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

2019. 10. 23. 21:25문화재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

고달사지(高達寺址)는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惠穆山: 현재명 우두산)

동쪽 정사면 넓은 대지에 위치하며,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은사본말사지(奉恩寺本末寺誌)에 의하면

고달사(高達寺)는 신라 경덕왕 23(764)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창건주 또한 미상이다.

 

 

 

975년에 세워진 원종대사(元宗大師) 비문에 의하면

당시에는 고달원(高達院) 또는 고달선원(高達禪院)으로 불렸다고 한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달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조선 초기까지 번창했으나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국보 제4호로 지정된 고달사지 승탑은 고달사의 뒤쪽 언덕에 조성되어 있다.

승탑은 부도(浮屠), 부두(浮頭), 포도(蒲圖), 불도(佛圖)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데,

원래는 불타(佛陀)와 같이 붓다(Buddha)를 번역한 것이라 하고

또는 솔도파(率屠婆, stupa), 즉 탑파(塔婆)의 전음(轉音)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묘탑(廟塔), 즉 부도라는 용어로

 승려의 사리탑을 가리키는 실례는 신라 하대부터 보인다.

 872(경문왕 12)에 건립된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의 비문 중에

 기석부도지지(起石浮屠之地)”라는 구절은 승려의 묘탑이 곧 부도라고 일컬어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묘탑, 즉 부도를 세우는 것은 불교식 장례법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불교가 전래된 때부터 묘탑의 건립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4세기 후반이지만

연대가 그때까지 올라가는 묘탑은 문헌상으로도 볼 수 없다.

 다만 627649년경에 원광법사(圓光法師)의 부도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이 시기를 부도 건립의 시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실물은 전하지 않고 844(문성왕 6)에 조성된

전흥법사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 국보 제104)이 가장 오래된 부도로 추정되고 있다.


 

(염거화상탑, 국보 제104호, 중앙박물관소장)

본래 부도의 건립은 법제문도(法弟門徒)들이 선사(先師돌아가신 스승)를 섬기는

극진한 마음에서 스승이 입적(入寂)한 뒤 온 정성을 다하여 세우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에 이르러 당나라에서 선종(禪宗)이 들어온 이후 부도의 건립이 크게 유행하였다.

 

 

 

승탑(僧塔)은 고승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안치한 석조물이다.

우리나라의 탑이 주로 사찰 안에 있지만, 승탑은 사찰 밖에 있다.

이 승탑의 건립은 전술한 바와 같이 신라 말에 전래한 선종과 관련이 있다.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1조인 도의(道義, ?~?)784(선덕왕 5)

당에 가서 마조의 제자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의 선법(禪法)을 전해 받았다.

 당에 머물기를 37, 821(헌덕왕 13)에 귀국하여 한반도에 처음으로 조사선을 전했으나

당시 불교계는 유식과 화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수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면서 그의 선법을 염거(廉居, ?~844)에게 전했다.

 선종에서는 깨달으면 곧 부처이므로 깨달은 선사의 죽음은 석가모니불의 죽음과 다를 바 없다고 사유했다.

그래서 불탑이 있듯이 선사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승탑이 등장하게 된다.

 

 

 

 승탑을 부도(浮屠)라고도 한다.

그리고 승탑의 명칭은 국왕이 탑호(塔號)를 내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선사의 시호(諡號)에 따른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 양양 진전사지에 있는 승탑은 도의선사탑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국보나 보물급으로 지정된 승탑은

대부분 그 탑의 주인인 선사의 시호로 명명되어 있어 누구의 승탑인지 알 수 있지만,

 고달사의 승탑은 탑호(塔號)도 없고, 또 누구의 승탑인지 기록된 바가 없다.

그래서 다만 고달사 위쪽에 초암을 짓고 수행했던 원감국사의 탑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원감국사 현욱(圓鑑國師玄昱: 787~서기868)대선사는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림산선문 개조로, 신라 제38대 원성왕 355일에 출생하였으며

속성은 강릉김씨, 휘는 현욱(玄昱) 대사이며, 시호는 원감국사(圓鑑國師)이다.

부는 병부시랑(兵部侍郎)을 지낸 염균(廉均)이다. 23세에 스님이 되어

 신라 제40대 애장왕 9년에 비구계를 받고 신라 제41대 헌덕왕 16(824)에 입당 구법 하여

 조계산 육조 혜능대사의 문하 마조대사의 높은 법손인 장경회휘 선사에게서

 정법안장 심인을 받고 본국 신라의 김의종 왕자를 따라

43대 희강왕 2(837) 912일에 귀국하여 실상사에 안거하다가

 신라 제46대 문성왕 2(840) 여주 혜목산 고달사 위에 초암을 짓고 수선하였다.

