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미소>라 불리는 판교 출토 고려 시대 청동 비로자나불좌상

2020. 2. 1. 00:11문화재

<고려의 미소>라 불리는 판교 출토 고려 시대 청동 비로자나불좌상

 

법당에 모신 불상(佛像)을 보면 크기의 대소(大小)를 불문하고

 대개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보다는 장엄(莊嚴)하고, 근엄한 상을 짓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불상을 통하여 광배(光背)32() 등 초인간적인 신비한 면을 부각함으로써

경외심(敬畏心)을 불러일으키고 신심(信心)을 돈독 시키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딱딱한 바위에 온기를 불어넣어 경외심보다도

부드럽고 친숙한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의 미소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국보 제84호로 지정된 서산 운산면 용현리 마애삼존불이 있는가 하면,

 

 

(서산용현리마매삼존불 국보 제84호)

어린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치기 어린 해학적인 그림과 같은

 바위에 모각된 이천의 소고리마애삼존석불과 같은 불상도 있다.

 

 

(이천소고리마애삼존불)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이관된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을 보러 들렸다가

우연히 어느 법당에서는 볼 수 없는 재미난 불상을 보게 되었다.

 화엄경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상인데

서산 운산면 용현리 마애삼존불보다 더 감미롭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판교 출토 청동 비로자나불좌상)  

 

이 불상은 2002~2008년 판교 택지개발 당시 낙성초교 인근의

옛 고려 시대 건물터에서 출토된 3점의 불상 중 하나로

발굴에 참여했던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지구의 문화유적발굴조사단(2007~2008)

불교미술 사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그 중 한점은 비로자나불이며,

다른 2점은 지장보살로 추정하고 있다.

재질은 모두 청동이며, 조성 시기는 비로자나불좌상은 12세기 후반,

추정 지장보살좌상은 12세기 전반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비로자나불의 미소는 감미로워 성남시 판교박물관 개관기념일

 <성남에서 피어나는 고려문화>라는 타이틀로

일명 <고려의 미소>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권인을 한 청동 비로자나불의 크기는 22.5*14.7*40.3cm이며 조성 시기는 12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지장보살로 추정되는 2점은 크기가 우측은 29.7*15.9*11.3cm이고 좌측은

30.3*15.8*11.4cm이다. 조성시기는 12세기 전반으로 보고 있다.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로 추정되는 이 3점의 불상 좌대도 독특한 형식에 속한다.

사각형의 대좌로 상대와 하대는 두께가 얇은 편으로 높이와 너비가 거의 비슷하다.

중대는 각 면의 모서리에 기둥을 조각하고

그사이에 안상(眼象)으로 보이는 문양을 투각하여 장식하였다.

비로자나불좌상은 뒷면을, 추정 지장보살은 앞면을 양각으로 처리하고

 3면은 모두 투각으로 안상(眼象)을 부조(浮彫)하였다.

 

 

이러한 대좌 형식은 경기도 오산시에서 발견된

 고려 시대의 동제(청동) 빈도로존자상(賓度盧尊者像,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볼 수 있다.

(본방 영통사 청동 빈도르좌상 참조)

 

 

비로자나불좌상은 나발과 높은 육계가 분명하고,

삼도(三道)는 마모되었지만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눈꺼풀과 입술은 두텁게 조성되어 깊은 미소를 짓고 있다.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상징인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으며,

법의(法衣)는 기림사의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959)과 같은 통견으로

위는 <>형이며, 아래는 <>형으로

물결 모양의 주름이 흘려내려 가부좌한 무릎까지 덮고 있다.

 

 

 

좌대의 앞면과 양 옆면은 안상이 투각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만 양각으로 되어 있다.

이 청동 비로자나불좌상의 조성 시기는 12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추정 지장보살에 대해서는 2점 모두를

지장보살로 보기는 모호한 점이 있어 학계에서 의견도 분분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안내서에서는 승가 대사와 지장보살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이 추정 지장보살 2점은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쓴 두건과 두건의 띄는 귀까지 덮어 길게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그 형태로만 보면 일반적인 고려 시대 지장보살상에서 볼 수 있는 형태와 많이 다르다.

 

 

 

수인을 보면 합장인(合掌印)을 한 모습인데

지장보살이 합장을 하고 있는 경우는 대개 아미타불의 협시불로 봉안될 때 주로 취하는 자세이다.

 

 

 

 이 지장보살로 추정되는 2기의 조성 시기는 비로자나불좌상보다

조성 시기가 조금 빠른 12세기 전반으로 불교미술 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두건(頭巾)의 형상은 둔황에서 발견된 승려의 모습과 비슷하고,

북한산 승가사의 석조 승가대사(僧伽大師)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동국대 박물관 목조아미타삼존불감 1637년 작 )

 

(평창 월정사 남대지장암 목조 아미타삼존불감 강원도유형문화재 158호)

 

 


 

 

 

 

 

이를 근거로 본다면 이 추정 지장보살좌상은 승가대사가 아닌가 추정해 본다.

또한, 비로자나불좌상과는 시대가 맞지 않아 비로자나불의 협시로도 보이지 않는다.

서강대 동아연구소 HK교수도 부여군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판교 출토 이 조각상을 승가대사상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는 점에서

 12세기 무렵 오대에서 송대에 걸쳐 널리 신앙된 중국 승가의 도상을 빌어

고려인들이 조성한 지장보살상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승가 상을 지장보살로 숭배해온 것이라는 의미다.

 

 

(북한산 승가사 석조 승가대사좌상. 보물 제1000호)  

 

승가대사는 서역인으로서 서기 640년에 출생하여 7세기경에 당나라로 건너와

53년간 불교 전교에 헌신한 분으로 교리에 밝고, 송주(誦呪)에 능하여

많은 신도들이 그를 존숭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죽은 뒤 십일면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숭배되어 비를 내리고,

홍수를 다스리며 병을 낫게 하는 영험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1세기 송나라 彩繪(채회) 석조. 僧伽大師좌상)

 

 

 통일신라말에 승가대사의 신앙이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어

나라에서 봄, 가을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승가대사의 조상(彫像)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가사를 입고 선정인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북한산 승가사의 석조 승가대사 좌상(보물 제1000)도 이와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명문으로 광배 뒷면에 1024(현종 15)

지광 등이 발원하여 승려 광유(光儒) 등이 만들었다는 명문(銘文)의 기록이 있다.

 

 

 

판교에서 출토된 이 3기의 불상은 조사단과 불교미술사학자들이 감정한 결과에 따르면

불상의 상태가 대단히 양호하여, 어느 고려시대의 불상보다 아름답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이들 조각상은 원형 그대로 남았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았으며,

 청동에 기포하나 없이 매끄러운 등 주조기술도 뛰어났다는 평가하고 있다.

 또한 학계에서는 판교 출토 조각상 이 3구의 불상들은

고려후기 지방에서의 신앙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풀이하고 있다.

서산 용현리의 마애석불이 <백제의 미소>라 칭하듯

판교의 이 청동비로자나불좌상의 미소는 실로

 <고려의 미소>라 불러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걸작품이라고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