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기행(5/6)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제1부

2019. 9. 28. 16:02국내 명산과 사찰

영암기행(5/6)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제1부


월출산 도갑사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 모양이다.

 처음 방문했을 때가 20074월이라 도갑사의 전각들은 기억이 없는 데

유독 해탈문 아래에 있었던 아름드리 팽나무만 기억이 아롱거린다.

10여년 세월이 흘러 다시 찾은 도갑사, 무성한 팽나무를 다시 보니 그때의 감흥이 새롭다.






팽나무는 20정도로 자란다고 한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잘 자라지만,

소금기가 있는 바닷가에서도 잘 자란다고 한다.

팽나무는 두툼한 껍질을 뒤집어쓰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수백 년이 되어도 울퉁불퉁하지만 갈라지지는 않고 얇고 매끄러운 껍질을 갖고 그대로 버틴다.

  

 

 

남부지방에서 부르는 팽나무의 다른 이름은 포구나무다.

배가 들락거리는 갯마을, 포구(浦口)에는 어김없이 팽나무 한두 그루가 서 있기 때문이다.

팽나무는 곰솔과 함께 짠물과 갯바람을 버틸 수 있는 나무로 유명하다.

내륙지방에서도 자라기는 하지만 바닷가에서 심고 가꾸는데 가장 적합하다.

우리나라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산림청의 관리를 받는 고목 13천여 그루 중

팽나무는 약 10%1,200본으로서 느티나무 7,100본 다음으로 많다.

 이 중 대부분은 전남, 경남, 제주에서 자란다.


 

팽나무는 느티나무나 은행나무만큼이나 오래 산다.

천 년을 넘긴 나무도 있으며, 남부지방의 당산나무는 흔히 팽나무인 경우가 많다.

옛날에 배를 매어두던 나무로 천연기념물 494호로 지정된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의 팽나무는 키 12, 줄기 둘레 6.6, 나이 400년에 이르며,

우리나라 팽나무 중 가장 굵다고 한다.

도갑사의 팽나무는 수고(樹高) 8m, 둘레 4.4m,

수령은 올해(2019) 기준으로 518년이 되지만 아직 천년 기념물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월출산 도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신라 말 국사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도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숲속에 버렸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으므로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 문수사 터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과 달리 도갑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35, 경내의 도선수미비(道詵守眉碑),

영조 19(1743)에 쓰인 도선국사실록(道詵國師實錄)등에

도선국사가 창건하거나 머물렀던 사찰로 기록되어 있으나 관련 유구나 유물은 찾아볼 수 없다.


 

출토 와당의 경우 일부 건물지에서 백제나 통일신라 시대 기와 조각이 출토되기는 하였으나

성화 3(1467), 훙치 원년(1488), 강희13(1674) 등의

명문와를 포함한 조선 시대 것이 주류를 이루며 그중에서도

 수미, 신미 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던 15세기 말의 기와들이 중심을 이룬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도갑사는 880(헌강왕 6) 도선국사가 문수암이 있던 자리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후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미륵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

 대웅전 앞에 있는 5층 석탑(보물 제1433), 석등 대좌 등 여러 유적 등을 볼 때

 11세기에 대규모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사세가 크게 기울었으나

1457(세조 3)부터 신미(信眉)와 수미(守眉) 두 스님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창 불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도갑사는 12개의 암자를 거느리며 966칸이나 되는 큰 사찰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고 말았다.

1835(헌종 원년) 호암화상이 다시 중창하였으나

한국전쟁과 1977년 화재로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또다시 소실되었다.

 현재 도갑사에 남아 있는 건물들은 1981년 이후에 다시 세운 것들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명부전(冥府殿미륵전(彌勒殿

국사전(國師殿해탈문(解脫門일주문 및 요사인 세진당(洗塵堂)이 있다.  

문화재로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 해탈문(국보 제50),

목조문수보현동자상(보물 제1134), 오층석탑(보물 제1433),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

도선국사 수미선사 비(보물 제1395)가 있고

지방문화재로 수미왕사비(전남 유형문화재 제152) 등이 있으며

사찰 일원은 문화재 자료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갑사 해탈문: 국보 제50


국보 제50호인 도갑사 해탈문은 1977년 화마(火魔)에서도 온전히 보존된 도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정면 3, 옆면 2, 단층 맞배지붕의 주심포(柱心包) 형식으로

1960년 해체(解體) 수리 시에 발견된 상량문(上梁文)에 의하면

신미(信眉수미(守眉) 두 스님의 발원으로 왕실의 도움을 받아

조선(朝鮮) 성종 4(1473)에 중건(重建)되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 시대 공사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71년부터 2010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해탈문의 부분적인 보수와 주변 정비가 이루어졌다.


