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동본리3층석탑(보물제426호)과 석조여래입상(보물제427호)

2019. 11. 25. 20:51문화재

예천 동본리3층석탑(보물제426)과 석조여래입상(보물제427)

 

예천 동본리 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은 예천읍 남쪽으로 흐르는 한천(漢川)을 끼고

 뒷측으로 흑응산이 위치하고 있는 동본리 주택지 한쪽 켠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탑과 불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워보아 예적에 이곳에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발굴작업이 되지 않아 알 수 없다.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서 한 곳에 밀려나 있는 형상이다.

 

예천동본리석조여래입상(禮泉東本里石造如來立像)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 보물 제427

크기 : 높이 3.46m, 어깨 너비 1.14m, 머리 높이 95

소재지: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474-4 

 

 

 

보물 제427. 높이 3.46m, 어깨 너비 1.14m, 머리 높이 95.

이 석불입상은 단판복련(單瓣覆蓮)이 새겨진 원형 연화좌 위에 직립하고 있다.

하나의 돌로 조각된 독립상으로 평판적인 신체,

큰 머리 등 전체적으로 둔중하며 괴량감에 넘친 모습이다. 현재는 목 주위에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크고 넓적한 육계(肉髻)가 있는 네모반듯하고 풍만한 얼굴에 반쯤 뜬 눈,

넓적한 코, 지그시 웃는 입 등의 모습은 자비로운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8세기의 이상화된 얼굴 모습보다는 현저하게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큰 얼굴에 비하여 상체는 작은 편으로 비례가 썩 좋지는 않다.

굵고 짧은 목과 좁은 어깨, 짧은 팔 등이

평판적인 가슴과 함께 움츠린 듯하여 다소 위축감이 느껴진다.

 

 

 

오른팔은 왼팔과 마찬가지로 짧고 두툼하며 옆으로 내려 몸에 붙인 채 옷자락을 살짝 잡고 있다.

그리고 왼손은 기형적으로 보일 만큼 가슴에 붙여 조각되어 있는데,

엄지와 새끼 손가락만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안으로 굽힌 채

 손바닥을 내보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변형된 여원인으로 짐작된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입었는데 신체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옷주름은 어깨에서 거의 평행을 유지하며 복부까지 평행으로 내려오다가

 허벅지 부분에서 Y자 모양으로 갈라져 동심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옷주름 표현은 719년에 조성된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의 형식에서 변형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국보 제82호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이른바 우전왕상식 불상 양식(憂塡王像式佛像樣式 : 불상의 옷주름 표현 양식으로 목에 反轉이 있는

통견의 옷주름이 대퇴부에서 Y자형으로 갈라져

양다리 표면에서 반원형의 주름을 대칭적으로 표현하는 불상 양식)

오랜 답습을 통하여 도식화된 모습으로 표현된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전왕상식의 양식은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사암불입상(砂岩佛立像)

또는 선산(지금의 구미) 출토의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2) 등을 대표 작품으로 한다.

 8세기에 대유행을 보게 된다.

 

 

 

  가슴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승각기(僧脚岐), 군의(裙衣)3단 주름,

반듯이 자른 듯한 옷깃 표현 등도 역시 변화 없이 도식적인 평행선을 이룬다.

 

 

 




 

 

 

이러한 경향은 불의의 아래 군의 하단에 보이는 규칙적인 종선문(縱線文) 등에서도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뒷면에는 얕은 음각으로 몇 가닥의 옷주름을 좌우대칭으로 선조(線彫)하였을 뿐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니는 이 불상과 비교하여 볼 수 있는 독립된 석불입상으로서는

 거창양평리석조여래입상(居昌陽平里石造如來立像, 보물 제377)을 들 수 있겠지만,

동본리불상이 훨씬 더 형식화되어 시대의 하강을 직감하게 된다.

, 가슴을 깊게 드러내면서 내려가는 옷주름이 양다리에서

긴 타원형의 의문을 형성하는 모습은 같은 계열의 양식으로 볼 수 있다.

 

(보물 제377호 거창 양평리석조여래입상)  

하지만 둔중하게 정지된 모습, 양감 없이 괴량감이 강조되어 있는 신체,

그러면서도 아직 경직화되지는 않은 얼굴 모습, 무겁게 흐르는 옷주름 선 등은

이 불상이 이상화의 길을 추구하던 8세기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수법을 답습하면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즉 형식화된 통일신라 말기의 조각 수법을 드러내고 있다.

 

 

예천동본리3층석탑(醴泉東本里三層石塔)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보물 제426

크기: 높이 3.12m

소재지: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474-4

 

 

 

 

예천 동본리 삼층석탑(醴泉 東本里 三層石塔)은 높이 3.12m

예천읍 남쪽을 흐르는 한천(漢川)의 북쪽 둑 안쪽에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으로 추증되며,

1965716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26호로 지정되었다.

 

 

 

기단(基壇)은 단층으로 보이며 중석(中石) 밑에는 1단의 굄이 표현되었다.

중석은 4매석으로 짰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있으며

 면석(面石)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 1구씩이 조각되었다.

 

 

 

 

 

 

 

 

 

갑석(甲石)1매석인데, 밑에는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고

위에는 완만한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는 2단의 굄이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석씩이고,

옥신석에는 각각 우주형(隅柱形)이 모각(模刻)되었다.

옥개석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받침 수는 초층과 2층은 5단이고,

3층은 4단이며 추녀 위의 반전(反轉)은 크지 않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

복발(覆鉢 : 탑의 노반 위에 놓은, 엎은 주발 모양의 장식)을 함께 붙여 후에 보수하였다.

이 석탑은 규모는 작으나 각 부 비례가 아름다운 탑이며,

신라석탑으로서는 드문 단층기단의 형식을 취하였음은

 문경·상주 등지에서 유행하던 단층기단형식의 여파인 듯하다.  

 

 

 

 

 

 

현재는 윗면에 경사진 돌이 있고, 기단의 가운데돌을 그 위로 얹고 있다.

가운데돌은 4장의 널돌로 짰는데 각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기고,

그 사이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해 놓았다.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부처의 네 신을 뜻한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짜고,

 각 층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2층이 5, 3층이 4단인데

1층의 몸돌이 2 ·3층보다 두드러지게 큰 점이 독특하다.

 

 

지붕돌 추녀의 밑은 반듯한데 마무리부분에서 경쾌하게 치켜올려져 있으며,

빗물을 받는 낙수면의 경사도 완만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한 돌로 되어 남아있지만, 훗날에 보충한 듯 하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몸돌의 줄어드는 비율과

 지붕돌의 크기 등에 짜임새가 있는 아름다운 탑이다.

 

 

 

기단의 가운데돌에 새긴 사천왕상의 조각수법도 형식화되지 않은 멋을 보여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줄어들고 있는 점이나

각 부분의 아래에 새긴 괴임돌이 간략해진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건립된 탑으로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