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27. 23:54ㆍ문화재
영통사 청동 빈도르좌상
@빈도르는 우리 사찰에서 독성이나 나반존자로 불리는 나한으로
원래 이름은 빈두로 파라타 또는 빈도로파라타로 이다.
이 나한상은 청동(구리)으로 조성된 지극히 보기 드문 조상(彫像)중 하나에 속한다.
경기도 오산시에서 출토되었고, 제작 시기는 11세기에서 12세기로 추정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설명서에 따르면
「두건을 머리에 쓰고 승복 위에 가사를 거쳤으며, 목에는 목걸이를 한 나한상이다.
나한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아라한(阿羅漢)이라고도 한다.
이 나한은 옆면에 두 개의 안상(眼象) 무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앉아 있고, 대좌 정면에는
‘제일빈도르존자 영통사 ㅁ의 ㅁ승 조성 第一賓度魯尊者 靈通寺 ㅁ依 造成’ 라는 명문(銘文)이 있다.
이로 보아 개경 교외 오관산(五管山)에 있던
거대 사찰 영통사의 승려가 이 상을 만들었다고 추정된다.」라고 되어 있다.
@영통사는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영남면 오관산 영통동(靈通洞)에 있는
고려 현종 18년(1027)에 창건된 사찰로
대각국사 의천(義天)도 1065년에 이 절에서 출가하였고,
그의 입적 후인 1125년(인조 3)에는 비를 이 절에 건립할 정도로
고려 왕실이 다른 어떤 사찰보다 후원을 많이 했던 절로,
왕실에서 주관하여 재(齋)나 기신도량(忌晨道場)도 많이 개설되었다.
불행히도 1901년 5월 화재로 사찰이 전소(全燒)되었다.
이후 2002년 11월 대한민국의 대한불교천태종 교단과
북한의 조선경제협력위원회가 함께 복원사업에 착수하여
2005년 10월 2만여 평의 부지에 29개의 전각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동 빈도로좌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두건의 끈은 양쪽 어깨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목에는 영락(瓔珞)이 아닌 굵은 염주를 두르고 있다.
양손에는 막대기를 들고 있는데 이는 선사(禪師)들의 지물인 불자(拂子)로 추정된다.
몸에는 승복(장삼) 위에 가사(袈裟)를 걸치고,
가사는 길게 늘어져 결가부좌한 무릎과 두 발을 가리고 있다.
나한이 안치된 사각형의 대좌는 보기 드문 특이한 형식에 속한다.
상대와 하대는 두께가 얇은 편으로 높이와 너비가 거의 비슷하다.
중대는 각 면의 모서리에 기둥을 조각하고 그사이에 탱주를 두어
두 개의 안상(眼象) 무늬를 투각으로 조성하였다.
3면은 모두 투각(透刻)이지만 명문이 모사된 전면만은 양각(陽刻)이다.
이러한 대좌 형식은 경기도 판교에서 발견된
고려 시대의 동제(청동) 비로자나불좌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함께 출토된
2기 지장보살좌상에서 볼 수 있다.
(판교출토 비로자나불좌상과 추정 지장보살2기)
@빈도로(빈두로) 나한의 원래 이름은 빈두로파라타(賓頭盧頗羅墮: Pindola bharadvaja)이다.
십육나한 중 한 분으로 번역하여 부동이근(不動利根)이라 한다.
석가모니불의 제자로, 빈두로는 이름이며, 파라타는 성(姓)이다.
(한자로 표기할 때 빈도로(賓度盧) 또는 빈두로(賓頭盧) 하는데 차이는 없다)
흰 머리와 긴 눈썹을 가진 나한으로 모사되며.
원래 발차국 구사미성(코삼비성) 재상(宰相)의 아들로,
어렸을 때 불교에 귀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여러 곳을 다니며 전도하였다.
부처님이 성도하신지 6년 되던 해 어느 날
목건련과 시내(市內)로 탁발(托鉢)을 나갔을 때
어떤 부호(富豪)가 전단향(旃檀香) 나무를 공중(空中)에 매달아 놓고,
누구든지 신통력(神通力)으로 그것을 가져가라고 하는 것을 보고
그가 신통력(神通力)을 나타내어 그것을 따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외도(外道)들의 조소(嘲笑)를 받았으므로 부처님으로부터
부질없이 신통(神通)을 나타내지 말라는 질책(叱責)을 들었다.
그 후 부처님의 명으로 불구야니주(不瞿耶尼洲)에 가서 교화하고,
다시 돌아와 부처님의 명을 받아 열반에 들지 않고 남인도 마라산에 있으면서
불멸 후 중생을 제도하였다. 말세의 공양을 받아 대복전(大福田)이 되었으므로
주세아라한(住世阿羅漢)이라 이름하였다.
