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산선문의 본산 장흥 보림사(제2부)

2019. 10. 6. 21:04국내 명산과 사찰

가지산선문의 본산 장흥 보림사(2)

1부에 이어 제2부의 주제는 보조선사 체징의 탑과 탑비에 관련된 것이다.

@체징(體澄) 선사는 애장왕 5(804)에 출생하여 헌강왕 6(880)에 열반에 드신 선사다

  시호는 보조선사(普照禪師)이며, 탑호(塔號)는 창성(彰聖)이다.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제3()

성은 김씨(金氏). 웅진(熊津 : 충청남도 公州) 출신.

어려서 출가하여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 밑에서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827(흥덕왕 2)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뒤 설산(雪山) 억성사(億聖寺)에 있는 염거(廉居)의 밑에서 일심으로 정진하여 법인(法印)을 받았다.

837(희강왕 2) 정육(貞育허회(虛懷) 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전국의 선지식(善知識)을 만났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840(문성왕 1) 귀국하였다.

 

이후 많은 승속에게 선도(禪道)를 가르쳤으며,

무주(武州 : 光州)의 황학난야(黃壑蘭若)에 머무르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859(헌안왕 3) 왕이 궁중으로 청하였으나 병을 빙자로 사양하였고,

그해 겨울에 다시 청하자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로 옮겼다.

 

860년 김언경(金彦卿)이 제자의 예를 취하고 사재(私財)를 희사하여 비로자나불을 주조하여 안치하였고,

861(경문왕 1)에는 보림사를 증축하여 더욱 많은 제자를 교화하였다.

 880년 문인들에게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8백여 인이 있었다고 전한다. 시호는 보조선사(普照禪師), 탑호(塔號)는 창성(彰聖)이다.

김영(金潁)이 지은 그의 탑비(塔碑)는 보물 제158호로,

탑은 보물 제157호로 지정되어 장흥 보림사에 조성되어 있다.







보물 제158호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 (寶林寺普照禪師塔碑)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로도 불리며, 보물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3.46m. 비신 높이 2.64m, 너비1.37m



통일신라 시대의 고승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보물 제157)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碑身)과 귀부(龜趺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다.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김원(金薳)과 김언경(金彦卿)이 썼는데,

첫 줄에서 일곱 번째 줄의 ()’자까지는 해서(楷書)로 김원이 썼고

 ()’자 이하는 행서(行書)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청() 말기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이라고 평한 바 있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두(龍頭)처럼 변하였으며,

이목구비의 조각이 뚜렷하여 사나운 모습을 보여준다.

등 뒤에는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碑座)를 설치하여 비신을 받게 하였다.



이수는 아래에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반룡(蟠龍 : 승천하지 않은 용)을 조각하였는데 뛰어난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는 9세기 말경의 비석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보물 제157호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


보물 제157. 이 탑은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보림사를 개창한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의 묘탑이다.

보조선사는 도의(道義)와 염거화상(廉居和尙)의 법맥을 이어

보림사에서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한 선사이다.



이 탑의 높이는 4.1m이며, 사찰 중심에서 동쪽의 가지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40m쯤 아래에 탑비가 함께 서 있다.

 

부도는 높은 8각 지대석(地臺石) 상면에 가장자리를 따라

매우 낮은 각형(角形) 1단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세웠는데,

기단부는 상대석(上臺石중대석(中臺石하대석(下臺石)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상하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상·하단 모두 8각인 것이 확실하나

현재는 파손이 심하여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며,

하단은 각 면에 안상(眼象)이 있고 상단에는 사자상(獅子像)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 있다.

 

하대석 위에는 중대(中臺)를 받기 위한 원형의 굄돌을 따로 만들어 끼워 놓았는데,

 측면에 권운문(卷雲文)을 원각(圓刻)에 가깝게 사실적으로 조식하였다.

굄돌 상면에는 8각으로 낮은 1단의 각형과 높은 각형 2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중대석을 받고 있는데,

측면의 운문(雲文)이 반전(反轉)되듯 입체적으로 위까지 올려 덮고 있다.

 

중대석은 8각인데 배가 약간 부른 형태로서 배흘림을 표현하고 있다.