 

좌우 1칸에는 절 문을 지키는 2기의 금강역사상과 문수보살동자상과 보현보살동자상이 서 있고,

가운데 1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위쪽에는 도갑사의 정문임을 알리는 월출산도갑사(月出山道岬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반대편에는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신문(山門)건축으로,

춘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과 비교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해탈문은 석조기단(石造基壇) 위에 선 규모가 작은 문으로, 중앙 칸은 통로로 되어 있다.

원래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고 하나 없어지고,

뒤쪽 좌우 칸에 2기의 금강역사와 보물 제1134호인 2구의 목조 동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구조는 약한 배흘림을 지닌 둥근 기둥 위에 이출목(二出目)의 공포()를 올렸고, 그 위에 대들보를 올렸다.

보 끝은 외목(外目) 도리를 받고, 대들보의 양단(兩端) 근처에 마루보 끝을 받치는

 포대공(包臺工)의 첨차()가 바로 우미량(牛眉樑)이 되어,

앞으로 나오는 것을 기둥 위의 대들보에서 받아, 이것이 주심(柱心)도리를 받친다.

마루보 중앙에는 포대공으로 된 마루 대공을 두어 마루도리를 받으며,

마루도리 앞뒤에서 약한 반곡(反曲)을 지닌 소슬합장(合掌)이 역시 마루도리를 떠받치고 있다.


 

이 문의 건축양식의 특이한 점은 공포가 구조적으로는 고출목 같으나 형태는 출목으로 보이고,

또 대들보나 마루보 위에서 마루도리나 대들보를 지탱하는 포대공의 양식이

기둥머리에 있는 공포와 전혀 달라 마치 다포집 양식의 공포와 같은 형태로 된 점이다.



이 건물의 건축양식은 부석사 조사당(祖師堂 : 국보 제19))과 동일한 계통이나

특이한 점은 공포 부분이 다포계통(多包系統)의 형태로 되어 있어

주심포(柱心包)집이면서 다포집 양식의 수법(手法)을 혼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주심포집 양식에서 가장 많이, 또 구체적으로 다포집 양식의 수법을 혼용한

가장 뚜렷한 유구(遺構)로서 흥미 있으며, 한국에서 보기가 드문 산문(山門) 건축으로 매우 중요하다.



밀적금강


나라연금감


보현동자

보물 제1134호로 지정되어 있고 문수보현동자상 각각 높이는 178cm이다.

 (보호각의 창살이 좁아 사진은 부분적으로 담아 보았다.)

해탈문의 뒤쪽 좌우 칸에 사자를 탄 문수동자상과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상이 대칭적으로 놓여 있다.

보통 이러한 형식의 문수·보현동자상은 석가나 비로자나불 좌우에서 협시하거나

금강문의 금강역사상과 나란히 안치된다. 진리를 찾아 순례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문수동자 

문수동자상은 사자상 위에 두 다리를 나란히 모아 앉아 있는 자세를 보여 준다.

머리는 좌우로 묶은 쌍계 머리, 통칭 동자 머리를 하고 있다.

얼굴은 둥글고 복스러우며 천진한 미소를 띠고 있어서 동자로서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체구는 작고 둥글며 자연스러운데 두꺼운 옷 때문에 세부 양감은 표현되지 않았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손바닥을 위로[上掌]하여 놓았고 왼손은 들어 역시 손바닥을 위쪽으로 하고 있다.

 사자 위에 앉아 있는 다리가 유난히 큼직하여 통나무를 깎아 놓은 것처럼 비사실적이다.

그리고 종아리의 바지를 묶어 독특하게 주름져 있는데, 시대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옷은 다소 두껍게 처리되었고 그 위에 천의 자락이 휘감겨 있다.

채색은 적·녹의 중간색으로 은은하게 칠해져 있다. 약간 낡아 고격(古格)하게 보인다.

사자는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조각 솜씨는 범상하지 않아 사자로서의 면모를 그런대로 보여 주고 있다.

조선 시대의 사자상 조각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문수보살 동자상으로는 국보 제221호로 지정된 오대산 상원사의 목조문수보살동자상이 있고,

 문수보살의 전생담을 회화한 탱화로는 오대산 중대사자암의 탱화가 유명하다.

 본방 <오대산 중대사자암과 적멸보궁> 참조)


 

보현동자상은 문수동자상과 마찬가지로 코끼리상 위에 걸터앉은 자세이다.

