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5. 17:01ㆍ국내 명산과 사찰
가지산선문의 본산 장흥 보림사 (제1부)
장흥 보림사(寶林寺)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사찰이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가지산파(迦智山派)는
헌덕왕 때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體澄)이 도의(道義)를 종조(宗祖)로 삼고
가지산 보림사에서 일으킨 선풍을 말한다. 가지산선문(迦智山禪門)이라고도 한다.
당(唐)에서 마조 도일의 제자인 서당 지장(西堂智藏)의 남종선을 전수 받은 도의는
821년(헌덕왕 13) 귀국하여 처음으로 남종선을 신라에 전했다.
그러나 교종이 풍미하던 당시 불교계에 용납되지 못하여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했다.
도의는 그의 심인(心印)을 염거(廉居)에게 전했으며,
염거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무르면서 다시 체징(體澄)에게 전했다.
체징은 857년(헌안왕 3) 왕의 부탁으로 전라남도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 주석(駐錫)하고 있다가,
861년(경문왕 1)에 도량을 확장하고 도의의 남종선 선풍을 다시 일으켜 가지산파를 이룩했다.
가지산파에서는 도의를 제1조(第一祖), 염거를 제2조, 체징을 제3조로 하며,
영혜(英惠)·청환(淸奐)·의거(義車) 등이 뒤를 이었다.
고려말까지 산문을 유지하며 많은 승려를 배출했는데 일연도 그중의 하나이다.
고려말에 이 산문의 태고화상 보우(太古和尙普愚)가 1356년(공민왕 5)에 구산 통합을 시도했다.
@가지산이란 산 이름은 신라 말의 고승 원표(元表)대사에서 비롯된다.
신라말 원표대사(元表大師)가 인도에 있을 때
신비한 기운이 삼한 밖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비쳐와
그 기운만을 바라보고 산 넘고 바다를 건너 오묘한 곳을 찾아내 자리를 잡으니
산세가 인도의 가지산, 중국의 가지산과 같아서 가지산이라 했다고 한다.
가지산의 옛 이름은 천화산(穿火山)·실혜산(實惠山)·석민산(石眠山) 등으로도 불렸다.
보림사의 안내서에는 창건주를 원표대사라고 밝히고 있다.
원표대사는 출생과 사망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다.
당나라 천보연간(天寶年間: 당의 연호 742~756년간 사용)에 당나라를 거쳐 인도로 가서
불교의 성지를 두루 순례하다가 심왕보살(心王菩薩)을 만나
천관보살(天官菩薩)이 있는 지제산(支提山)의 영부(靈府)를 찾아갈 것을 지시받았다.
이에 80권 『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곽동(霍童)을 찾아가서 천관보살에게 예배하고 지제산의 석실에 머물렀다.
이 경은 회창연간(會昌年間) 의 훼불(毁佛) 때 화려한 목함(木函) 속에 넣어서 석실 깊은 곳에 간직하였으며,
그 뒤 혜평(慧評)이 그 이야기를 듣고 감로도위원(甘露都尉院)에 맞아들여서 목함을 열어보니
지묵이 방금 쓴 것과 같았다고 한다.
보림사의 역사적 변천을 보면
이 절은 가지산파의 법맥을 이어받은 가지산파의 3대 조인 체징(體澄)에 의하여 비롯된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은 이 산에 들어와 터를 잡고,
860년에 대찰을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다.
보림사는 본래 원표(元表) 대덕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이었지만,
체징이 입적하면서 헌강왕으로부터 ‘보림사’라는 사호를 받은 것에서 비롯된다.
보림사는 본래 중국 선종의 개창자인 육조 혜능이 주석하던 절의 이름과 같으므로
신라 선종의 권위를 지닌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
그러나 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하였던 이 절에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단지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四天王), 외호문(外護門)만 남았다.
불타버린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 중층팔작(重層八作)지붕의 큰 건물이었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2층까지 통해서 한 방으로 만들고,
중앙 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과 양협시불을 안치하였는데,
구조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수법이다.
이후 주민들은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과 천왕문·영각(影閣)·요사채 등이 있다.
사천왕문 안에 봉안된 사천왕상은 1780년(정조 4)에 조성된 국내 목각상의 대표적인 것으로,
최근 중수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였으나,
복장 속의 비장품은 도굴꾼들에 의하여 망가진 상태로 방치되었다.
현재 사천왕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4호인 보림사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제117호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155호인 보림사동부도(寶林寺東浮屠),
보물 제156호인 보림사서부도(寶林寺西浮屠),
보물 제157호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
보물 제158호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 등이 있다.
삼층석탑은 남쪽 석탑이 높이 5.4m, 북쪽 석탑이 5.9m이며,
석등은 높이 3m로서 이들은 모두 870년(경문왕 10)에 건립되었다.
