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31. 18:11ㆍ국내 명산과 사찰
한미산(漢美山) 흥국사(興國寺)
흥국사(興國寺)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고양 덕양구의 한미산 기슭에 있으며, 본·말사 체계에 속해있지 않은 조계종 직할교구이다.
한미산은 북한산 숨은벽 쪽으로 오르다 보면
우측에 보이는 산이 노고산(老姑山)인데 이 산이 한미산(漢美山)이다.
산명(山名)이 바뀐 이유는 흥국사 <만회회비기(萬日會碑記)>에 의하면
「산명을 한미(韓美)로 바꾼 것은 노고(老姑)의 소리를 옮긴 것이요 별다른 의미는 없다」 고 했다.
(노고(老姑)는 민가에서 ‘할미’라 함으로 이를 ‘한미’라는 소리로 옮긴 것이라 본 모양이다.)
@만일회비(萬日會碑)
2014년 6월 9일 고양시의 향토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의병운동이 활발했던 흥국사에 있는 비석으로
당시 만일 동안 법회를 여는 만일회의 역사를 기록한 비문이다.
#만일회(萬日會)는 정토종(淨土宗)에서 하는 불교 행사의 하나로,
극락세계 아미타불회(阿彌陀佛會)에 재생하기를 기원하고
천일(千日) 또는 만일(萬日)간을 큰 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도를 닦는 것을 말한다.
한국에서도 신라 경덕왕 6년(747)에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서 2백여 명이 모여 만일회를 열고,
혜공왕 11년(775)에 마쳤는데, 건봉사의 등공탑비(서기782년 작)에 의하면
그중 31명의 승려가 서방 극락세계를 향하고 앉아 열반에 들어갔다 한다.
조선 후기에 다시 미타신앙이 성행하면서 만일회도 부흥되어
건봉사 · 망월사(望月寺) 등에서 세 번이나 열렸다고 한다.
흥국사 창건 내력을 보면 신라 문무왕 1년(661년)에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여 흥서암(興瑞庵)라 하였다.
원효가 한산(漢山)의 원효대에서 수행을 하던 어느 날,
서쪽 산기슭에서 3일 동안 서기(瑞氣)가 일어 찾아가보니,
현 약사전 자리에서 약사여래좌상이 솟아나 방광하고 있었으므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흥서암이 흥국사로 암(庵)자가 사(寺)로 바뀌것은 조선 영조 때라고 한다.
그후 1,000여 년 동안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다가,
조선 숙종 12년인 1686년에 중창하면서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조46년(1770년)가 세모에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인 소녕원(昭寧園)에 다녀오던 길에
이 절에 들렀다가, 대설(大雪)을 만나 머물면서 버들가지로
「朝來心有喜 尺雪驗豊徵(아침나절에 기분이 상쾌하더니, 한 자 눈이 내려 풍년을 예고하네)」의
5언시귀(詩句)를 직접 지었고, 또 <약사전(藥師殿)>의 편액까지 친필로 내려주면서
숙빈 최씨의 원찰로 삼으면서 영조와 정조 대에 크게 발전했다.
1785년(정조 9) 당시 남북양산성(南北兩山城)의 승도대장(僧都大將)이었던
관선(觀禪)과 법헌(法軒)이 중창하였고,
1867년(고종 4) 뇌응(雷應)이 약사전을 중건하였으며,
1876년 칠성각(七星閣), 1902년에는 나한전(羅漢殿)과 산신각(山神閣)을 창건하였다.
1904년 10월에는 완해(玩海)를 회주(會主)로 하여 만일회를 열었다.
1913년에는 이 모임을 주도하였던 해송(海松)·뇌응·풍곡(豊谷)·호봉(虎峰) 등
여러 승려들이 새로운 건물을 짓고 대가람(大伽藍)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대방
현존하는 당우로는 약사전·미타전·칠성각·산신각·선원·승방·객실 등과
최근에 콘크리트로 지은 일주문(一柱門) 등이 있다.
