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얼이 깃든 부여 성흥산 대조사

2019. 9. 9. 01:47국내 명산과 사찰

백제의 얼이 깃든 부여 성흥산(聖興山) 대조사(大鳥寺)

 

백제의 얼이 깃든 부여 성흥산(聖興山) 대조사(大鳥寺)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부여읍지(扶餘邑誌)에 의하면 이 절은 인도에 가서

범본(梵本) 율장(律藏)을 가지고 돌아와서

백제 불교의 방향을 달리한 겸익(謙益)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겸익(謙益)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6대 성왕(재위 523554) 초기에

인도 상가나사에서 범문과 율부를 전공한 승려로 출생과 사망은 미상이다.

겸익에 대한 기록은 미륵불광사사적(彌勒佛光寺事蹟)에만 수록되어 있다.

이 사적기에 의하면 526(성왕 4)에 사문 겸익은 마음에 맹세하고

계율을 구하고자 바다를 건너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寺)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5년 동안 인도에 머물며 범문을 배우고 천축(天竺)의 말에 환히 통하였으며,

율부를 깊이 전공하여 계체(戒體)를 장엄하였다.

그리하여 배달다 삼장과 함께 범본 아비담장(阿毘曇藏)5부 율문(律文)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 사적기를 참작하여 기록한 현판에 의하면 이 절은 527년 담혜(曇慧)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창건주에 대한 설은 다소 다르지만, 이들이 모두 6세기 초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담혜(曇惠) 삼국시대 백제에서 일본에 건너가 불교 전파에 공헌한 승려로

일찍이 당나라로 유학하여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여러 경전을 공부하였으며,

554(위덕왕 1) 도심(道深) 9인의 승려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불법을 홍포한 승려이다.

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에는 이때 일본에 간 담혜 등 9인이

일본 사문(沙門)의 시초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 국사(國史)에는 담혜가

 성실론(成實論)을 소의(所依)로 하는 공종(空宗)에 속한 승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이 절은 고려 원종 때 진전장로(陳田長老)가 중창하였고, 그 뒤 1989년에는 명부전,

1993년에는 종각, 1994년에는 미륵전을 각각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통보전과 용화보전·명부전·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원통보전 뒤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보물 제2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건 설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에 구전되고 있다.

백제 시대 성흥산 중턱의 커다란 바위 아래에 한 노승이 조금만 암자를 짓고 살고 있었다.

어느 따뜻한 봄날 노승이 양지바른 곳에서 경건한 마음과 자세로

참선 삼매 도중에 그만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한 마리의 커다란 새가 서쪽에서 날아와

신기하게도 황금빛을 발산하면서 현재의 대조사가 있는 곳에 앉아

큰 바위를 향해 계속 날개를 저었다.

그러자 햇빛에 반사된 한 줄기 광명이 바위에 집중되더니 그곳에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이후에도 노승은 여러 날 동안 같은 시각에 같은 꿈을 꾸게 되어 이를 가림 성주에게 알렸고

성주는 곧바로 성왕에게 보고하였다. 성왕은 사비로 천도할 시기가 왔음을 알고

이곳에 대사찰을 짓도록 하였는데 10년이 걸릴 대규모 사업이었으나

사공을 주야로 투입하여 공사를 서둘렀다.

그때마다 신기하게도 공사현장에 새가 날아와 울어 주위를 밝혔고

새소리에 사공들은 피곤을 잊고 공사에 매진하여 5년 만에 대사찰을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절 이름을 황금빛 큰 새가 나타났다 하여 대조사(大鳥寺)라 지었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큰 바위에 석불을 조성하였다고 전해온다.

 

또한, 이 절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0호인 삼층석탑 1기가 있다.

 이전에는 옥개석(屋蓋石)만 있었으나, 1975년 옥신(屋身)이 발견되어 복원하였다.







@원통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주포식 맞배지붕이다.

법당 안에는 본존불은 목조보살상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으로 아미타탱화가 조성되어 있다.





대조사(大鳥寺) 원통보전에 봉안된 목조보살좌상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 높이는 82.5, 무릎 너비는 55.5이다. 대조사 목조보살좌상은

고개를 앞으로 숙인 자세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으며, 무릎이 높고 넓어 안정적인 비례를 보인다.

얼굴은 사각에 가까운 방형이며, ·구름·화염보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과

그 옆으로 휘날리는 곡선적인 관대, 그리고 간결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옷 주름 등이 특징이다.