각 면에는 상·하단부에 대칭으로 두 줄의 횡대를 돌리고 각 횡대 사이에는 모서리에 1좌씩,

그리고 그 중간에 1좌씩의 화문(花文)을 가늘게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각 면에는 상하에 괄호형이 있고 좌우에도 중앙에 1단의 굴곡을 둔 방형에

가까운 특이한 형식의 안상을 평행선으로 이중이 되게 오목새김 하였다.

여기에서처럼 안상이 방형이라든지 삼중으로 안상을 조각한 중대석의 양식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안상 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이 간소하다.

 

상대석의 앙련대(仰蓮帶)는 상단의 8각 갑석형(甲石形)과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하면에는 8각의 중대석 상면에 맞게 놓이도록 8각으로 2단의 각형 받침을 조각하였다.

 앙련은 단엽1(單葉一瓣)씩을 각 모서리에 조각하였는데,

 이 판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또 하나의 연엽형(蓮葉形)을 오목새김하고

그 안을 고사리문과 곡선문으로 장식하고 있다.



 

탑신 굄대는 다른 돌로 높게 조성하여 끼웠으며 8각을 이루었는데,

각 측면에는 조각이 전혀 없으며 중간에 가로로 한 줄의 곡선을 돋을새김하고

·하단은 낮게 갑석형을 돌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측면이 수직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중간의 횡선을 경계로 하여

각기 상·하단에서 반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중대석의 배흘림의 의장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또한, 굄대 상면에 굄단이 없이 탑신석을 안치한 것은 상대석 상면과 같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탑신석은 유난히 넓고 크며, 8각의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가 모각 되고

 특히 상단부에는 주두(柱頭 : 대접받침)가 모각 되어서 목조가구(架構)를 재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

탑신 여덟 면에는 전·후면에 문비형(門扉形)을 모각하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갑주(甲胄)가 화려하다.

 탑을 든 북방 다문천상이 현재 남서면에 있어 탑신의 앞뒤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두 면에는 상을 조각하지 않았다.

사천왕상은 각기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몸 좌우로는 천의가 휘날리고 있다.

창과 탑을 든 북방 다문천상을 제외하면 모두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옥개석 역시 8각형으로 하면에 서까래 모양을 모각하였는데

탑신석에 놓이는 부분에 8각으로 2단의 각형 받침을 내고 처마 부분에는 굵은 권운문을 조각하였다.

 상면에는 여덟 면의 합각(合角)에 우동(隅棟 : 탑 옥개석의 귀 마루)이 굵직하게 조각되었고,

 그 사이의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표현되었다. 추녀는 수평이나 매우 중후하고 막새기와의 표시도 전혀 없는데,

각 모서리에는 반전을 보이며 우동 끝에 삼산형(三山形)의 귀꽃이 표현되었다.

옥개석의 추녀는 길게 뽑지 않고 탑신에 비해 단출한 느낌이 들도록

 폭을 좁게 하여 전체적으로 이 부도가 늘씬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옥개 정상에는 2단의 각형 받침을 조각하여 상륜(相輪)을 받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완전한 형태가 아니지만 복발(覆鉢보륜(寶輪보주(寶珠)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복발은 원형이며 측면에는 여덟 귀퉁이를 표시하기 위한 화문을 조식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횡대를 돌렸다.

그리고 이 위에 대의 마디 모양의 간주(竿柱)가 세워지고

그 중간마다 보륜이 놓였는데 각 측면에는 굵은 권운문을 조식하였다  


(탑 옆에 세워진 무명의 보살상. 머리부분이 멸실되어 있다.)


이 부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상으로

 염거화상탑(국보 제104)에서 사천왕이 처음 등장한 이후로

고려 초까지 대부분의 탑신에 사천왕상이 표현되고 있다.

사천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중(神衆)으로, 선사의 묘탑인 부도에 사천왕이 표현된 것은

선사를 부처와 같이 동등하게 생각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이 무렵 만들어진 전남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861, 보물 제273)이나

경북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883, 보물 제37)에서는

 사천왕상과 더불어 제석과 범천상이 조각되어 있기도 하다.

이 부도의 앞쪽에는 탑비가 남아 있어서 보조선사의 행적 및 당시 사찰의 대외관계 등 모든 내용을 알 수 있는데,

비문에 의하여 볼 때 이 부도의 조성 연대는 88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왕실의 후원을 입어 선승들의 부도와 탑비가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예술적으로 뛰어난 부도가 만들어지던 시기로,

보조선사탑은 이 시기 조형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범종루


편액은 청정인월림궁인데 그 용도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