후세 인도 대승(大乘) 절에서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상좌로 하고,
소승(小乘) 절에서는 빈두라를 상좌로 하는 풍습이 생겼다.
중국에서는 동진(東晉)의 도안(道安)이 처음으로 빈두라를 신앙하고
송(宋)나라 진한 말기(秦初末期:471)에 법현(法顯), 법경(法鏡) 등이
처음으로 그의 형상을 그려 공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성, 나반존자라 하여 절에 봉안되었다.
청주 용화사의 석조 독성
@빈두로존자의 설화 하나
빈두로파라타 존자는 "구섬미국" 사람으로 한때 우진왕의 신하였다.
빈두로는 이름이고 파라타는 성인데 우진왕을 도와 백성을 다스리다
우연한 인연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 우진왕의 마음을 움직여 출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빈두로는 바로 그날로 출가하여 스님이 된 빈두로는 타고난 슬기와 노력으로
몸과 마음을 닦아 다른 수행자보다 앞서 진리를 깨우쳐 아라한이 되었다.
빈두로가 지혜와 공덕을 깨달은 후 우진왕은 자주 그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때는 스님의 지위가 가장 높아, 왕이라 할지라도 스님은 허리를 굽혀 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빈두로존자는 우진왕이 찾아와도 합장하고 예만 갖출 뿐이었다.
" 존자님, 잘 계셨습니까 ? " " 예 어서 오십시오."
둘은 허물없이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때 자기 신하였던 빈두로 존자가 그렇게 대해도 우진왕은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교를 믿지 않는 다른 신하들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몹시 기분이 상했다.
" 왕이시여 ~빈두로가 어쩌면 저렇게 건방지고 오만할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아라한이 되었다 할지라도 직접 모셨던 왕인데
마치 신하를 대하듯 하니 그 행동이 무례하기 짝이 없습니다. "
" 빈두로는 아라한이 왕보다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설마 그럴리가 있겠소?"
우진왕은 주위에서 그렇게 계속 나쁜 말을 해도 고개를 내 저었다.
하지만 간신들이 되풀이해서 나쁘게 말하자 우진왕도 조금씩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간신들의 말을 들은 우진왕은 은근히 화가 치밀어올랐다.
"좋아, 내가 오는 빈두로를 찾아갔을 때 직접 밖으로 나와,
꿇어앉아 절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빈두로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 두고 보자!"
이렇게 마음먹은 우진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빈두로존자가 수행하는 동굴로 갔다.
하지만 빈두로 존자는 그 일을 미리 알고 우진왕이 도착할 때쯤
동굴 밖까지 나와 아주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 이렇게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누추한 곳이지만 햇볕이 뜨거우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 빈두로 존자는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큰절했다.
" 아니 이럴 수가 . . . ."
우진왕은 너무 뜻밖이라 뜨끔했다. " 내 속마음을 먼저 알고 있군, 과연 . . . ."
우진왕은 빈두로 존자의 태도를 보고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우진왕은 곧 말에서 내려 자신도 공손하게 예를 다한 뒤 동굴 안으로 들어가
빈두로 존자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우진왕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고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를 때는 내가 존자를 만나러 올 때 존자는 동굴 안에 그대로 앉아 나를 맞이했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바깥까지 나와 반갑게 맞아 주셨는지요?"
빈두로 존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지금까지 임금님은 부처님을 정성껏 모시고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존경하며 몸과 마음을 닦으셨지만,
요즘은 다른 사람들의 간사한 말을 듣고 불법을 멀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전에는 임금님과 제가 다 함께 부처님의 제자였기에
구태여 밖까지 나가서 영접하지 않아도 서로가 반갑게 생각되었지만,
오늘은 전과 달리 임금님의 마음속에 칼을 품고 오셨습니다. 얼굴에도 살기가 등등합니다.
그런데 제가 전처럼 앉아서 임금님을 맞이했다면
임금님의 무서운 칼이 제 목을 베어 버렸을 것 아닙니까?
임금님께서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하여 아라한을 죽이고
영원히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보고만 있겠습니까."
" 빈두로 존자, 내가 정말 큰 죄를 지을 뻔했구려. 나를 용서하십시오.
앞으로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말씀만 따르도록 할 테니 잘 이끌어 주시오."
우진왕은 경솔하게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한 자신이 부끄러워
빈두로 존자를 감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우진왕은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가 민망하여 급히 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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