비로자나불좌상은 858년(헌안왕 2)에 김언경(金彦卿)이 자신의 봉급을 모아 조성한 불상이다.
@외호문
보림사는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세계 3대 보림사로 알려져 있으며,
통일신라 당시 쌍용사, 태안사와 함께 대찰로 알려져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사라지고 공비들이 철수하는 과정에 불을 질러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유일하게 외호문과 천왕문만이 화마를 피한 전각이다.
사천문에 본 외호문
장흥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長興寶林寺木造四天王像) 보물 제1254호
사천왕상은 사천문(천왕문) 안에 조성되어 있으며,
사천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림사 목조사천왕상은 보물 제1254호로 지정되어 있고,
높이 3.2m, 너비 2.9m로 현존하는 조선 시대 사천왕상 중 가장 오래된 사천왕상일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에 제작된 유일한 사천왕상이기도 하다.
1539년(중종 34)에 처음으로 조상하였고, 그 후 1668년(현종 9)과 1777년(정조 1)에 중수하였다.
16세기 초에 제작된 이 사천왕상은 천왕문에 안치된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세밀한 제작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전체적인 균형감과 함께 활달한 율동감은 이 작품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후로 만들어질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전형(典型)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칼을 들고 있는 사천왕상이 일반적으로 긴 칼을 오른손으로 들고 있는 것과
달리 양손에 짧은 칼을 잡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동방 지국천왕)
얼굴은 굴곡이 없이 원통형으로 처리되었으며 눈동자에는 마노(瑪瑙)와 같은 광물질을 박아 처리하였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으나 무서움을 주지 않는 온화함을 느끼게 한다.
화려한 보관의 높이가 얼굴의 길이보다 더 길게 강조되어 있다.
4위(位) 천왕의 팔꿈치 대의가 모두 심하게 말려 위쪽으로 올라갔으며
이것을 묘사한 기법은 천의 자락의 현란한 표현 기법과 더불어 이 작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
팔뚝이 신체 비례보다 강조되는 반면 가슴과 배 부분이 빈약하게 표현되었다.
보림사 사천왕 4위의 신체 구조는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만 변화가 있을 뿐 거의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목조사천왕상들이 공통으로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팔뚝에서처럼 신체의 강건함을 강조하려는 듯 다리의 자세에서도 두툼한 질량감을 드러내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
조선 시대에 조성된 사천왕상은 그 형상이나 지물이 대개 동일한 데 비하여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일반 사천왕상과는 비교하면 발밑의 악귀와 지물이 다소 색다르다.
동방 지국천왕은 칼을 들고 있고 악귀를 밝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모를 쓴 악귀가 앞에 세워져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고 유일하게 악귀를 밝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은 지물로 창과 탑을 들었는데 그 탑의 형상이 묘하고 두 발이 허공에 떠 있다.
남방 증장천왕은 칼을 들었는데 관모를 쓴 악귀를 앞에 세워놓았다.
(남방 증장천왕)
전라남도 영광 불갑사의 사천왕상과 거의 흡사한 점으로 보아
불갑사 사천왕상의 모본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95년 2월에는 사천왕상의 해체 조사 작업 중
무릎과 발 등에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국보급 희귀본을 포함한 전적류 250여 권이 발견되었다.
(본방 불갑사 참조)
(장흥보림사 남북삼층석탑 및 석등(長興寶林寺南·北三層石塔─石燈), 국보 제44호)
현재 보림사 앞뜰의 원위치에 남북으로 대립하여 구조와 규모가 같은 2기의 삼층석탑이 서 있고
그사이에 석등이 1기 남아 있다. 보림사는 헌안왕의 명으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체징(體澄 ; 804∼880)이
헌안왕 4년(860)에 창건한 사찰이다. 보조선사는 도의(道義)와 염거화상(廉居和尙)의 법맥을 이어
보림사에서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하였다.
1934년 가을 해체 복원할 때 초층탑신 상면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합(舍利盒)·자기류(磁器類)·목판(木版)·비단·사리·구슬 등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탑지(塔誌)가 발견되어, 탑의 조성 연대 및 중건 사실이 밝혀졌다.
탑지에 의하면, 이 탑은 870년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원탑(願塔)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891년(진성여왕5)에 사리 7매가 봉안되었고
조선 시대에 이르러 1478·1535·1684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962년 국보 제44호로 지정되었다.
석탑 2기 중 남 탑의 높이는 5.4m, 북탑의 높이는 5.9m이며, 석등의 높이 3.12m이다.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相輪)을 얹은 신라의 전형적 양식의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러 장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된 지대석(地臺石)으로 놓였는데,
기단의 구성은 상·하층의 통식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의 갑석(甲石)이 얇고 부연(副椽: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얕아서 평판적인 느낌을 준다.
