒙)이 썼는데, 가는 경계선 안에 구양순체의 해서이며 폭은 2cm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