방형의 넓적한 얼굴에 기다란 눈, 오뚝한 콧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긴 입술을 표현하여 근엄하고도 자비로운 인상을 준다.

 

착의법은 편삼과 대의를 입은 변형 통견 식이며 밋밋한 가슴 위로 수평의 승각기가 보인다.

 옷 주름이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고 깊이감이 있어 강한 힘이 느껴지며

오른쪽 발목에서 반전되어 직선으로 늘어뜨린 옷 주름이나 왼쪽 무릎에

넓게 지그재그식으로 맞주름이 잡힌 옷자락 등은

이 불상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수인은 중품하생인을 취하였다.

 

안정감 있는 비례에 넓적한 방형의 얼굴, 그리고 화려한 보관과 수평으로 휘날리는

관대의 표현과 양감 있는 옷 주름 등이 특징이며

자세나 안정적인 신체 비례, 방형의 얼굴에 변형 통견식 착의법 등

조선 후기 17세기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인다.

여기에 얼굴의 세부 표현이나 옷 주름, 보관의 표현 등에서

17세기 중엽 경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한 조각승 혜희의 특징과 조형성이 발견된다.

이 목조보살좌상은 보존 상태가 좋고 조형성이 뛰어나

17세기 불상이나 혜희 유파 연구에 있어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신중탱


불유정


명부전


산신각


@향적당은 종무소를 겸하고 있다.







@대조사석탑

대조사 원통보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에 다른 일부를 찾아 다시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기단(基壇)2층으로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인데,

 탑신의 2·3층 몸돌과 꼭대기의 머리 장식은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기단은 층마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에 받침을 두었는데, 1·2층은 3, 3층은 2단으로 새겨 불규칙한 모습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가운데에서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 이르러 가볍게 위로 들려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비율이 비교적 낮아 안정감을 주고 있는 탑으로,

고려 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대조사 석탑은 9845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용화보전

@용화보전(龍華寶殿) 안에는 적멸보궁과 같이 불상이 없다.

용화보전 안에서 창 밖으로 미륵보살을 바로 친견할 수 있도록 조성한 법당이다.

 미륵하생경에 의하면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한 뒤 567000만 년이 되는 때,

즉 인간의 수명이 8만 세가 될 때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서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하여

3회의 설법으로 272억 인을 교화한다고 하는 보살이다.



 미륵(彌勒)은 마이트레야(maitreya)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자씨(慈氏)라고 번역한다.

이를 용화3(龍華三會)’라 하고, 미륵불의 정토를 용화세계(龍華世界)라고 한다.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 미래에 용화세계에서 중생들에게 설법할 미륵불을 모신다는 의미에서

 미륵전(彌勒殿)이라고도 하며 또. 미륵전을 용화전(龍華殿), 자씨전(慈氏殿)이라고도 한다.

후불탱화는 용화수 아래서 미륵불이 중생들에게 설법하고 있는 정경을 묘사한

 용화회상도(龍華會上圖)나 보관(寶冠)을 쓴 미륵보살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광경을 묘사한 미륵내영도(彌勒來迎圖)가 있지만

대조사 용화보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다. 용화전의 편액은 서주 정광일선생이 쓴 것이다.






신중탱


칠성탱





@보물 제217호 대조사 석조미륵불입상

보물 제217호로 지정된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시대에 유행한 거대한 3대 석조 미륵보살의 하나로

논산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 제323)과는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높이가 10m나 되는 거구이다.

머리 위에는 이중의 보개(寶蓋)를 얹은 네모난 관()을 쓰고 있으며

보개의 네 모서리에는 작은 풍경이 달려있다. 관 밑으로는 머리카락이 짧게 내려져 있는데

 이와 같은 머리 모양은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도 마찬가지이다.

얼굴은 4각형으로 넓적하며, 양쪽 귀와 눈은 크나 코와 입이 작아서 다소 기이한 느낌을 주고 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과 형식적인 면에서 유사하다.

 다만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체적인 비례가 좋고,

 관촉사의 석조 미륵보살과는 달리 하나의 돌을 다듬어 조각하였다는 것과

조성배경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차별된다.



머리 위에는 원통형의 보관과 그 위에 가로로

긴 장방형의 보개(寶蓋 : 보배로운 덮개)2중으로 올려놓았다.

아래쪽의 보개 밑면에는 빗물이 얼굴로 타고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가장자리 부분을 돌아가면서 얕게 파내었다.

