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전설을 지닌 보물 제46호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2019. 10. 29. 23:29문화재

묘한 전설을 지닌 보물 제46호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益山古都里石造如來立像)은 참 묘한 불상이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에 있는

고려 시대에 조성된 2구의 불상으로 보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쪽 석불)


높이는 424. 쓰러져 방치된 것을 조선 말 익산 군수로 부임해 온

최종석(崔鍾奭)이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사다리꼴 돌기둥에 옷자락 무늬뿐 아니라 대좌(臺座)나 신체 부분 등을 겨우 나타낸 불상이다.

 

 

(옥룡천)


 

@두 불상은 옥룡천이라는 개천을 사이에 두고 약 200m 간격으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이 불상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음력 12월 해일(亥日) 자시(子時)

두 상이 만나 일 년 동안의 회포를 풀고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녀 상이라는 풍수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불상이다.

 

(서쪽 석불) 

@두 불상을 모습을 보면, 일직선에 가까운 사다리꼴 석주 같은 자세라든지,

극히 단순화된 비사실적 표현 수법, 특히 도포 같은 옷을 걸치고

봉분처럼 쌓아 올린 흙더미 위에 서 있는 모습은

분묘의 문관석인상(文官石人像)과 흡사하다.

그래서 불상이라기보다는 마을을 수호하는 무속적 성격을 띤 석상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동쪽 석불) 

@사견(私見)이지만 고도리석불입상에 관련된 전설은

통상적으로 경전 등 민간설화에서 전해 내려오는

석불에 관련된 부처님의 가피에 대한 전설과 다른 것은

아마도 신라 진평왕 때 백제 무왕이 지었다는 향가 <서동요>의 이야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도리석불입상이 있는 인접한 곳에

백제의 왕국사지와 미륵사지를 접하고 있기 때문인데,

고려 시대 신라계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의 설화에 따르면,

미모가 매우 뛰어나 백제의 서동(후에 무왕)이 사모하여,

두 사람이 남몰래 밤에 만난다는 것을 주제로 한 것이 서동요이다.

이 노래가 금성(지금의 경주)에 퍼뜨려지자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되어 가던 중 서동에게 구출되어 결혼하고 백제에 가서 왕비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미륵사의 창건을 무왕에게 부탁하였다고 한다.

 

 

 

 

 

 

 

 

 

 

 

 

 

 

 

 

 

 

 

 

 

 

 

 

 

 

(서쪽 석불)

 

 

(동쪽 석탑과 서쪽 석탑의 안내서도 동일하다)

두 불상은 크기와 조각수법이 동일하며 차이점은 동쪽 석불이 조금 마모된 것만 차이가 있다.

이하는 서쪽 석불의 사진이다.

 

2구의 불상은 사다리꼴 모양의 기둥과 같은 몸체에서

 대좌에 이르기까지 거의 비슷한 조각 수법과 형태를 보여준다.

머리에는 파주 광탄면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과 같은 사각형의 높은 관()을 쓰고,

그 위에는 한 겹의 사각형 보개(寶蓋)가 있다.

 

 

 

얼굴의 기본 형태는 사각형으로 볼은 약간 둥글며,

웃음을 머금은 가는 눈과 작고 짧은 코와 입이 표현되어 있다.

목은 따로 표현하지 않아 턱에 의해 얼굴과 어깨가 구분된다.

 몸체는 굴곡이 전혀 없으며 팔은 따로 표현하지 않고 배에 붙인 두 손만 음각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의 평면에 가까운 안면에 가는 눈과 눈썹 그리고 짧은 코와 작은 입을 음각선으로 나타냈다.

 괴량감은 없지만 차분하고 웃음기 머금은 인상적인 상호(相好)임을 느낄 수 있다.

극히 단순하고 형식적인 형태의 귀가 길게 묘사되어 있다.

몸통은 사다리꼴의 사면체 석주(石柱)에 불과하다.

 

 

옷은 통견(通肩)으로 양어깨에서부터 평행선을 이루며 내려와

발목에서 좌우로 갈라져 양 측면까지 이어졌다.

옷 주름이 신체보다 약간 도드라지게 되어 있으나 무늬는 전혀 없다.

 

 

 

앞으로 모아 배에 붙인 손과 팔 일부가 음각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를 밟고 선 발도 형식적인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대좌는 신체보다 약간 커서 앞으로 튀어나와 있으나, 역시 무늬가 없다.

 

 

 

 

 

 

 

 

 

 

이 두 불상은 조각 수법이 지극히 단순하고 소극적이어서 세부적인 고찰은 어렵지만,

높은 관을 쓴 점이라든지 그 위에 보개를 올려놓은 점 등은 이웃하고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조성 시기는 훨씬 뒤인 고려 시대 말엽으로 짐작된다.

  (본방 대조사와 관촉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