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기행(5/6)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제2부

2019. 9. 29. 11:19국내 명산과 사찰

영암기행(5/6)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2


도갑사는 정묘재란과 1977년 대화재로 전각이 모두 소실 되었다.

도갑사의 화재와 관련된 이런 이야기가 전래 되고 있다.

 

옛날 3백여 년 전에 철모를 쓴 자가 이 절에 나타나면 절이 망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어느 날 대중이 절 밖에서 간장을 달이고 있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쏟아지는 비를 급하게 피하느라고 그만 달이든 간장솥은 까마득히 잊혀버렸는데

 어디서 왔는지 철모를 쓴 7척 거인이 나타나

솥 위에 두 가랑이를 벌리고 서서 간장 솥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 모양이 하도 괴이하고 우스꽝스러워 간장을 달이든 공양주와 대중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그러나 이날 밤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나

 해탈문과 천왕문만 남겨두고 가람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천왕문도 무너지고 해탈문만 현재 남아 있다.

이 설화에 나오는 철모는 곧 병화를 상징한 것으로

사실 정묘재란에 도갑사가 해탈문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소실될 것을 암시한 것이라고 한다.





미륵전 앞에 세원진 용화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89




미륵전에 봉안된 이 석조여래는 미륵불로 보물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과 광배(光背)를 하나의 긴 석재에 조각한 불상이다.

사각의 대좌 위에 안치되었으며 마모가 적어서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조각이다.

   


한 덩어리의 석재를 배 모양으로 다듬고, 다시 불좌상을 새겼다.

광배와 불상이 한 덩어리이며 대좌는 또 다른 석재를 깎아서 만들었다.

하나의 돌을 깎아 만든 조각으로는 상당히 고부조(高浮彫)이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螺髮]을 붙인 불상의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肉髻]를 높게 표현했다.



 신라 하대의 불상에서 육계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낮게 만들어진 것과 대조를 이룬다.

얼굴은 타원형이며 눈썹이 깊고, 가늘게 뜬 눈은 눈꼬리가 귀 쪽으로 길게 파였다.

콧날이 뚜렷하면서 넓적한 코, 두툼한 입술은 신체와 비교하면 이목구비의 인상을 강해 보이게 한다.

 

얼굴과 비교하면 신체는 입체감이 없다. 허리가 긴 상체는 평면적으로 처리되었고,

 가슴과 배의 구분이 없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두 다리 폭이 넓고 안정감이 있으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팔은 길고, 편안하게 다리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며,

특히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신체는 균형 잡힌 비례를 보여 주고 있으나, 세부는 생동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대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 옷을 걸쳐 입은 편단우견(偏袒右肩) 형식이다.

옷은 투박하고 간략하게 표현되었고, 기계적이고 뻣뻣한 몇 가닥의 옷 주름이 얕은 선각으로 새겨졌다.

 그나마 배 아래로는 더욱 소략하고 성의 없이 처리되어 가슴 윗부분을 중심으로 만든 조각임을 알 수 있다.


 

갸름한 타원형의 광배 둘레에는 매우 낮은 부조로 불꽃무늬를 나타내고,

가운데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제일 윗부분에 세 구의 작은 부처[化佛]를 조각했다.

반면 대좌는 아무런 장식도 새기지 않은 소박한 것이다.

상대, 중대, 하대로 구성된 사각의 낮은 대좌는 고려 전기 조각에서 볼 수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전통을 이은 항마촉지인의 불상이지만 경직되고 형식화된 수법을 보여 주지만,

 투박하고 소략한 세부묘사, 높이 솟은 육계, 좁고 길쭉한 배 모양의 광배는 고려 초기 석불의 특징이다.

3m에 이르는 대형의 석상이라는 점과 단순하고 장식이 없는

사각형의 대좌 역시 고려 전기의 조각에서 볼 수 있다.

도갑사를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창건했다는

사찰의 내력에 비추어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편년이라 할 수 있다.








영암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靈巖道岬寺道詵國師-守眉禪師碑) 보물 제1395




통일신라 시대의 선승인 도선국사와 도갑사를 중창한 조선 시대 수미왕사를 추모하는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는 1636(인조 14) 4월에 건립을 시작하여

17년 후인 1653(효종 4) 4월에 완료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본래 이곳에 도선국사의 고비(古碑)가 있었는데

비바람으로 글자가 마멸되고 귀부의 머리가 결락되는 등 훼손이 심하여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도갑사를 중창한 옥습 대사(玉習大師)3년에 걸쳐 각 사찰에 다니면서 찬조를 구하는 한편,

신도들로부터 모금하고 한양까지 가서 비문을 청탁하였다.