47대 헌안왕의 사조사례의 숭앙을 받았으며

경문왕의 청으로 여주 혜목산 고달사에 상주 하시다가

경문왕 81115일 여명에 시자에게 명하여 무상종을 치개하고

 세수 82세 법랍 60세를 일기로 입적하시었다. 원감은 그의 사후 경문왕이 내린 시호이다.

 

 

 

 

 

 

 

 


@국보 제4호로 지정된 고달사지 승탑의 높이는 3.4m

기단부, 탑신부, 옥개석 등을 모두 갖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이나

 상륜부는 완전하지 못하다.

 

 

 

기단은 수매의 판석으로 짜인 8각 지대석 위에 각기 1석씩으로 조성된 괌대를 놓고

그 위에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얹어 형성하였다.

굄대는 지대석의 8각에 각을 맞추어 놓았는데,

윗면에는 2단의 굄 단을 마련하여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 또한 8각의 모를 맞추었으며 측면에는 각 면 2구씩의 가늘고 긴 안상을 오목새김 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지선(地線) 중앙으로부터 올라온

귀 꽃 모양 1좌씩을 조식하여 장식적인 안상(眼象)을 꾸미고 있다.

 

 

 

 

 

 

측면 상단에는 갑석형을 돌리고 윗면에 16판의 겹잎 복련문(覆蓮文)을 조각하였는데,

각 변과 여덟 모서리에 1판씩 배치하였다.

 

 

 

그리고 상단부에는 얕은 1단의 굄으로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용과 운문(雲文)을 조각하였는데,

귀두(龜頭)는 원각으로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으나 형식화된 경향이 보인다.

용두(龍頭) 또한 웅장하고 수법이 대담하다.

 

 

 

 

 

 

 

 

 

 

 

 

이들 귀부(龜趺)와 운룡의 조각은 거의 원형의 표면에 돌려져 있는데,

이 중대석의 상·하단은 높직한 갑석형을 8각으로 돌려서 상·하의 부재에 맞도록 하였다.

 8각 상대석은 하면에 깊숙이 받침을 각출하였는데,

대개의 경우 받침단은 밖으로 나와 중대 상단보다 더 넓어지고 있는 데 비하여,

여기에서는 반대로 훨씬 좁아지고 있다.

 

 

측면에는 여덟 판의 큼직한 겹잎 앙련을 조각하였다.

상단에는 갑석형을 돌리고 그 위에 3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에는 각 면에 우주를 모각하고 문비형(門扉形)과 사천왕상·창살 등을 조각하였는데,

특히 문비와 자물통의 표현이 형식에 흐르고 있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꺼운 편으로 아랫면에는 깊숙이 낮고

널찍한 받침을 조각하여 탑신석 상단부와 맞게 하였다.

 낙수면은 석탑 옥개형으로 기왓골 등의 표현이 없으며 낙수면의 합각선이 뚜렷하고,

 여덟 귀퉁이 전각에는 큼직한 귀 꽃 모양이 조식 되어 있다.

 

 

 

 

 

  

 

 

이 귀 꽃 모양은 다른 승탑 옥개석의 귀 꽃 모양보다 높은 편이나

표면에 나타난 조각은 가냘파 보인다.

옥개석 정상 면에는 복련을 돌리고 상륜부를 받치도록 하였는데,

현재는 보개석만이 남아 있다.

 

 

 

 

 

 

보개는 옥개석을 줄여 놓은 것같이 그 조형이 같다.

그 위에 원공(圓孔)이 관통되어 있는데,

이것은 찰주(擦柱: 탑의 중심기둥)에 꽂기 위한 것으로 화려하였을 상륜을 연상시킨다.

 

 

 

 

 

 

 

 

 

 

 

 

이 승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정제된 조형과 세련된 조각 수법에서

통일신라 말기의 승탑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가 안정되고 조각 장식이 대담한 걸작으로

 고달사지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 혜진탑과 형식이나 양식 면에서 유사하여

같은 시기이거나 좀 더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원종대사 혜진탑은 탑비의 내용에 의해 975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달사지부도는 일설에 868(경문왕 8) 입적한 고승 원감 대사의 묘탑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