보물급 문화재는 없으나 약사전의 현판은 영조의 친필이며,
약사전 안에는 약사여래상과 정조 16년에 제작된 약사후불탱화가 있다.
극락구품도와 괘불 탱화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약사전과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은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칠성각을 고쳐 지은 나한전이 고양시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가운데 극락구품도는 전체 그림을 아홉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극락을 묘사한 그림이다.
범종각
법당에 참배객이 많아 흥국사 뒤 한미산을 잠시 둘러 보았다.
숲속에 앙증맞은 동자상이 있어서..
뒤편 산을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흥국사로 내려왔다.
모양은 승탑인데 앙련이 물받이로 되어 있어 수각인 것같다.
원이삼점을 그려놓은 이 당우는 요사채인 모양이다.
삼성각
치성광여래를 목각으로 조성해 놓았다.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 협시로 두고
위쪽에 화불형으로 7성군을 부조해 놓았다.
독성
산신탱
명부전
일반적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둔 지장보살을 모시는 데
흥국사는 지장보살 한 분만 불상를 조성하고 후불탱화로 보완하고 있다.
감로탱
탑 뒤 전각은 약사전이고, 좌측은 나한전이고 우측은 명부전이다.
최근에 조성된 5층석탑이다. 2단 기단으로 탑신부도 상륜부도 별도 장식이 조각되어 있지 않은
단아한 작품이다. 각층마다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탱주는 기단부에만 하나다.
약사전에는 본존불로 약사여래를 모시고 그 옆예 천수관음을 모셨다.
고양 흥국사 약사전(高陽 興國寺 藥師殿)은 1985년 6월 28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이 약사전은 대웅전처럼 흥국사의 주불전 역할을 하고 있다.
흥국사는 신라 문무왕 1년(661) 원효대사가 절을 짓고 흥서암이라고 이름했다.
조선 숙종 12년(1686) 절을 다시 지었고,
조선 영조 46년(1770년)에는 이 절의 약사불이 나라를 흥하게 한다고 하여
절 이름을 흥국사로 고치고 약사전을 보다 크게 짓게 하고
궁궐의 상궁들이 번갈아 머무르면서 선학을 공부하도록 허락했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기 漢美山興國寺萬日會碑記>라는 비문과
<봉은본말사지 奉恩本末寺誌>의 사적기에 의하면
영조가 1707년에 숙빈 최씨의 묘인 소녕원(昭寧園)에 가다가
이곳에 행차하여 약사전의 편액을 써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후기인 고종 4년(1867) 승려 뇌응(雷應)이 약사전을 다시 세웠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수리해 왔다.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정면의 기둥머리에는 용 조각의 안초공이 창방과 평방에 직각방향으로 놓여 결구되고,
내부에도 대들보 위에 직각방향으로 놓여
합각부의 하중을 받아 측면 평주와 대들보에 분산시켜주는
충량의 머리에 용 조각과 공포의 조각이 잘 어우러져 있다.
나한전
고양 흥국사 나한전(高陽 興國寺 羅漢殿)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1999년 2월 1일 고양시의 향토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흥국사 본전인 약사전에서 보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한전은
약사전에 비하여 규모가 약간 작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다.
나한전은 잘 다듬어진 화강석의 기단 위에 4개의 배수구가 있는 직사각형의 초석을 두르고 있으며,
정면 가운데 계단을 두었다. 나한전은 광서 4년(1878)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기둥은 배흘림이 거의 없으며
머리에는 평방과 창방을 돌리고 그 위에 여러개의 공포를 짜 맞춘
맞배지붕 건물로 19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은 매우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의 문살로 장식되었으며
건물의 측면은 단청을 한 방풍판이 있으나 특별한 문양이나 조각은 보이지 않는다.
나한전 안에는 1832년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탱화가 보관되어 있다.