네 모서리에는 장식을 매달기 위해 뚫은 구멍이 남아 있으며,

지금도 동령(銅鈴 : 청동 방울)이 매달려 있다.



원통형 보관에는 특별한 문양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 보관과 보개는 보살상과 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원래부터 이러한 형태를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보살의 머리 윗부분과 원통형 보관(寶冠 : 보배로운 모자)이 이어지는 부분이 보수되었으며,

왼쪽 어깨 일부가 부서진 상태이다. 보살상은 약 10m의 크기이다.

 

길쭉한 삼각형에 가까운 조형, 면류관(冕旒冠 : 왕이 쓰던 네모난 모자)

유사한 방형 보개, 원통형 보관 등은 고려 전기에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석조 불상의 특징으로 대조사의 석조미륵불상은

고려 시대 전기의 불상 연구에 있어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보살상은 하관(下顴:광대뼈 아래쪽)이 넓은 방형(方形)의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

부은듯한 눈두덩, 살짝 굽은 콧등, 음각으로 새겨진 콧날, 긴 인중, 작으면서도 살짝 내민 입술,

 얇고 섬세하게 조각된 귀를 가지고 있다. 상호(相好 : 얼굴)는 대체로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이다.




 또한, 정갈하게 빗은 머리카락은 정면과 측면, 뒷면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양쪽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고랑처럼 처리되어 있다.

목에는 한 줄의 음각으로만 표현된 삼도(三道 : 세 개의 선)가 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통견(通肩) 형식의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며,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양손으로 금속제의 연꽃 가지를 잡고 있다.




 5등신(等身)의 신체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폭이 넓어져 안정감을 준다.

오른쪽 팔 뒤로 넘어온 법의 자락은 치켜 올려 늘어진 형상이며,

왼쪽은 손등까지 법의가 흘러내려 오고 있다.




목 뒤를 감고 있는 옷깃의 입체적인 처리와

가슴걸이 영락 장식의 섬세한 표현이 약간의 사실감을 부여해 준다.

 이러한 영락 장식은 고려 석불이나 금동불 등에 흔히 보이는 형상의 영락이다.

 

양어깨를 감싼 옷은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데 매우 투박한 모습이다.

팔의 윤곽은 몸통에 붙여 옷자락으로 겨우 표현되었고,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대어 연꽃 가지를 잡고 있다.

보살상 앞에는 제사 음식을 차려 놓기 위하여 판판한 돌을 마련해 놓았다.

전반적으로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과 함께

동일한 지방 양식을 보여주는 보살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관촉사의 은진미륵은 조성연대가 광종 19(968)이란 묵서기록이 있지만,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명문이나 문헌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조성시기와 그 배경은 알 수 없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방형(方形)의 보개와 원통형 보관, 5등신에 가까운 신체 비례,

부리부리한 눈, 넓은 하관 등을 통하여 볼 때,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모델로 하여

고려 시대 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조사나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과 같이 보관 위에 또 보개를 한 이러한 불상으로는

고려 후기 작품인 익산 고도리석불입상 2(보물 제46)에서도 볼 수 있다.












범종각



@사찰을 가 보면 배롱나무를 십게 볼 수 있다. 사찰에서 배롱나무를 심는 것은

겉치레 없이 알몸으로 서 있는 배롱나무처럼 가식없이

순수한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 떳떳하게 살라는 의미가 있고,

 해마다 껍질을 벗는 배롱나무처럼 출가한 수행자들도

속세의 욕망을 벗고 정진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속인들의 사당이나 묘소에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잡귀를 쫒아낸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배롱나무는 중국 남부가 고향이며, 고려 말 선비들의 문집인 보한집이나

 파한집에 꽃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적어도 고려 말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중국 이름은 당나라 장안의 자미성에서 많이 심었기 때문에 자미화(紫微花)’라고 했다.

자미화는 보라색 꽃이지만 붉은 꽃도 흔하고 흰 꽃도 가끔 만날 수 있다.

배롱나무는 꽃이 3달동안 오래 핀다고 하여 백일홍나무,나무백일홍이라 불리기도 한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에 있는 배롱나무로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고 하며 수령은 800년이 넘는다고 한다.

 배롱나무의 꽃은 먹기도 하며 민간요법으로 백일해,

월경조절, 대하증, 불임증, 소아기침 등 약초로 이용된다.


대조사를 나오는 길에 만난 능소화. 담장을 타고 흘러내리는 능소화만 보다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 나무 전체가 마치 능소화 나무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