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02호 정토사지 홍법국사실상탑과 탑비(보물 제359호)

2020. 2. 8. 20:23문화재

국보 제102호 정토사지 홍법국사실상탑(淨土寺址弘法國師實相塔)과 탑비(보물 제359)

 

정토사지(淨土寺址)는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 고려의 옛 사찰 터로서

충주댐 공사로 인하여 수몰되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1983년부터 1984년까지 발굴된 조사결과에 따르면

고려 전기와 조선 전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정토사(淨土寺), 개천사(開天寺) 등의 명문 기와가 발견되어 사찰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정토사와 관련된 문헌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어 사찰의 내력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천사(開天寺)는 정토산에 있다. 고려 역대 왕조의 실록을

처음에는 합천 해인사에 간직했다가 왜구로 인하여 선산(善山) 득익사(得益寺)에 옮기고,

 또 이 절에 옮기고, 또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에 옮겼다가,

1390(공양왕 2)에 그 땅이 바다에 가까워서 왜구가 쉽게 이를 수 있으므로

 다시 이 절에 간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세종 때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기 위하여 모두 서울로 운반하였다.”

 

이를 통하여 정토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던 1530년대에 개천사로 불렸고,

사찰은 고려 역대 왕조의 실록을 보관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충청도읍지에는 개천사재정토산하금폐(開天寺在淨土山下今廢)”라는

 내용이 남아 있어 영조, 정조 연간에는 이미 사찰이 폐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찰의 창건 내력은 알 수 없지만 고려 태조가 국사의 예우로 모셨던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玄暉)가 주지로 임명되어 많은 제자를 양성하다가

 941(태조 24)에 입적한 곳이며,

그의 뒤를 이어 홍법대사(弘法大師)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던 대찰이었다.

 

이 사지에서 출토된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7호로 지정된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

국보 제102호로 지정된 홍법국사 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과 보물 제359호인 탑비(塔碑),

법경대사 자등탑이 있다. 이 중 실상탑과 탑비는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져 보관되었고,

자등탑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이 밖에도 약 70년 전에 절터 앞 언덕에서 운판(雲版) 하나와 불상(佛像) 1구가 출토되었다.

이 중 운판은 대장장이가 깨뜨려 쇠를 녹이는 도가니에 넣었는데

도가니가 폭발하여 즉사하였다 하며,

 승려가 와서 불상을 집에다 두면 화가 온다고 하여 가져갔다고 한다.

현재 이 지역에는 정토사의 폐사에 얽힌 전설과

송도에서 조성한 법경대사비의 운반에 얽힌 전설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초에 이숭인(李崇仁)이 이 절의 풍경을 읊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실상탑 (忠州 淨土寺址 弘法國師實相塔)

국보 제102(19621220일 지정)

승탑 높이 : 255cm

제작연대: 고려 현종 8(1017)

 

 

이 승탑(부도)은 고려 목종 때의 승려인 홍법국사의 탑으로,

충청북도 중원군(현 충주시)의 정토사 옛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활약하였던 유명한 승려로서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선()을 유행시켰으며,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거쳐 목종 때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았다.

홍법(弘法)은 그의 시호이며, 실상(實相)은 탑명(塔銘)이다.

홍법국사실상탑비(보물 제359)의 비문에 의하면

 1017(현종 8)에 홍법국사가 입적했다고 하므로 이 탑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석조 부도의 일반형이라고 할 수 있는

 8각원당형(八角圓堂形)과는 계통을 달리하며,

현존하는 부도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데 비해

특이하게도 편마암을 사용하여 색다른 느낌을 준다.

이 탑은 전체적인 구성에서 신라 시대 이래의 석조 부도(石造浮屠) 양식의 전형인

 팔각원당(八角圓堂)의 기본형을 잃지 않으면서 일부에 새로운 창안을 가미한 작품이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기존의 방식대로 기단의 평면은 팔각을 따르지만,

탑신부의 몸돌을 타원형이나 구형으로 조성하는 등의 변화를 꾀한

부도들이 등장하는 데 몸돌이 구형으로 조각된 대표적인 사례가 정토사지 홍법국사실상탑이다.

