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제82호) 과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제81호)

2020. 2. 1. 22:57문화재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제82) 과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제81)

 

1)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慶州甘山寺石造阿彌陀如來立像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 국보 제82

크기 : 높이 1.74m

제작 시기: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으로 719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82. 높이 1.74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륵보살입상과 함께 경상북도 경주시 내동면 신계리 감산사지에 있었던 것을

1915년에 서울로 옮겨왔다.

 전형적인 등신대 불상인데 광배 명문에 의하면

 719년경에 당시 집사성 시랑을 지낸 김지성(金志誠)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이며

양식면에서는 8세기 전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불신·광배·대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불상은 불신과 대좌의 높이 비율이 3:1이고,

등신대의 불신에 적당한 광배로 전체적인 구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균형을 이룬 구도는 형태에서도 잘 나타나

머리와 불신의 높이 비율이 1:4,

굴불사지석불상 중 아미타상이나

 벽도산 아미타상(碧桃山阿彌陀像)과 함께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이다.  

비록 정면에서 보면 엄격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강건한 풍모의 석불입상이지만

부풀고 풍만한 얼굴에 눈··입은 세련되게 표현되어,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사암불입상(砂巖佛立像) 같은 이국적인 과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 신라의 토속적인 얼굴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떡 벌어진 가슴과 팽팽한 어깨, 당당하게 버티고 선 위엄 있는 자세 등은

 감각적인 사실주의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

얼굴이나 신체의 묘사에서 자비스러우면서도

당당한 부처님의 위엄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주형 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를 등지고 있는 이 불상은  당당하고 위엄 넘치며,

비교적 두꺼운 옷 속에 둘러싸여 있어서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다.

하지만 신체 각 부분의 탄력적인 모습과 함께

박진감이 넘치는 표현은 인체를 이상적인 불신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불상은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전신으로 걸치고

 U자형의 주름이 상체에 유려하게 흐르다가

다시 양쪽 다리로 각각 내려가서 옷 주름을 이루고 있다.

두 다리의 U자형 옷 주름과 함께 목의 옷깃을 한 번 뒤집는 반전수법(反轉手法)

전형적인 우드야나(udyana, 優塡王像)식 착의법이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신라 불상에서는 이 불상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불의는 약간 두꺼우면서 악센트를 강하게 넣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불상 형태와 함께 불상 자체도 박진감 나도록 하는 요인이 된다.

 

 

 

 

 

 

 

 

  

불상 광배 뒷면에 새긴 21391자의 불상 조성기는

이 불상이 법상종 사찰의 강당에 모시던 아미타불임을 밝히고 있어

금당주존(金堂主尊) 미륵보살과 함께 당대 법상종의 신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시대에 완성된 이상적인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일 뿐만 아니라 명문에 의해 조성연대와 발원자가 분명히 밝혀진 불상으로서

우리나라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慶州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시대: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국보 제81

크기 : 총 높이 2.57m

제작 시기: 71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715년에 제작된 보살상으로 전체 높이 2.57m, 불상 높이 1.83m이며

국보 제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경상북도 경주시 내동면 신계리 감산사(甘山寺)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함께 발견된 아미타여래입상과 함께 1915년 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광배의 뒷면에는 선각으로 새긴 긴 명문이 있는데,

비슷한 내용의 명문이 같이 발견된 아미타여래입상의 광배 뒷면에도 있다.

 

 

 

명문에 의하면 이 보살상의 조성한 사람은 김지성(金志誠)이다.

 

그는 통일신라 시대 중아찬(重阿 飡)의 집사시랑(執事侍郎)까지 지냈으며,

 67세에 관직을 떠나서 719(성덕왕 18)에 자기의 땅

 감산장전(甘山莊田)을 바쳐 감산사를 짓고,

석조 아미타불입상과 이 미륵보살상을 만들어 부모의 명복을 빌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중엽까지는 고승들에 의하여 많은 경론 주석서들이 나온 시기로

 경주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의 명문에는

 유가사지론과 관련이 있는 무착(無著)’, ‘십칠지지법문(十七地之法門)’ 등이 언급되어 있어

이 보살상을 조성한 김지성이 법상종과 관련 깊은 유가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명문 중 일부는 삼국유사3 남월산조(南月山條)에도 전한다.

 삼국유사에는 이 미륵상을 금당에 안치하였다고 하여

감산사의 주존이 미륵보살이었음을 알 수 있고,

아울러 우리나라 불교 법상종(法相宗)의 주불이 미륵보살이었음은 여러 기록에도 보인다.