원래 나한전 정면에는 초서체로 쓴 뛰어난 필체의 칠성각이라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이 현판은 조선조 후기의 김성근이 소나무판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 법당에 나한을 모신 관계로 나한전이란 현판으로 바꾸고
건물의 명칭을 나한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고양 흥국사 설법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高陽 興國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은
조선시대의 불상이다. 2001년 9월 17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이 불상은 자그마한 몸집을 하고 있다.
불상의 머리는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한 머리형태를 하고 있으며,
얼굴은 평편하게 깎은 후 눈, 코, 입 등을 조각하여 다소 평면적이지만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 부드러운 인상을 풍긴다.
두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양 무릎 위에 올려 놓고
다리는 결가부좌한 자세이다.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은
자연스럽게 흘려내려 차례로 계단식의 주름을 만들고 있다.
이 목조여래좌상은 얼굴의 표현이나 옷주름, 조각수법 등에서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불상양식을 보이고 있고
1758년에 보수한 기록으로 보아 18세기를 전후한 불상으로 생각된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매우 부드러운 느낌의 이 불상은 조선 후기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극락구품도
흥국사의 이 불화는 19세기에 조성된 아미타구품도(阿彌陀九品圖)로
화면 전체를 9등분하여 극락極樂)의 세계를 묘사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의 성행과 극락의 세계를 가시화한
아미타계 불화로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1991년 10월19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어있으며 설법전에 봉안되어 있다.
세로 146㎝, 가로 205㎝의 크기로 화면 전체를 9등분하여
극락정토의 아미타회상(阿彌陀會上) 장면과 극락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극락왕생(極樂往生)장면을 각 구역에 나누어 그렸다.
이러한 형식은 19∼20세기 서울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는데
9개의 사각형 안에 각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불화는 19세기부터 서울·경기지역을 중심으로 불화의 특징적인 구도법이라 할 수 있다.
9장면은 도상은 크게 아미타극락회상(阿彌陀極樂會上)과 극락에 태어나는 왕생(往生)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가장 윗단의 중앙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大勢至菩薩),
그리고 많은 성중들을 그리고 있는 아미타극락회상도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 좌우로는 보살중과 비구중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그 아랫단의 중간부분은 ‘수마제(須摩提)’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 전각이 있다.
‘수마제’는 안락(安樂)이나 극락(極樂)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sukhavati’를 음차한 것으로 극락전을 뜻한다.
(본방 팔공산 동화사 수마제전 참조)
그 옆으로는 연지(蓮池)에서 왕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극락의 왕생은 보통 상품(上品)에서 하품(下品)에 이르기까지 9품으로 왕생하고 있는데
흥국사본의 도상은 어느 품으로 도상화하고 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내원암(內院庵)소장 『십육관경(十六觀經)』의 16관의 도상이 참고가 된다.
『십육관경』은 조선시대 16세기판본부터 간행되었는데 현존하는 판본은 대부분 19세기 판본이다.
내원암 판본을 비롯한 『십육관경』은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를 한 장면씩 묘사한 것으로
묘사된 변상 옆으로는 해당 내용을 기록하여 어떤 내용을 도상화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와 비교해보면 흥국사본은 위로부터 아래로 세 번째 중앙이 상품의 왕생을 묘사한 것이며
왼쪽부분 두 부분이 16관의 하품, 오른쪽 두 부분이 15관 중품을 도상화 한 것으로 살펴볼 수 있다.
흥국사 극락구품도는 조선말기 아미타신앙의 성행과 관련하여
극락정토를 꿈꾸고 극락왕생하는 모습을 도상화한 불화이다.
불화의 화기부분이 없어 조성시기와 화사를 알 수 없지만
주제와 양식적 특징을 감안해볼 때 이 불화 역시 19세기말∼20세기초반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흥국사 괘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9호. 면 바탕에 채색. 세로 628㎝, 가로 381㎝.