하층 기단은 면석(面石)과 갑석을 같은 돌로써 조성하였는데
하단에는 높직한 굽을 돌린 위에 가느다란 1단의 받침을 조출하였으며,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 모서리 기둥)와 탱주(撑柱: 받침 기둥)를 모각(模刻)하였다.
하층 기단의 갑상면에는 아무런 받침대도 없이 평평한 곳에 상층기단을 놓고 있는데,
상층기단 면석 각 면의 양쪽 우주는 정연하나 탱주는 하나로 간략화되는 수법을 보이고 있다.
(남쪽 탑과 배례석)
상층기단 갑석 상면은 약간 경사를 보이며,
그 중앙에 원호(圓弧)와 각형(角形)의 2단 받침대를 마련하여
탑신부(塔身部)를 받고 있는데 이 2단의 받침대가
신라 성대의 석탑에서는 다각형이었던 것이 이때 와서는 1단이 원호로 되어 있어 주목된다.
(남쪽 탑의 기단부)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을 1석씩으로 조성하여 쌓았으며
각 층 탑신에는 양쪽 우주가 정연한데,
2·3층 탑신석의 양쪽 우주는 초층에 비하여 가냘파졌음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옥개석은 각 층의 옥게 받침이 5단씩이고 정상에는 각형 2단의 굄을 마련하여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고 있는데 이 탑신 굄대도 낮아져서 약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남쪽 탑의 상륜부)
옥개석 추녀도 기단부의 갑석과 같이 얇으며,
네 귀퉁이 전각(轉角)에는 반전(反轉)이 심하여
평박한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룬 것같이 보이고,
따라서 네 면의 합각(合閣)도 더욱 예리한 선으로서 심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북쪽 탑)
상륜부는 양쪽 탑이 모두 완전하여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보주(寶珠)의 순으로
각 부의 부재를 갖추고 있는데, 앙화석까지는 양쪽 탑이 같은 양식수법이나
보륜은 남 탑에는 삼륜(三輪), 북 탑에는 오륜(五輪)이 장식되어 있다.
원래는 양쪽 탑 모두가 4개의 보륜이었다고 한다.
문화재청과 보림사 등의 문헌 자료에 따르면, 보림사 쌍탑은
신라 경문왕(재위 861~875년) 때인 870년에 세워졌고,
이후 ‘1933년 겨울’에 도굴꾼들로 인해 탑 일부가 훼손되자
조선총독부는 이듬해인 ‘1934년 가을’에 복원공사를 했다.
복원공사를 할 때 남쪽 탑의 보륜 한 개를 북쪽 탑으로 옮기는 바람에
북쪽 탑은 보륜이 5개 되고, 남쪽 탑은 보륜이 3개가 된 것이다.
이는 복원 전 1930년대 촬영된
유리건판 사진(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유리건판 소장품 번호 ‘건판012690’)에 의해 확인되었다.
(북쪽탑의 상륜부)
그리고 양쪽 탑 앞에는 각기 1좌의 배례석(拜禮石)이 놓였는데,
정면에 3구, 측면에 1구의 안상을 오목새김 하여 신라 시대 배례석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북쪽 탑)
이 2기의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상층기단이 큰 데 비하여 하층 기단은 협소하다.
탑신부에서 각 탑신의 폭에 비하여 우주의 폭도 가늘며 옥개석 낙수면도 매우 얇고
전각의 반전만이 크기 때문에 가냘픈 느낌을 준다.
또 노반이 크고 상륜도 굵은 편이나 전체의 조각장식은 매우 약화하였다.
(북쪽 탑의 기단부)
석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등으로서,
지면에는 네모난 지복석(地覆石)과 지대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지대석 위에는 3단의 8각 하대석(下臺石) 받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8각이며 높은 받침과 복련석(覆蓮石)으로 구성되었는데,
받침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1좌씩 조각되었고
복련석에는 모퉁이를 향한 연판(蓮瓣)이 조각되었는데 꽃잎 끝은 말려서 작은 귀꽃이 되었다.
간주(竿柱)는 8각이지만 표면에 조각은 없고 비교적 짧은 편이다.
상대석(上臺石)은 밑에 3단의 받침을 마련하고
꽃잎 속에 화형(花形)이 장식된 단판중엽(單瓣重葉)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다.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8각 1석으로
네 면에 화창(火窓)을 뚫었으며 화창 주위에는 얕은 턱을 파고 작은 구멍이 돌아가면서 뚫려 있다.
옥개석은 넓고 추녀 밑에는 가벼운 반전이 있으며
위에는 귀꽃이 표현되었으며 정상 주위에는 복련을 조각하였다.
상륜은 복잡하여 복련이 조각된 받침 위에 편구형(扁球形)의 보륜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을 축소한 보개가 얹혔는데, 안쪽에 중판연화(重瓣蓮華)가 조각되었음은 특이하다.