 

 

 

 

 

 

이 보살상은 커다란 주형 광배(舟形光背)와 고부조(高浮彫)의 불신(佛身)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연꽃의 대좌 위에 얹혀 있다.

얼굴은 살이 찐 편으로 두 턱이 졌으며 눈은 부은 듯하고

큰 코와 꽉 다문 두꺼운 입에서 약간 이국적인 인상을 느낀다.

 

 

 

가슴에는 두 줄의 매우 화려한 목걸이가 있고, 팔뚝과 손목에 팔찌가 있으며,

영락(瓔珞)이 왼쪽 어깨에서 늘어져 오른쪽 무릎 뒤로 돌려져 있다.  

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가슴을 가로질러

오른쪽 겨드랑이 뒤로 돌려져서 오른 팔뚝을 두 번 감고 아래로 늘어졌고,

왼쪽 부분은 시무외인(施無畏印)처럼 들려진 왼손의 팔뚝에 걸쳤다가

 밑으로 구불거리며 늘어져 있다. 천의의 주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그 접힌 끝부분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치마형식의 하의(下衣)는 허리 부분에서 겹쳐져서 굵은 띠 장식으로 매어졌고,

접힌 자락은 여러 겹의 짧은 주름을 이루고 있다.

치마의 주름은 두 다리 사이로 모여서 허리 쪽으로 끌어올려 졌으며,

그 늘어진 주름의 형태가 약간 도식적인 굴곡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한 개의 돌로 조각되었으며, 맨 위에는 위를 향한 앙련(仰蓮)이 있고,

그 밑에는 복련(覆蓮)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맨 밑에는 팔각대석(八角臺石)을 받치고 각 면에 안상(眼象)을 음각하였다.

 

 

 

이 보살상은 복잡한 장식이 있는 높은 관을 썼는데,

그 윗부분에 작은 부처의 앉은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보살의 관에 이러한 화불(化佛)이 있는 경우는 대부분 관음보살을 나타내고 있는 데 반하여

미륵보살로 명문화되어 있어 미륵보살의 도상으로서는 특의한 경우이다.

 

 

 

불상 전체로 보아 몸을 약간 오른쪽으로 비튼 삼곡(三曲) 자세이며,

어깨는 넓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둥글고 통통한 팔뚝으로 이어지고,

허리와 두 다리의 신체적 굴곡을 강조하듯 표현된 옷 주름의 처리 등이 매우 육감적인 느낌을 준다.

또한, 천의를 걸친 형식이나 목걸이, 허리띠, 치마를 입은 모습에서

삼국시대 보살상의 양식과는 다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표현은 통일신라 시대에 새로 도입되어 유행하였던 보살상 양식으로,

 이와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는 예로는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삼존불의 양쪽 협시상(脇侍像)이나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 석불의 서쪽 보살상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보살상은 조성연대가 약간씩 다르기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같은 계통의 원형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새로운 불상 양식의 근본적인 원류는

 인도의 굽타 시대의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VictoriaAlbert Museum) 소장의

산치 출토 석조 보살상 등과 연결되고, 점차 중국 당나라 불상 양식으로 진전되어

통일신라 시대에 영향을 주게 된다.

중국 당()나라 장안(長安)의 보경사(寶慶寺)의 벽을 장식하였던

여러 종류의 삼존불상의 협시보살상들과 비교가 되는데,

특히 이 상들은 703년과 704년에 해당하는 명문들이 있어 양식 비교연구에 적절한 예라고 생각된다.

 

 

 

그 시대의 보살상은 사선으로 설친 영락인 사괘(斜卦) 등의 표현은 보이지 않으나

벌거벗은 나형(裸形)의 상체에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겨드랑이를 사선으로 묶은 낙액(珞腋)을 두르고,

허리에서 한번 접어 착용한 요포(腰布), 화려한 목걸이를 착용한 보살상의 모습은

보경사(寶慶寺) 등과 같은 당()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포가 밀착되어 나타난 다리의 양감과 이상적인 사실주의적 모습은

 8세기 동아시아 삼국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국제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다리 사이로 지그재그로 흘러내리는 옷 주름은

 당() 신룡(神龍) 2(706)에 조성된 보살입상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동시대 당() 보살상과의 유사성이 확인된다.

 

   

 

 

이 감산사 보살상의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신라사

혹은 금석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감산사 보살상의 조성연대가 719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산사 보살상은 확실한 기년명 작품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 조각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당시의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보살상 양식과의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어,

8세기 신라 불상의 국제적 성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