흥국사에 봉안된 야외의식용 대형 불화인 괘불도(掛佛圖)이다.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비(淳妃) 엄씨(嚴氏)가 발원하고 왕실이 시주자가 되었다.
순비 엄씨는 상궁으로 궁궐에 입궁하여 황귀비(皇貴妃)의 지위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로 조선 말기 많은 불사를 후원하였다.
이 괘불 조성이 끝나고 엄씨의 후원으로
영친왕의 안녕을 위한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만일염불회는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기원하는 의식이다.
괘불도의 도상(圖像)은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불과
협시보살인 관음·대세지보살, 가섭·아난존자와 문수·보현보살의 7존상을 그린
아미타괘불로 당시의 불교 신앙이 반영되었다.
불화 제작은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까지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경선 응석(慶船 應釋)과 12명의 화승(畫僧)들이 담당하였다.
아미타불과 관음·대세지보살의 아미타삼존을 화면 중심에 크게 배치하였고
가섭과 아난존자를 화면 중반 아래쪽에 작게 배치하였다.
그리고 화면 하단에 청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동자형의 모습으로 그렸다.
주존인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길게 내려 극락에 왕생(往生)하는 자를 맞아들이는
내영인(來迎印)의 수인(手印)을,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결하였다.
관음보살은 보관에 화불(化佛)이 그려져 있고 손에는 모란꽃을 들었다.
관음보살의 목 아래쪽으로 모란꽃과 연꽃을 교대로 배치한
장식의대(裝飾衣帶)가 내려와 화려한 느낌을 준다.
한편 대세지보살은 정병이 표현된 보관을 쓰고 연꽃을 들었다.
삼존의 배치에서 관음과 세지보살의 상체가 주존인 아미타불의 양팔을 가림으로써
주존이 뒤쪽에 배치된 것 같은 효과를 주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삼존불의 중간쯤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삼존보다 작게 그려졌는데
가섭은 노비구의 모습으로 두 검지를 맞대고 있고
아난존자는 젊은 승려형의 모습으로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하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동자형으로 그린 문수보살이 연꽃을 들고 청사자를 타고 있으며
보현보살은 흰 코끼리를 타고 앉아 여의(如意)를 들었다.
흥국사 괘불의 도상은 아미타삼존을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존자, 문수·보현이 등장하는 아미타칠존도이다.
19세기 말 서울과 경기 지역에는 아미타 정토신앙의 유행으로 아미타괘불이 성행하게 되었다.
석가모니불의 제자인 가섭과 아난존자, 문수와 보현보살은 주존불의 도상과 관계없이
아미타계 불화에 삽입되었으며 문수와 보현보살은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동자형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아미타불이 오른손을 길게 내려 내영인(來迎印)을 취하고 왼손은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취하고 있는 도상은 1853년 삼각산 내원암에서
중봉 혜호(中峰 慧皓)가 판각하여 간행된
『아미타경요해(阿彌陀經要解)』의 권두(卷頭) 변상에서 같은 모습이 표현되어 있어
이 도상의 전거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아미타칠존을 묘사한 아미타괘불은
고양 흥국사 괘불을 비롯하여 20세기 초반 이후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다수 조성되어
이 시기 아미타괘불의 전형적인 도상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고양 흥국사 괘불의 바탕천으로는 면(綿)이 사용되었다.
화면 양쪽에 30㎝ 가량의 면과 그 안쪽에 103㎝의 면 세 폭을 잇댄
총 5폭으로 불화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 불화에서는 수입산 면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개항 이후 구매력있는 왕실이나 경제적 상류층 등이
수입산 면제품을 구매하여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괘불은 영산회상도·미륵보살도·비로자나불도 등이 주로 조성되며,
아미타불화는 극히 드문 편이다.
19세기를 중심으로 경기도 일대의 사찰에 소장된 불화는
아미타불화가 많이 제작되는데, 국내·외 정세가 혼란했던 시기 때문으로 보인다.
앞면 편액은 불이문이고, 뒤면 편액은 해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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