   

 

 

 

 

 

 

 

 

 

8각 지대석(地臺石) 위에 복판연화문(複瓣蓮華文)이 장식된 복련석을 얹었고,

 

 

 

각 중대석 각 면에는 고려 시대 특유의 네모난 안상(眼象) 속에

운룡문(雲龍文)이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상대석(上臺石)은 얇고 원형에 가까운데,

밑에는 앙련(仰蓮)을 조각하였고 연판 안은 다시 꽃무늬를 장식하였다.  

 

 

 

상대석 상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8각으로 낮은 1단이 있고 중앙에 탑신을 받고 있다.

이 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탑신(塔身)의 몸돌로, 원구형(둥근 공 모양)을 하고 있다.

몸돌(탑신)에는 공을 가로·세로로 묶은 듯한 십()자형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그 교차점에는 꽃무늬를 두어 장식하고 있다.

 

 

 

탑신이 원구형이 된 것은 다층석탑의 복발형(覆鉢形)에서 얻은 착상인지도 모르지만

기발한 의장이 분명하며, 넓게 퍼진 기단부에서는 여유 있는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 탑이 일반 부도와 분명하게 구별되는 특징은 탑신석이 구형이라는 점인데,

이러한 예로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

 상방광사(上方廣寺)에 있는 송(()대의 탑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구형 탑신석 부도는 중국보다 시대가 떨어지는 회암사 지공 대사 부도(1372)

 나옹화상 부도(1376)를 기점으로 고려말 이후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양주 회암사 지공대사승탑과 석등)

 

 

 

 


옥개석에는 별다른 장식은 없으나, 8각 귀퉁이에 귀꽃이 있어 주목된다.

 

 , 지금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전각(轉角)마다 높직한 귀꽃을 달았는데

그 모양은 마치 큼직한 수막새와도 같다.

 

 

 

 

 

 

 옥개석 아랫면은 삿갓 모양으로 깊숙이 패어서 탑신 위에 놓인 원통형 석재 위에 얹혔고,

그 주위로 활달한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옥개석 정상의 연화좌 위에 형성되었을 것인데 현재는 전혀 부재를 남기지 않고 있다.

<조선고적도보>폐 개천사(정토사의 다른 이름) 홍법대사 실상탑이란 제목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상륜부의 보개 부분이 보인다.

1915년 반출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라졌는데

현재의 상륜부는 이 사진을 근거로 복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홍법국사실상탑은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8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신라의 탑형식을 잃지 않으면서 일부분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작품으로,

 제작연대는 고려 현종 8(1017)이다.

 

 

 

공 모양의 몸돌로 인해 알독이라고 불리기도 한 이 탑은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탑으로,

 섬세한 조각과 단조로운 무늬가 잘 조화되어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2)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忠州淨土寺址弘法國師塔碑)

 

문화재 지정: 보물 제359

건립 시기: 고려 현종 8(1017)

크기; 전체 높이 375. 비신 높이 222, 너비 105, 두께 22.5㎝ 

 

 

 

 

 

  

본래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지에 있던 것으로,

1915년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 탑(국보 제102)과 함께 경복궁으로 옮겨왔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구로 이전됨에 따라

홍법국사 탑과 탑비도 함께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귀부(龜趺비신(碑身이수(螭首) 모두가 완전한데,

부리부리하게 조각한 귀두(龜頭)와 용틀임을 투각한 이수의 작품특성이 주목된다.

 

홍법대사는 통일신라 신덕왕 대(재위: 912917)에 태어나 12세에 출가하였고,

그 뒤 당나라에 들어가 각지를 편력하고 귀국하여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의 칭호가 내려지고, 목종 때 국사에 봉하여 봉은사에 머물렀다.

그 뒤 정토사에 기거하다 입적하자, 목종은 시호와 탑명을 내리고

손몽주(孫夢周)에게 비문을 짓게 하여 1017(현종 8)에 탑비를 건립하였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 實相之塔(실상지탑)’이라는 해서의 제액이 있고,

 비신 상단부에는 開天山淨土寺故國師弘法大禪師之碑

(개천산정토사고국사홍법대선사지비)’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비문 앞면에는 행적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문도들의 직명이 적혀 있는데,

편마암의 비 표면이 마멸되어 판독이 어렵다.

글씨는 2정도의 구양순류의 해서로, 짜임새가 정리되었으나 변화가 적은 것이 아쉽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의 거북 머리는 용의 머리로 바뀌어있는데,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에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이다.