비석에 사용된 돌은 전라도 관찰사의 도움으로 부역을 통해 여산(礪山)에서 운반해 왔으며,

돌이 도착한 이후 7개월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가 갖춰진 석비로

도갑사의 부도전(浮屠田) 부근에 건립된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는 도갑사 도선 국사 수미 선사비

도갑사 도선 수미 양 대사비로도 불린다.

1974522일 지방 유형 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으나,

 2004126일에 보물 제139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보호각은 비신이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므로 비바람에 의한 훼손을 막기 위해 2000년에 건립하였다. 



전체 높이는 517이며, 귀부는 방형의 대좌 위에 머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틀고 있다.

머리는 용두가 아닌 거북의 머리 모양이나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앞발은 다섯 개의 발가락을 내었다.


 

귀갑문은 일반적인 6각 문이 아닌 평행 음각선으로 5각에 가까운 갑문을 표현하였으며,

등 부분에는 하엽(荷葉 ; 연꽃잎)으로 비좌를 표현하였는데

이는 조선 1471년에 건립된 원각사비(보물 제3) 등에서 보이는 조선 시대의 특징적인 형식이다.

앞 뒷발에는 고기의 비늘과 같은 문양을 새겼다.


 

비신은 화강암이며 전후 면에 글씨가 음각되어 있고

측면에는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향하고 있는 두 마리 용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매우 생동감 있고 힘차게 표현되었다.


 

이수는 한 돌로 조성되어 있는데 하단에는 2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그 위로는 구름이 뒤덮인 가운데 두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며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머리를 쳐들고 있는데 조각이 매우 사실적이다.


 

비문은 크게 전면의 비문과 후면의 음기로 구분되는데

 전면의 비문은 찬자(撰者)와 서자(書者)가 각각 다른 두 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 전면 상단에는 전서체로

 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란 제액을 만들었으며,

당시 형조판서인 김광욱(金光煜)이 썼다.


 

비의 좌측 비문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지었으며, 글씨는 예조판서 오준(吳竣)이 썼다.

이 비문은 총 16714(자경 45)이며

비제(碑題)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서(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幷序)”이다.

 전면 우측의 비문은 총 10512(자경 23)로서

비면 상하를 모두 채운 것이 아니고 비면 중간에서 시작하였다.

찬자는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인 이경석(李景奭)이며,

글씨는 홍문관 제학 오준(吳竣)이 썼다.

좌면의 비문과 음기의 찬자는 각각 홍문관 부수찬 이수인(李壽仁), 홍문관 교리 정두경(鄭斗卿)이다.

   


보통 비는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데 반해

이 비는 비명이 도선국사와 수미선사 두 사람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주로 도선국사에 관한 것이며,

수미선사에 대해서는 천순(天順) 원년(1457)에 도갑사를 중창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수미선사의 비王師妙覺和尙碑20년 전인 1633(인조 1)에 새로 만들어 대웅전 남쪽에 세웠다.



비문은 전면에 2, 후면에 1개 등 모두 3개의 내용으로 구분되어

일반적인 비문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세 부분의 명문이

 모두 동일한 건립 연대를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부분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가 모두 다른 것은 비석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한 시점부터

모금 기간과 공사 기간을 합쳐 21년이라는 긴 기간이 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비는 조선 후기 서예와 조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대웅보전 벽화










국사전



도갑사수미왕사비(道岬寺守眉王師碑)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52



도갑사 수미 왕사비(道岬寺 守眉 王師碑)1633년에 영암군의 도갑사에 세워진 비석으로

조선 세조 대 왕사(王師)를 지낸 묘각 화상(妙覺和尙) 수미(守眉)의 행적과

도갑사 중창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세조 대 흥불 정책의 상징적 인물인

 수미와 왕실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써 평가되고 있다.

또한, 도갑사 수미 왕사비는 도갑사 묘각 화상비

월출산 도갑사 왕사 묘각 화상비로도 불린다.

198761일에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수미가 입적한 후 도갑사의 동쪽 산기슭에

승탑과 더불어 행적을 기록한 비를 세웠으나 글자가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당시의 주지였던 청신 화상(淸信和尙)

 백암(栢庵) 성총(性聰)[1631~1700]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고 하였다.

비의 건립은 1629(인조 7) 2월에 시작하여 4년 후인 1633(인조 11) 6월에 완성되었다.

