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2019. 11. 22. 19:53문화재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익산 미륵사는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는 금마면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

좌우 능선 사이에 평지에 남향을 향하여 건립된 한국 최대의 사찰로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사적 제150호 익산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에는 현재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서탑)과 복원된 동탑이 있고,

목탑이 있었던 터가 있으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236) 외에

무왕과 왕비의 설화가 깃든 유물과 유적 등이 1966년에 발굴되었다.

 

 

 

미륵사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고려시대 신라계 승려인

일연의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백제 서동 왕자(무왕)

향가 서동요를 신라에 퍼뜨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했으며,

그 뒤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용화산 기슭에 미륵사를 건립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20091월 미륵사지 서탑 1층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 39(639)에 백제 대귀족인

좌평(백제의 최고관직)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가 건립을 발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2 무왕조(武王條)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재위: 600~ 641)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향하고 있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못을 메우고

탑과 법상, 미륵삼회전, 낭무(廊廡)의 건물을 건립하고 미륵사라 이름했다고 한다.

 

 

 

(국보 제11호 익산미륵사지석탑)

 

석탑 역시 이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성덕왕조에 미륵사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불교총보에 실린 고려시대 초 혜거국사의 비문에

 후백제 견훤대인 922년에

 견훤이 미륵사탑의 개탑(開塔)을 계기로 선운사 선불장에 참석하여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 패망 이후에도 여러 차례 탑의 수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문신 소세양(蘇世讓)양곡집(陽谷集)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기록이 나와 있다.

특히 조선후기 영조 때 강후진(康候晋)와유록(臥遊錄)에 탑의 붕괴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에 이미 상당 부분의 훼손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13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다니이 세이치[谷井濟一]에 의해

탑의 촬영과 실측조사가 실시된 후 1915년 시멘트 모르타르로 보수되었다.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에 있는 미륵사지석탑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이며 동시에 가장 큰 규모의 탑이다.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으로 평가받는 기념비적인 석탑으로,

특히 석탑 내부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를 통해 백제시대의 사리봉안 방식이나

탑 건립에 따른 의식, 발원자와 발원 동기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재평가되고 있다.

 

 

 

20157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공주지역에 2(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 2(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3개 지역 8곳이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98년 서탑이 붕괴 위험 등으로 인하여 200110월부터 해체·보수작업이 이루어졌으며

201712월 석재 조립 공정이 완료되었으며, 20186월 복원된 석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1910년대 일본 학자가 조사한 가람배치(伽藍配置)에 의하면,

미륵사지는 탑과 금당(金堂)이 마련된 일탑식(一塔式) 가람이

 자 모양으로 3개가 합쳐져 만들어진 사찰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로

미륵사는 백제사원의 전형적인 가람으로 남북중심축선상에서 남에서부터

중문, , 금당, 강당을 배열하여 중문과 강당사이를 연결한 회랑으로 둘러막은

 소위 1탑식 가람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가람은 동서로 나란히 3개소를 지었고, 강당은 중앙 우측에 하나만 두어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각 가람의 마당에는 탑을 건립하였는데, 중앙에 있는 목탑이 가장 컸으며,

좌우에 있는 탑은 석탑으로 세웠는데 현재 서탑만이 남아있고

동탑은 소실되었으나 최근에 복원되었다.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서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각 탑의 북쪽편에 금당을 1개씩 둔 가람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곧 한 쌍의 금당과 석탑에는 각기 회랑이 둘러져 있어

탑과 금당을 1개의 절로 생각할 때 마치 3개의 절이 모여 있는 듯한

3원식(三院式)의 구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3개의 금당에 모두 지하 공간이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이다.