용의 표현은 다른 탑비의 받침돌에 비하여 구체적이고 힘차다.

또한, 머릿돌에도 용틀임 조각을 하였는데 그 수법이 주목할 만하다.

 

 

 

 

 

현재의 지대석은 새로 만든 것이며, 원래의 것은 개천산 옥녀봉 중턱의 원래 위치에 매몰되어 있다.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비의 비좌에는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각 면에 안상(眼象)을 음각하였다. 귀부형의 받침돌은 사실적으로 조각했고

등에는 귀갑을 새겼으며 귀두는 용머리 모양이다.

반쯤 벌린 입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거북등 위에 비공 받침을 만들고 주위에 연꽃을 조각했다.

 

 

 

 

 

 

 

 

 

 

 

비신의 높이는 229이며 폭은 104이고 두께는 23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비문은 구양순체 해서나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렵다.

비 앞면에는 대사의 행적이,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편마암인 비의 표면이 많이 깎여서 알아보기 어렵다. 현종 8(1017)에 건립되었다

 

 

 

비신천계(碑身天界)에는 비액을 좌횡에 자경 8

개천산정토사고국사홍법대선지비(開天山淨土寺故國師弘法大禪之碑)’라 전서하였다.

비문 면에는 종횡 세선으로 방형행간(方形行間)을 새겼고,

 비문은 자경 2.2의 구체(歐體) 해서이다.

이면에는 입실제자(入室弟子) 및 재가제자(在家弟子) 등의 명목(名目)을 열거한

자경 3의 행서(行書) 음기(陰記)가 있으나 풍화, 마손되어 거의 판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비문은 대송고려국중원부개천산정토사원광편소홍법대선사……

(大宋高麗國中原府開天山淨土寺圓光遍炤弘法大禪師……)”로 시작하여

세차정사구월일입(歲次丁巳九月日立)”로 끝을 맺었다.

 

 

 

 

이수의 반룡은 구체적으로 조각하였고, 앞면 중앙에 실상지탑(實相之塔)’이라고 해서로 제액(題額)했다.

귀부는 운각반중(雲刻盤中)에 조출되었고, 각 면에 안상(眼象)을 각출(刻出)하였으며,

귀두는 용두화(龍頭化)한 함주 개구형(含珠開口形)이다.

 

 

 

이수의 중앙에는 전액으로 해서를 새겨넣었고,

전액을 대칭으로 반룡(蟠龍)된 힘찬 조형은 다른 비에 비하여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비는 거북 받침돌 위에 비의 몸체를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로 바뀌어있는데,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에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이다.

용의 표현은 다른 탑비의 받침돌에 비하여 구체적이고 힘차다.

또한, 머릿돌에도 용틀임 조각을 하였는데 그 수법이 주목할 만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홍법국사(弘法國師)>

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한 승려 홍법국사의 생전 활동 모습에 관해서는

어디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비(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碑)가 전해지고 있어

비문의 내용을 통해 부분적이지만 그 생애의 일부를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비문마저도 마멸이 심하여 전문의 정확한 판독은 불가능한 상태이며

판독이 가능한 부분만을 토대로 출생 연도를 추정해보면

대략 통일신라 말 신덕왕대인 912년에서 916년 사이인 것으로 보인다.

 

출가 시기의 경우 탑비에 일기의 성상을 지나 출가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12세에 출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출가한 해가 언제인지는 탑비의 마멸로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930(태조 13)에 인계받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활동하던 무렵에 보통 승려들이 출가에서

 수계받기까지 걸리는 년 수가 3~6년이었던 것과 대조해 볼 때

그의 출가 시기도 대략 921~927(태조 4~10)사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홍법국사가 출가한 사원에 대해서도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활동했던 고승들의 출가 사원에 관한 자료를 분석해 보면,

대체로 개경 지역보다는 출신지와 서로 인접한 지역의 사원으로 출가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홍법국사의 출가 사원도 그의 출생 연고지와 가까운 인근 지역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고려 태조는 관단사원을 설치하여 구족계의 수계를 국가 차원에서 관장하였는데,

이에 대한 첫 번째 사례가 홍법국사의 경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탑비에 홍법국사가 930(태조 13)에 마가갑사(摩訶岬寺) 계단(戒壇)에서

수계하였음을 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가갑사는 오관산(五冠山)에 소재한 사찰이었고 오관산은 개경의 진산이었다.

