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0. 22:34ㆍ문화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 약사여래
보물 제328호 금동 약사여래
시대: 통일신라 시대
불상 높이: 29cm
문화재지정 : 1963.01.21.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328호인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높이 29㎝의 자그마한 금동불로,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없어졌지만 비교적 잘 보존된 약사여래입상이다.
약사여래는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준다는 의미를 지닌 부처로 손에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 특징이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고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풍만한 얼굴은 미소 없이 근엄한 인상이며
눈· 코·입의 선이 명확하고 치밀하여 세련된 조각미가 느껴진다.
두 귀는 어깨에 닿을 듯 길게 표현되었고,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옷은 양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지그재그형 옷 주름과 U자형 옷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당당하고 건장한 신체는 두껍게 축 늘어진 옷으로 인해 다소 둔중해진 듯하다.
오른손은 허리 아래로 내려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맞대고 있고,
왼손에는 약항아리(藥壺)를 들고 있다.
대좌는 없지만, 불상을 대좌에 꽂았던 뾰족한 촉이 두 발밑에 하나씩 남아 있으며,
불상 뒷면에는 주조할 때 뚫은 구멍 자국이 남아 있다.
높다란 머리 묶음과 표정 등이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 통일신라 8세기 작)과 비슷하여
8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국보 제28호 경주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
(사진출처: 문화재청)
우리나라 약사여래에 대한 신앙은 그 뿌리가 깊다.
약사 신앙에 대한 주요 소의 경전은
달마급다(達摩笈多)가 번역한 ≪약사여래본원경 藥師如來本願經≫,
현장(玄奬)이 번역한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
의정(義淨)이 번역한 ≪약사여래칠불공덕경 藥師如來七佛功德經≫ 등이다.
약사여래는 동방의 이상향인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 나타나는 부처님으로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열두 가지 대원(大願)을 세운 분으로 묘사된다.
이 열두 가지 대원 중 구병(救病), 현세적 복락, 고난의 해탈 등은
중요한 명제가 담겨 있어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려는 대중심리와 결부함으로써 많은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 신앙은 단적이고 현세 이익적인 경향을 띠기 때문에
민간신앙으로서는 깊은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신라에서는 선덕여왕 때 밀본(密本)이 ≪약사경≫을 읽어 왕의 병을 고쳤고,
755년(경덕왕 14)에 월성(月城)의 동쪽 분황사(芬皇寺)에
30만7600근의 거대한 약사여래상을 안치하였다.
이 약사여래는 사천왕(四天王)과
팔부신중(八部神衆) 및 십이지신(十二支神)을 그 권속(眷屬)으로 삼는다.
통일신라기의 석탑에 그 약사여래의 권속을 조각하는 풍습이 생겨난 것은
이 약사신앙의 한 단면이다. 많은 사찰에서 약사여래나
혹은 그 권속을 새긴 불상·벽화 등이 발견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조형예술로 표현된 약사여래상은 전부 신라 통일 이후의 작품이다.
경덕왕 대의 약사여래상에 대한 기록과 대비시켜 볼 때,
신라의 약사신앙은 680년 이후에 유행하였거나 경덕왕대인 8세기 중반으로 볼 수도 있다.
≪약사경≫에 대한 교학적 연구는 통일신라 시대의 약사신앙에 대한
이론적 토대의 구실을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이미 신라 하대에 이르러
약사신앙이 신라불교 신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시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아래 3점의 금동 약사여래도
그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모두 통일신라 후대에 조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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