이 절터에서는 막새기와·토기·불상 등을 비롯하여 1만여 점의 각종 유물이 나왔으며,

특히 '미륵사'라든가 '5년 경진'(國五年庚辰)·'요봉원'(姚奉院

'지원 4'(至元四年)·'천력 3'(天歷三年) 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미륵사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삼탑삼금당이 배치된 사찰이라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미륵삼존불의 출현으로 절을 짓게 된 창건동기나 미륵이 이 세상에 와서

3번의 설법을 하기 위한 3군데의 장소를 마련하고 있는 점,

그리고 미륵이 머무를 장소로 금당에 지하공간을 설치했다는 점 등에서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내려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익산 미륵사지석탑 국보 제11

한국에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무왕의 재위기간 중인 639년에 만들어진 이 석탑은

 백제 석탑의 시원 형식(始原形式)이라고 불리며,

여러 면에서 한국 석탑 전체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해체 당시 높이는 14.2 m,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는 한국 최대의 석탑이다.

이 석탑은 목조 건물을 석재로 구현하여 백제의 목탑 모습을 잘 보여준다.

 

 

2)미륵사지석탑(서탑)은 발굴 당시까지는 7층 또는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는데,

1915년 조선총독부가 붕괴되어 있는 6층 탑의 붕괴를 막기 위해

임시적으로 시멘트로 보수되어 유지되어 왔지만, 19994

국가문화재위원회가 해체 보수 정비를 결정한 후,

200412월 동탑의 복원 과정에서 미륵사지 석탑이

본래 9층이었음을 밝혀주는 부자재가 발견되어 창건 당시는 9층이었음이 확인되었다.

 

 

 

20091월 해체수리 중에 초층 탑신 내부 심주에서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장엄에는 금제사리호, 유리사리병, 청동합 6, 은제관식 2,

 은제과대장식 2, 금동덩이(金銅鋌) 3, 금제 족집게 1,

유리구슬 외 다수 유물이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기해(己亥)년명 탑지를 통해

미륵사를 창건한 인물이 좌평 사택적덕(沙宅績德)의 딸이자 백제 왕후이며,

사찰 건립 시기는 639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리봉영기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후 18년만인 201935일 공사용 가설덧집을 벗고 보수작업이 완료되었다.

수리과정에서 기존 석재를 포함한 부재 1627개를 조립했으며,

준공된 상태에서는 높이 14.5m, 12.5m, 무게 약 1830t이다.

층수는 9층과 6층의 논란 끝에 기존 탑의 자취에 따라 6층으로 준공되었다.

 

 

 

 

서탑은 동북쪽을 중심으로 절반가량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유실되었다.

탑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기단부와 탑신부가 남아있으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고,

탑신은 동북측으로 6층까지 남아있다.

 

 

 

기단부는 이중기단으로 되어 있는데,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진 가구식 기단이다.

하층기단의 지대석은 확인할 수 없고 여러 매로 이루어진 면석과 갑석을 놓았다.

 

 

 

 

 

동면 좌우측 갑석 모서리에는 미륵불로 추정되는 두 손을 모으고 있는 2구의 신장이 배치되었다.

상층기단은 하층기단에 비해 높은데 여러 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고

그 위로 갑석을 덮은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모두 결실된 상태이다.

 

 

 

 

 

 

 

탑신은 현재 6층까지만 남아 있는데 각 부분을 수매의 돌로 짜 맞추어 마치 목조건축의 결구를 연상시킨다.

초층 탑신은 초석을 놓고 민흘림(엔타시스)이 뚜렷한 기둥으로 각 면 3칸을 나누었는데,

목조건축과 같이 그 내부를 벽체처럼 구성하였다.

초석과 초석 사이에는 고막이석과 하인방을 놓았고

기둥과 기둥 상부에는 창방(昌防)과 평방(平枋)을 두었다.

 

 

 

초층 탑신 중앙에는 사방으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를 두었는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기둥으로 심주를 두었다.

2층 이상의 탑신부도 구조에 있어 1층과 비슷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옥개석은 여러 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는데,

처마는 비교적 얇은 편이며 모서리에서 살짝 반전한다.

모서리에는 상하로 원공이 있어 풍경을 매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 아래로는 3단의 층급받침을 두었는데, 5층부터는 4단으로 늘어난다.