무릎이 내려져 있어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전반적인 얼굴이나 체구는 문수동자상과 흡사하며

양식적 특징도 같아서 같은 작가에 의하여 조성된 상으로 여겨진다.



광제루







도갑사 오층석탑 보물 제1433

도갑사 오층 석탑(道岬寺 五層 石塔)은 도갑사 대웅보전 앞에 있는 석탑으로

이중 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屋蓋石), 노반(露盤)과 보주(寶珠)를 올렸으며,

 안정된 조형미가 돋보이는 고려 초기 석탑의 형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도갑사 오층 석탑의 조성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전하지 않지만,

2딘 기단에 탱주가 여럿이고, 전체적인 체감율과 조형미 등을 미루어 볼 때

신라말에서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로 통일신라 시대의 탑은 2단의 지대석, 3층 석탑 그리고 탱주가 2개 이상인 것이 특징이다.


 

이중 기단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갖추고 노반과 보주로 이루어진 상륜(相輪)을 올렸다.

당초에 기단부의 하부 구조인 지대석이 매몰되어 있어 단층 기단인 것으로 추측되었으나,

발굴 조사 결과 이중 기단으로 확인되었다.


 

세부적인 형식을 보면, 기단은 4매의 판석으로 구성하였으며

각 모서리의 우주(隅柱)와 각 면 중앙의 탱주(撐柱)가 조각되어 있다.

탑신 역시 4매의 판석을 결구하였으며 각 면에 우주를 나타내었다.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두꺼운 편이고 낙수면의 경사도 급하며,

처마의 곡선은 거의 직선으로 뻗어 있다.



옥개석의 윗면 중앙에 1단 고임이 각출 되어 있어 상층의 탑신을 받치고 있다.

옥개석 아랫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층급 받침은 5단인데 층단이 매우 낮은 것이 특징이다.

층급 받침의 개수가 4층 옥개석에서는 4, 5층에서는 3단으로 줄어들고 있으며,

옥개석의 폭 역시 체감되고 있어 전체적인 안정감을 준다.  



도갑사 오층 석탑은 하층 기단이 유실되어 단층 기단 위에 탑신과 상륜부가 얹어진 형태로서

1987년에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19999월에 목포 대학교 박물관이 도갑사 경내를 발굴 조사하면서

세진당[요사채] 북서쪽에서 하층 기단부를 발견하여

20022월에 이중 기단의 5층 탑으로 복원되었다.

그 뒤 도갑사 오층 석탑은 20056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지정이 해제되고

보물 제1433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대웅보전 마당에서 바라 본 광제루


대웅보전 앞 석등




@대웅보전

정면 5, 측면 4칸 공포는 다포식으로 외관은 2층이나 안은 통층으로 되어 있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봉안했다.

대웅전에는 석가삼존과 육광보살의 금동상이 있었는데

1977년 화재로 인하여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육광보살은 당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자료를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깝다.

지금의 대웅전은 1979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도갑사 대웅전 서까래 양식에 얽힌 이야기 하나.

옛날 도갑사를 지을 때의 일이다. 나라에서 유명한 목수들이 모두 동원되어 도갑사를 지었는데,

이때 대웅전 서까래는 그중에서도 실력이 으뜸인 팔순의 노인이 맡았다.

노인은 몇 달 동안 좋은 나무를 골라 서까래 500개를 잘랐다.

 

서까래를 다 자르고 그 수를 세던 노인은 자신이 서까래를 원래 필요한 길이보다 짧게 잘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은 큰 실수를 하게 된 것을 알고 상심하여 몸져눕고 말았다.

 영리한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말 못 할 걱정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다.

노인은 며느리가 끈질기게 이유를 묻자 할 수 없이 자신의 실수를 털어놓았다.

 

며느리는 누워 있던 노인을 일으켜 세워 집의 서까래 몇 개가 부러진 탓에

처마에 서까래 도막을 이어 받친 곳을 시아버지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는 잘못 자른 서까래에 짧은 서까래를 그만큼 이어 붙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며느리의 말을 듣던 노인은 무릎을 탁 치며 그것을 부연식(附椽式)이라 하느니라.

 왜 부연식을 생각하지 못했을꼬.”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리나케 다시 일을 시작한 노인은 상량일에 맞추어 무사히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도갑사의 대웅전은 다른 절과는 다른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그 이후로 부연식(附椽式)은 며느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여 부연식(婦椽式)으로도 표기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측에 약사여래, 우측에 아미타여래를 모셨다.


아미타여래


석가모니불


약사여래


삼장  목각탱






목각신중탱


관음탱


범종과 법고


천불전




삼층석탑과 명부전


명부전






산신각














~~도갑사 제2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