전체 높이 334. 비신 높이 200, 너비 108, 두께 21㎝로

방형의 대좌 위에 귀부(龜趺비신(碑身이수(螭首)를 안치한 완전한 형태의 석비이다.

귀두는 용두화되었으며, 입에는 여의주 없이 위아래로 이빨을 맞대고 있다.


 

목은 짧은 편이고 앞발은 약간 벌려서 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발가락은 5개이다.

뒷발은 앞발과 달리 양옆을 향하고 있다. 귀갑은 이중의 6각문(六角文)이며,

등에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받고 있다.

이수는 조선 시대에 흔히 보이는 팔작지붕형이 아니고 장방형이다.  

이수의 네 모서리 상단에 밖을 향하여 용두(龍頭)가 조각되어 있고,

몸뚱어리는 서로 얽혀 허공을 날아 비약하는 모습이다.

이수의 전면 중앙에 또 한 쌍의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입을 근접시켜 혀를 맞대고 있는 재미있는 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비 전면 상단에 月出山道岬寺王師妙覺和尙碑銘

(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명)’이라 전서(篆書)하였고,

 비문은 19행의 해서체이다.

 

비문의 끝에 崇禎己巳二月日始癸酉六月日立(숭정기사2월일시계유6월일립)’이라 하여

이 비가 1629(인조 7) 2월에 시작하여

4년 후인 1633(인조 11) 6월에 세워졌음을 밝히고 있다.

비문은 백암성총(栢庵性聰)이 짓고 썼다.

비신 후면에는 비 건립에 참여하였던 지방인사와 승려 등의 시주자들이 음각되어 있다.

 



도갑사 수미 왕사비는 가로 160, 세로 175크기의 방형 대좌와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귀부의 등 가운데에 장방형의 비좌를 설치하고

이수(螭首)[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를 갖춘 비신를 올렸다.

 귀부의 머리는 용의 머리처럼 되어 있으나 목이 짧고 도식화된 형식이다.

 눈방울이 부리부리하여 용맹스러운 인상을 주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이빨이 두드러진다.

귀갑(龜甲)은 벌집 모양의 육각문으로 몹시 두껍게 조각되어 있으며,

앞발은 약간 벌려서 자 형으로 뻗어 나왔고

발톱은 앞발과 뒷발 모두 5()이지만 역시 형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신에는 별다른 문양이 없으며, 전면 상단에 13.5크기의 글씨로

 월출산 도갑사 묘각 화상 비명(月出山道岬寺王師妙覺和尙碑銘)’이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본문은 모두 19행이고 해서체로 새겼다.



 비신 위에 놓여 있는 이수는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형태인 팔작지붕형이 아닌 방형으로

밑면에 3단의 고임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에는 구름무늬가 섬세하게 양각되어 생동감을 준다.

네 모서리에 날아오르는 듯한 용머리를 조각하였으며,

전면 중앙에는 한 쌍의 용이 싸우듯이 서로 뒤얽혀

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여 박진감을 느끼게 한다.  



비신의 전면에는 수미 왕사의 업적을 기록하였는데,

출생과 출가, 교학 연구에서 선 수행으로의 전환한 배경과 수학 내력,

속리산 법주사에서 도반 신미(信眉)와의 만남,

조선 전기 억불 정책이 시행되던 상황에서 판선 종사(判禪宗事)를 역임하면서 종문을 지켜낸 업적과

비의 건립 과정 등을 간략히 서술하였다. 특히 본사인 도갑사에 돌아와 머무는 동안

 세조가 수미의 문도인 홍월(洪月)에게 중창 공사를 주관하게 한 것을 계기로

황폐하던 도갑사가 크게 중창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비의 전액과 본문 모두 백암 성총이 짓고 썼다.

후면은 시주질(施主秩)로서 비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지역 인사와 승려들의 이름을 나열하였다.

지금의 보호가은 2000년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수미 왕사는 1458(세조 4)에 왕명으

로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찾았으며,

이듬해에는 세조의 월인석보(月印釋譜)간행 사업에도 참여하는 등

 세조 대 불교 중흥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도갑사 수미 왕사비는 이 같은 수미의 행적을 전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볼 때 17세기 초에 세운 석비이면서도

그 양식과 수법은 고려 전기에 유행하였던 것을 따르고 있는 특이한 사례로서

귀부가 다소 도식적으로 표현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전대의 솜씨가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의 솜씨와 비문의 필치도 섬세하고 우수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심검당


범종각



법고를 받치는 좌대로 거북모양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한 용, 그리고 연잎을 받쳐든 모양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