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청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석조여래좌상

2019. 12. 8. 18:55문화재

예천 청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석조여래좌상

 

예천 청룡사는 예산 용문면 선리520-2에 있는 사찰이다.

청용사는 2기의 보물이 있어 석불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알려진 사찰이지만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찰도 아닌 데다가

네비에 의존하여 길을 찾기에는 어려운 예산의 오지에 속한다.

설상가상으로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마을 입구의 도로 정비공사 때문에 우회하는 바람에

길을 잘못 들어 좁은 마을 안의 소로(小路)에 갇혀 진퇴 난감했다가

간신히 마을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우연 곡절 끝에 찾을 수 있었다.

 

 

 

사찰에 입구에 다다랐지만 사실 이곳이 사찰인지 느낌이 오지 않을 정도로

산간농가로 착각될 정도로 작고 초라한 작은 전각 하나와 요사 1동뿐이었다.

청용사에 대한 사찰 기록이 없어 사찰 내력은 알려진 것이 없고,

다만 위키백과에 의하면 청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시대 문무왕 16(676)에 의상 조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를 세울 때 기둥이 자꾸 무너지고 공사가 어려움에 부딪히자

부석사 서천의 기운이 허하기 때문이라고 여겨

예천 주마산 남쪽에는 한천사, 선리에는 청룡사를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한, 이 절터는 원래 큰 호수였으며 이곳에서 청룡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본 어느 교도가

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했다는 설화도 전해온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절은 없어지고 다만 석불만이 산기슭에 방치된 채

바람에 깎이던 것을 1935년경 신자인 김준팔(金俊八) 씨가 초라한 불당을 세워 불상을 안치하였다.

그 뒤 자비화(慈悲華)라는 노보살이 40년 동안 홀로 절을 지키면서

 불심을 일으킨 후 조계종의 비구니 스님이 일시 주석하다가

현재는 대한불교법화본종 소속의 사찰로 혜선(慧禪) 스님이 주지로 주석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 청용사 재건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한다.

 

 

 

유일한 법당인 대적광전 내부에는 보물 제424호로 지정된

청룡사 석조여래좌상과 보물 제425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 석불 2구가 

 팔각대좌 위에 단정히 앉아 있다. 이 불상들은 모두 통일신라 후기의 것이다.

이 불상 외에 원래 이 절에는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자비화 노보살의 전언에 따르면, 1구의 불상은 다른 절에서 이안해 갔다 하고,

 또 나머지 2구의 불상도 옮겨가려고 하였으나 아래 도랑가까지 옮겼을 때

별안간 뇌성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져

부처님의 뜻이 이곳에 안주코자 함을 알고 도로 안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법당 앞뜰에는 작은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으나,

원위치는 아래 밭 가운데 부재들이 일부 보이는데 아래쪽에 있던 탑을 법당 앞으로 옮겨 놓은 듯하다.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424

통일신라 시대 석불좌상으로 보물 제424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신의 높이는 93.5cm, 대좌의 높이는 67.3cm, 광배은 크기는 150cm이다.

광배와 대좌를 완전히 갖춘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화강암재 불좌상으로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쪽으로 하여 무릎 위에 얹고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육계가 큼직해져서 머리와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타원형의 부드러운 윤곽을 지닌 얼굴에 가늘고 긴 눈과 작은 입 등이 단정하게 표현되어 있고,

턱 밑에는 둥근 홈이 패어 있어서 한결 풍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체는 어깨가 좁고 목과 허리 부분이 짧아 균형이 맞지 않고 다소 위축된 모습이다.

통견으로 입은 법의의 주름은 부드러운 편이나

평행계단식으로 밀집되게 표현되어 도식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가슴을 비스듬히 지나가는 승각기와 군의를 묶은 띠 매듭은

신라 하대에 제작된 불상에서 유행한 형식이다.