이처럼 개경의 진산에 문을 연 사찰이라면 태조에 의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큰 사찰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문에 의하면 홍법국사가 화양(華壤)에 가서 유학할 것을 결심하고,

입조사(入朝使)인 시랑 현신(玄信)의 배에 편승하여

아무런 사고 없이 운도(雲濤)를 헤치면서 바다를 건넜다라고 적혀 있는 바와 같이

 입조사인 현신 일행의 배를 얻어 타고 중국으로 유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홍법국사가 유학길에 오른 것은 구족계를 받은 930(태조 13)으로부터 5년 정도가 지난 935년경이었으며

절강 지방으로부터 시작한 구도 여행이 복건성 지방으로 계속 이어졌음을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귀국 후 홍법국사는 개경의 보제사와 봉은사 등의 사찰에서 홍법 전도에 전념하였다.

홍법국사가 국사에 추정될 때 승계는 대선사였다. 대선사는 선종 승려의 최고 직위였으며

홍법국사가 대선사가 된 것은 성종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중세상(中世上)에 수록된 판독문에

 강궐문조첩 성종문의대왕지천선사 목종의양대왕

(絳闕門稠疊成宗文懿大王知天禪師 穆宗宣讓大王라 소개되었으나,

한국금석문대계(韓國金石文大系)에 소개된 판독문에는

강궐□□성종문의대왕가대선사 목종의양대왕

 絳闕□□成宗文懿大王加大禪師 穆宗宣讓大王이라 하여

지천(知天)’가대(加大)’로 판독하고 있다.

문맥상으로 지천선사라는 부자연스러운 해석보다는

성종문의대왕이 대선사를 더하여 주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타당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홍법국사가 봉은사에서 활동했던 시기도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목종 때 국사에 책봉된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비문에 결락이 심하여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휘호(徽號)□□국사(□□國師)”라 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현재 해독이 가능한 부분만으로도 성종과 목종 대에 고승으로 우대되었음이 확실하고,

특히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문헌 기록이나 금석문 기록 어디에도

성종과 목종 대에는 국사나 왕사의 책봉을 전해 주는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홍법국사는 정토사를 하산소로 삼아 만년을

보내다가 목종 때 가부좌를 맺고 앉은 채 입적하였다고 전해진다.

 

[학문과 사상]

홍법국사는 중국에 유학하여 여러 선지식을 두루 섭렵하였다.

비문에 삼라만상이 모두 파초와 같이 허무하다는 제행무상의 법문을 억념하여

 법성(法性)이 모두 공()한 이치를 깨닫고 색신(色身)은 마치 환몽과 같음을 관하였으니,

 도를 배움에 있어서 어찌 고정된 스승이 있겠는가!”라 전하고 있듯이 스승을 찾아 구도의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회상을 차리고 학인을 지도하니, 누구나 법()을 물으면

빠짐없이 대답하였음은 흡사 대상에 놓여 있는 거울이 만상을 비추되

피로를 잊음과 같아서 어두운 곳을 비추지 않는 데가 없었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학문적 성취가 일취월장하여 큰 발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육조에 이르러 크게 사선을 연창하여 대대로 이를 상전하며,

진리의 등불이 꺼지지 않고 상속하였다. 모든 제자가 스님의 법수에 젖었다라 한 바와 같이

 선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모든 제자가 스님의 법수에 빠져들 만한 경지에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상훈과 추모]

비문에 선왕인 목종께서 부음을 듣고 진도 하셨다라 한 바와 같이

목종 재위 기간인 99710~10092월까지 중 어느 해일 것이나 자세한 날짜는 알 수가 없다.

 목종은 국서로 조의를 표함과 더불어 물품을 보내 부의하였으며

 부처님께 정공을 올려 현복이 되게 하는 한편,

특히 역명(易名)의 옛 의전을 받들어 장차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휘유를 전하여

시호를 홍법(弘法)이라 하고 탑명(塔銘)을 실상(實相)이라 하였다.

 

아울러 예부상서로 당대의 명필이었던 손몽주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하여

1017(현종 8)에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과 탑비가 완성되었다.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과 탑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유지(遺址)는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하실에 있으며

마을 북쪽에 있는 옥녀봉[710.5m] 남쪽 끝자락에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비지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