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2020. 2. 2. 21:04문화재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0.8이다.

1920년대에 경주 오릉(五陵) 부근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설이 있을 뿐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서

 삼산반가사유상(三山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리며,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함께 삼국시대 불상 중에서 대표적인 예로서

조형적으로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6212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83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628일 현재의 명칭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변경되었다.

 

 

 

특히 6~7세기 동양 불교 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이 있으며

일본 교토시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일본 국보제1)과 매우 흡사해

한일 고대 불교 조각 교류 연구에 있어 큰 주목을 받아 왔다.

 

 

(교토 고류사(廣隆寺) 소장, 높이 123.5cm. 일본 국보 제1호)

 

 

 

 

 

이 불상은 두 줄로 융기된 목걸이 외에는 몸에 전혀 장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전반적으로 단순함을 강조한 둥근 조형감이나

좀 더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옷 주름 표현, 움직이는 듯이 조각된 두 손과

 두 발의 모습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생동감이 잘 나타나 있다.

 

 

 

앞으로 숙인 둥근 얼굴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에 밝은 미소를 띠고 있어 소년과 같은 신선함이 느껴진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 사유하는 모습이며 양

눈썹과 콧등의 선은 길게 연결되면서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얼굴에 보이는 잔잔한 미소는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종교적인 평온함을 주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준다.

 

 

 

목에는 가는 음각선의 삼도(三道)가 있고

상체에는 2줄로 도드라진 목걸이 이외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는데,

팔과 몸체는 비만하지 않으면서도 미묘하게 근육이 묘사되어 사실감이 돋보인다.

머리 뒷부분에는 긴 촉이 달려 있어 광배(光背)를 꽂았음을 알 수 있다.

 

 

 

 

 

날씬하면서 둥근 맛이 강한 신체에는 천의(天衣)가 몸에 완전히 밀착되어

 옷 주름이 전혀 표현되지 않은 데 비해 군의(裙衣)의 옷 주름은

두 다리를 덮으면서 무릎과 다리의 입체감을 강조하고 대좌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특히 반가좌(半跏坐)한 오른쪽 무릎이 힘있게 솟아오른 부분에는

옷 주름이 생략되어 상 전체에 강한 생동감을 준다.

또한, 허리 양쪽에서 내려온 옷자락은 양다리 옆에 있는

둥근 고리를 통해 늘어져 엉덩이 밑으로 감추어져 있다

 

 

 

금동반가상의 왼쪽 다리는 별도로 마련된 연화족좌(蓮花足座) 위에 놓여 있는데

왼쪽 발과 족좌의 앞부분은 후에 수리된 것으로 원래는 크기가 조금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불상보다 높이가 낮은 편으로

 받침대 위에 둥근 방석이 놓여 있는 특이한 등나무 의자의 형태로 되어 있다.

 

 

 

대좌를 덮어 내린 상의의 옷자락은 2단의 주름을 형성했는데 조각이 깊고 사실적이다.

그 밖에 몸 옆으로 내려온 허리띠나 둥근 옥장식,

 둥근 대좌의 표현이 모두 섬세하면서도 정제된 완성미를 보여준다.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이 예리하면서 장식적이고 기교적인 조형미를 보여준다면

이 상은 간소하고 자연스러운 조형미를 통하여 생동감을 준다.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이러한 표현은 기본적으로 중국 북주·복제 시대 반가사유상의 형식이나

조각 양식을 반영하면서도 더욱 단순화되고 자연스럽게 다듬어져

 조각적으로 더 발달한 단계로 보인다. 같은 유형의 국내 반가사유상으로는

 평양 평천리 출토 금동반가사유상이나 경주 단석산마애반가사유상이 있으며

제작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2가지 의견이 있다.

그러나 1966년 경상북도 봉화에서 석조반가사유상의 하반신(경북대학교 소장)이 발견된 후

 두 상의 형태나 옷 주름 처리에서 유사성이 지적되고 있다.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 보이는 균형 잡힌 신체 비례나 생동감 있고

안정감 있는 불신(佛身)의 모습 등은 중국 동위에서 복제 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대체로 7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신라 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상 전체에 나타나는 둥근 맛이나 단순한 조형감 등은

백제적인 요소로 백제 무왕대(武王代; 602~641)에 조성된 반가사유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등 삼국에서 모두 조성된 것으로 보아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걸쳐서 다수 제작되고 예배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에서는 청년 귀족 집단인 화랑 제도와 연관되어 미륵 신앙이 크게 유행함에 따라

 미륵의 화신으로서 반가사유상의 의미가 주목받으면서 많이 조성되었다.

 

현재 반가사유상은 약 38구가 전해지며 금동으로 만든 것은 24구가 전해지고 있다.

그중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은 국보 제78호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국보 제118호의 평양 천리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보물 제331호의 백제 방형 대좌 금동반가사유상 등이 있다.

마애불로는 국보 제84호인 서산 운산면 용현리 마애삼존불의 좌협시불,

국보 제199호인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보물 제1401호 충주 가금면 봉황리 마애여래불상군 등에서 볼 수 있다.

<자료출처: 위키백과와 문화재청>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불 국보 제84호)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국보 제199호)

 

 

(충주 봉황리마애불상군 보물 제1401호)

 

 

(평양시 평천리 출토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국보 제118(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