이 위에는 앙련이 받치고 있는 화염보주를 얹어 완전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석등 역시 석탑과 더불어 870년(경문왕 10)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간주석(중대석)은 별도 장식이 없다.
(석등 옥개석은 앙련으로 조삭되어 있다.)
(지대석은 사각의 한 돌로 조성되고 그위는 안상을, 하대석은 복련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탑은 탑 속에서 발견된 탑지에 의하여 확실한 건탑연대를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석탑과 석등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특히 삼층석탑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 있어 다른 탑을 복원할 때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다포식 팔작지붕의 전각으로
법당 안에는 보물 제117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국보 제117호. 높이 273㎝로 광배(光背)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아 있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 부분에 8행의 불상 조상기가 음각되어 있다.
명문에는 858년(헌안왕 2) 7월 17일에 당시
무주(武州)와 장사(長沙: 지금의 장흥)의 부관(副官)으로 있던 김수종(金遂宗)이 발원하여
이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보조선사탑비(普照禪師塔碑)에는
859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2,500근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위의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 불상은 858년에 착수되어 859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머리 부분은 나발(螺髮) 등을 덧붙인 것이어서 그런지 몸집에 비교하여 크게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과 비슷하며, 당시의 불상 비례를 반영하고 있다.
육계(肉髻)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으로 비만하다.
편편한 콧잔등,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은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나타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의 표현,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권인(智拳印)을 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들어 위축된 듯한 느낌을 준다.
즉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옷 주름 선에서도 잘 나타난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양어깨를 감싸며, 가슴 앞에서 V자형으로 모아지고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평행의문선(平行衣文線)의 옷 주름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도
힘없이 늘어져 탄력이 없이 표현되었다.
이처럼 다소 해이해진 형태와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특징의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이 더 발전하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995호)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이 불상은 조성 연대가 확실한 불상으로,
당시 유사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되는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철불좌상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국보 제63호인 철원 도피안사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보림사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우권인이지만,
국보 제26호인 불국사의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좌권인이다.
(신중탱)
#철조비로사나불의 왼쪽 어깨 뒷면에 명문이 구양순체 계통의 해서체 명문으로 양각되어 있다.
전체 8행이고 1행에 최대 10자를 쓴 조상기이다. 불상의 조성 연대를 먼저 쓰고,
불상을 조성하기 전에 김수종이 국왕의 허락을 받았음을 적고 있다.
명문 내용은 8행으로 된 불상 조성기이다. 헌안왕 2년(858) 7월 17일에
당시 무주장사의 부관으로 있던 김수종이 왕에게 주청하여 왕명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김수종은 경문왕 10년(870)에 서원부 소윤으로 있으면서 보림사 쌍탑을 건립하였다.
불상의 명호는 지권인을 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비로사나불이라 부르고 있지만,
경내에 있는 보조선사창성탑비에는 노사나불이라고 하였다.
이 불상은 신라 하대에 조성된 철불 가운데에서 명문이 있는 최초의 예 가운데 하나이며,
규모가 큰 대표적인 불상이다. 명문에 조성 연대를 불멸 이후 1808년이라고 밝혀 놓아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북방설의 불멸기원(기원전 949년)이 이때에도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헌안왕 2년 대중 12년(858)으로부터 1808년을 거꾸로 계산해보면
석가여래 입멸의 해는 기원전 949년이 되어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북방설과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북방설은 법림이 확정한 <주서이기>에 따라 기원전 949년을 불멸 기원으로 하였다.
그런데 염거화상탑지나 도피안사비로자나불상명에 보이는 연대는 이것과 다르게 되어 있다.
불상의 조성과 관련된 기록이 경내에 있는 보조선사창성탑비에도 있다.
불상의 조성 시기가 서로 달라 논란이 되고 있다.
조상기의 불멸연기가 비슷한 시기의 금석문과 다르거나, 조상기의 연대표기에 오자가 있다거나,
비문의 연대표기에 오자가 있다는 등의 여러 가지 추측이 제기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불멸연기에 대한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삼성각
@대웅보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정면 5칸, 측면 4칸 다포식 팔작지붕을 한 2층 전각으로 안은 통층으로 되어 있다.
법당 안에는 연등불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을 모시고
여래 좌우에 지장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의 소상(小像)을 모셨다.
법당 앞 마당에는 괘불대가 양쪽으로 놓여 있다.
조사전
미타전
~제2부로 계속~
'국내 명산과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산 쌍계사 (0) | 2019.10.09 |
---|---|
가지산선문의 본산 장흥 보림사(제2부) (0) | 2019.10.06 |
영암기행(6/6) 영암 역사공원 상대포(上臺浦) (0) | 2019.09.30 |
영암기행(5/6)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제2부 (0) | 2019.09.29 |
영암기행(5/6)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제1부 (0) | 2019.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