옥개석의 상단에는 1층과 2층은 1, 3층부터는 2단의 받침을 두어 상층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3원 가람으로 구성된 미륵사는 중원에 목탑을 동·서원에 각각 석탑을 건립하였는데,

목탑과 동원의 석탑은 완전히 결실된 후 동원 석탑만 복원되었다.

서원의 석탑은 일부 결실부분이 많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최대 규모이며 가장 오래된 탑이다.

특히 탑 전체의 부재를 마치 목재처럼 다듬어 하나하나씩 결구했는데,

이를 통해 목탑의 구조를 완벽히 석탑으로 구현했다.

 

 한편 미륵사지 발굴결과 동탑과 서탑의 남측에서 길이 820, 동서 길이 603‘H’자형 석렬구조가 발견되었다.

이 시설은 적심시설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석재를 올리기 위한 임시구조로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녹로(轆轤)와 유사한 거중기 시설이었음이 밝혀져

 탑 건립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미륵사지의 당간 지주는 모두 2기로 서탑과 동탑에 각각 1 기씩 조성되어 있다.

 

 

 

 

 

 

 

복원된 동원9층석탑은 서탑을 모본으로 하여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탑의 내부 모습

 

 

탑의 상륜부

 

 

 

 

 

 

 

 

 

 

 

미륵사지석탑은 낮고 작은 기단 위에 건립되었으며 각 층의 탑신은 각 면이 3칸으로 되어 있다.

 1층 탑신은 네 귀퉁이에 배흘림이 분명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탱주를 새겼으며

각 면의 중앙에는 내부로 통하는 문이 1개씩 설치되어 있다.

내부 중앙에는 십자로 교차되는 점에 탑을 지탱하는 석조의 찰주가 세워져 있다.

각 층의 옥개는 얇고 넓은 편으로 중앙에서 직선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끝부분에서 약간 위로 올라간 모습이며 옥개석은 3단받침으로 되어 있다

 2층 탑신은 1층에 비해 높이가 현저하게 낮아졌으며

옥개부분도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되어 전반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준다.

 

 

 

2009114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정비하다가

 심주(心柱) 상면(上面)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금제 사리호(金製舍利壺), 금제사리 봉안기(金製奉安記)' 등 사리장엄(舍利莊嚴)을 발견하였다.

 

높이 13cm, 어깨 폭 7.7cm의 작은 병 금제 사리호도 발견하였다.

X선으로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內外函)2중 구조로 이뤄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기법은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준다.

 

또한 금제 사리봉안기도 발견하였다.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cm,

세로 10.5cm 크기의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주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백제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는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연대를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금제봉안기에는 시주자인 왕후가 백제 8대 귀족성 중 하나인

 ''(沙氏 또는 '사택')의 딸로 기록돼 있어

선화공주가 미륵사지를 조성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았다.

 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동탑 앞 당간지주)

(번역)

가만히 생각하건대, 부처님(法王)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의 자질(근기, 根機)에 따라 감응(感應)하시고

 (중생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 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王宮)에서 태어나시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의 사리(舍利)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를 7번 요잡(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광겁, 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今生)에 뛰어난 과보(승보, 勝報)를 받아

만백성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삼보, 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사찰(가람, 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였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무왕)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보력, 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사리봉안기 앞면)

竊以法王出世隨機赴感應物現身如水中月是以託生王宮

示滅雙樹遺形八斛利益三千遂使光曜五色行遶七遍神通變化

不可思議我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種善因於曠劫受勝報於今生

撫育萬民棟梁三寶故能謹捨淨財造立伽藍以己亥> 

(사리봉안기 뒷면)

<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願使世世供養劫劫無盡用此善根仰資

大王陛下年壽與山岳齊固寶曆共地同久上弘正法下化蒼生

又願王后卽身心同水鏡照法界而恒明身若金剛等虛空而不滅七世久遠并蒙福利凡是有心俱成佛道 “ >

 

 

 

 

 

 

 

 

미륵사지의 연못

 

 

미륵사지 전시관 입구를 지키는 미륵석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