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30. 21:48ㆍ국내 명산과 사찰
영암기행(6/6) 영암 역사공원 상대포(上臺浦)
도갑사 탐방을 마치고 귀경길에 영암의 역사공원이라고 소개된 안내판을 보니.
왕인박사유적지와 상대포가 영암에서 유명한 명소인 모양이다.
귀경길이라 왕인박사유적지는 생략하고 도갑사에서 승용차로 10분 정도 거리인 상대포만 들려보기로 했다.
상대포는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상대 마을 서쪽에 있었다.
현재 인근에 영암 도기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상대포에는 누각과 작은 연못이 복원되어 있다.
상대포는 인근 들판의 해발 고도가 2m 내외로,
밀물이 되면 깊이 2m 정도의 바다가 되어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가항 수로의 끝단에 해당한다.
설화에 의하면 상대포에서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전거가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상대포 운영 시기는 상대포 인근에 있는 구린 도기 가마터,
정원명 석비, 도선 관련 기록이나 설화 등으로 보아 통일 신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대정
왕인박사는 4세기 후반, 왜국에 건너가서 활동한 백제의 학자이다. 출생과 사망은 미상이다.
백제는 왜국과 오랜 교섭을 가지는 동안 많은 인물이 선진문물을 전해주었는데
왕인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우리 기록에는 없고 일본 측 기록에만 실려 있다.
근초고왕 대에 왜국으로 건너간 아직기가 경서에 능통하다는 것이 알려져
왜왕의 부름을 받고 세자 우치노와 키이로츠코의 스승이 되었을 때
왜왕이 아직기에게 "백제에 너보다 나은 박사가 있는가?" 하고 묻자
"왕인이라는 사람이 가장 우수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왜국의 청으로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건너가게 되었고
이때 제철 기술자·직조공·양조기술자 등도 함께 갔다.
왕인은 우치노와의 스승이 된 뒤 그 신하들에게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의 후손들 또한 일본의 가와치 지방에 살면서 문서기록을 맡은 사가 되었다고 한다.
[명칭 유래]
상대포는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상대 마을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상대포라는 지명은 기록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형성 및 변천]
통일 신라의 국제 포구였던 상대포는
고려나 조선에 들어와서는 포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통일 신라 당시 상대포는 인근 남동쪽 구릉에 구림도기 가마터가 있어 산업 단지의 포구라 할 수 있다.
1987년 12월, 2기의 가마터가 이화 여자 대학교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발굴 결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도기에 유약을 발라 만든 시유 도기를 만든 가마터로 밝혀졌다.
구림에서 생산된 도기들이 장보고 유적인 완도 청해진 장도 유적에서 발굴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이를 고려하면 구림 도기 가마는 통일 신라 시대인 7~9세기 무렵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편 통일 신라 때 상대포 인근에서는 관 주도였던 월출산 제사와는 별도로
민간에서도 안녕을 기원하는 의례도 있었다.
구림 마을에서는 매향 신앙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정원 2년명(貞元二年銘)[786년] 석비가 그것이다.
이 석비는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구림 도기 가마터의 운영 시기와 겹치고 있고 상대포와 관련된다.
매향 신앙은 향나무를 보통 육수(陸水)와 해수(海水)가 만나는 갯벌에 매장하여
불력(佛力)의 보호를 끌어내는 민간의 미륵 하생 신앙으로,
해양 문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매향 사실을 기념하고 매향한 지점을 잊지 않기 위해서
바위 또는 비에 새기는데 이를 매향 바위 또는 매향비라 하며,
영암 정원 명 석비 역시 매향비에 해당한다.
매향비로 대표적인 것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는
당진 안국사지 매향암각 (唐津 安國寺地 埋香岩刻)을 꼽을 수 있다.
또 상대포의 운영 시기는 구림 마을 출신 인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먼저 구림 출신 도선[827~898]은 신라의 멸망과 왕건의 탄생을 예언하고,
17세의 왕건에게 찾아가 덕과 지략을 가르쳐,
한국식 비보 풍수설의 개창조로 일컬어지고 있다.
역시 구림 출신인 최지몽(崔知夢)[907~987] 은
924년 왕건의 서남해안 활동 시 핵심 참모로 왕건을 따라 종군(從軍)한 후 중앙 요직에 진출한 인물이다.
이런 상대포와 관련된 역사와 아울러 고대 상대포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는 영암의 월출산에 올라 영암 서쪽 서호(西湖) 바다를
“해상(海商) 백 명이 옛날에 바다를 넘어갈 때, 산 위의 신광(神光)을 아득히 바라보았다.”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에서 ‘해상 백 명’은 다음 조선 후기에 이중환(李重煥)이 쓴 『택리지(擇里志)』의 다음 기록과 일맥상통한다.
“월출산 남쪽은 월남촌이고 서쪽은 구림촌이다.
[구림촌은] 신라 때 이름난 마을로서 지역이 서해와 남해가 맞닿는 곳에 있어,
신라에서 당나라로 조공 갈 때 모두 이 고을 바닷가에서 배로 떠났다.
바닷길을 하루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흑산도에서 또 하루 가면 홍의도(紅衣島)[홍도]에 이른다.
다시 하루를 가면 가가도(可佳島)에 이르며,
간방(艮方) 바람[동북풍]을 만나면
3일이면 중국 태주(台州) 영파부(寧波府)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하게 되는데,
실제로 순풍을 만나기만 하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도 있다.
또 남송이 고려와 통행할 때 정해현 바닷가에서 배를 출발시켜
7일 만에 고려 경계에 이르고 뭍에 올랐다는 곳이 바로 이 지역[구림촌]이다.
당나라 때 신라 사람이 바다를 건너서 당나라에 들어간 것이
지금 통진(通津) 건널목에 배가 잇닿아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 당시에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는 상선을 편승하고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의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구림 마을은 신라 때부터 명촌이었고,
중국에 왕래하는 포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상대포가 그 포구였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신라 말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 등이 당나라에 유학할 때 상선에 편승하여 떠났다는 것으로 보아,
상대포는 사신선과 상선이 발착(發着)하는 통일 신라의 중심 포구였음을 알 수 있다.
상대포는 일제 말기 들어 영암군 학산면 출신 사업가 현준호(玄俊鎬)[1889~1950] 가
1939~1949년까지 간척 공사를 하여 학파 농장을 만들면서
바다 물길이 차단되어 포구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상대포는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상대 마을의 군서천과 바다 갯고랑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자료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취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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