 

 

 

 

 

 

 

 

 

 

 

 

 

 

결가부좌한 양다리 사이에 옷자락이 모여 부채꼴 모양의 주름을 형성한 것은

전성기 불좌상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

고려 초기작인 원주 일산동 석불좌상과 원주 봉산동 석불좌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원주 일산동석불)

 

 

(원주 봉산동석불)

광배는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인데 두광과 신광을 2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구획하고

그 바깥 부분에는 화염무늬를, 안에는 보상화무늬와 연꽃무늬를 장식했다.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대좌로

상대에는 내부에 복잡한 꽃무늬가 장식된 연꽃무늬를 2중으로 돌렸으며,

 중대인 8각 간석의 각 면에는 여래형과 보살형을 돋을새김했다.

 하대에는 복판 연꽃무늬를 돌렸고,

그 밑부분의 8각 받침대 각 면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안상(眼象)을 새겼다.

 

 

 


 

 

 

이 상과 유사한 형식을 보여주는 예는 부석사 자인당(慈忍堂) 석불좌상 등 다수가 전한다.

 

 

(부석사석조여래좌상)


 대좌·광배·불의의 착의 표현뿐만 아니라

양식적인 면에서 전성기 통일신라 불상의 긴장감 있고

 절제된 경향을 보이는 사실적 양식에서 벗어나 도식화된 조각 수법을 보여주고,

불신에서도 정신성이 결여되어 어느 정도 세속화된 면을 보여주고 있어 9세기경에 제작된 상으로 추정된다.

 

 

 

 

 

@청룡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425  

고려 시대 비로자나불좌상으로 보물 제4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의 높이는 111cm, 대좌의 높이는 96.7cm이다.

 현재 대좌만 갖추고 있으며 광배를 꽂았던 구멍이 머리 뒤에 남아 있다.

 

 

 

지권인(智拳印)의 석조불좌상으로 같은 법당 안에 항마촉지인을 한

석불좌상(보물 제424)과 나란히 봉안되어 있는데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높게 솟아올라 그 경계가 불분명하며,

사각형에 가까운 넓은 얼굴은 세부 근육묘사가 없어 밋밋하다.

 

 

 

오른쪽 귀가 파손되어 있고 눈··입이 많이 마멸되었으며,

코와 입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균형이 잡히지 않은 얼굴은 특이한 인상을 준다.

목에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짧은 목과 움츠린 어깨,

좁아진 무릎폭등으로 인해 신체가 전체적으로 위축되어 보이고 조형적으로도 안정감을 잃었다.

 

 

 

특히 통견으로 입은 법의의 옷 주름은 완전히 평행계단식으로 반복되면서

긴장감이 없는 신체를 그대로 노출해 세속화된 느낌을 강하게 준다.

오른손을 위쪽으로 하고 왼손을 그 밑에 비스듬히 갖다 붙여

지권인을 취한 두 손은 어색하게 가슴 앞에 붙이고 있다.

 

 

결가부좌한 두 다리도 법의의 두꺼운 주름에 덮여서 그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사각형의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졌는데

상대의 네 면에는 꽃무늬가 안에 장식된 큰 단판 연꽃무늬가 앙련(仰蓮)으로 3엽씩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 각 면에는 안에 삼산형(三山形)의 귀꽃이 장식된 안상이 새겨져 있다.

 

 

 

 

 

하대석은 많이 파손되었으나 중대석과 같은 모양의 귀꽃이 장식된 안상이 옆면에 각각 2구씩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시대에 유행된 비로자나불좌상의 형식을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나

 신체표현이 위축되고 조각 솜씨가 형식화되어

같은 법당 안에 있는 9세기경 제작으로 추정되는 석조불좌상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얼굴 모습이나 사각형 대좌의 형식,

귀꽃의 형태 등에서 고려의 특징이 보이므로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흩어져 있던 석조물을 모아 법당 앞에 세운 것이다.

원형은 알 수 없고 신라말 고려 초기의 요소가 부분적으로 보인다.

탑의 형상을 보면 면석의 문비(門扉)도 반대이며

1층의 옥개석의 크기가 2, 3층의 옥개석과도 비율이 맞지 않아

 혹 5층 석탑의 부재를 모아 조성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상륜부의 보주로 올린 돌도 원래의 석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원래 석탑이 있던 곳이라 추정되는 곳에는 석부재가 흩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