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6. 22:06ㆍ국내 명산과 사찰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槐山院豊里磨崖二佛並坐像)과 다보여래
우리나라는 석불은 많이 발견되지만, 감실 안에 조각한 마애불은 드물다.
자연의 암산에 석굴을 파서 승원을 짓거나 탑당을 세우는 일은
인도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건너와 육조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 대표인 것이 윈강석굴[雲崗石窟]과 룽먼 석굴[龍門石窟] 등을 꼽을 수 있다.
경주 석굴암보다 1세기가 앞선 것으로 알려진 군위 삼존석굴(국보 제109호)과 같이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 이미 이러한 석굴사원이 조성된 예는 일지만,
중국과 달리 굴의 개착이 쉬운 사암(砂巖)이나 석회암보다는
화강암이 대부분이어서 석굴의 개착(開鑿)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용문석굴)
따라서 바위 면을 약간 파고 들어가 그곳에 불상을 새긴 불감(佛龕)의 형태나
노천의 마애불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일부 마애불의 경우는
목조가구를 설치해 더욱 본격적인 석굴사원의 형식을 취했던 곳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연대가 올라가는 석굴로는 전술한 군위삼존불(국보제109호)과
경주 석굴암(국보제24호)이 있고, 태안마애삼존불(국보 제307호)과
서산의 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 경주 근교 단석산(斷石山)의 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 등이 있다.
마애불로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제1401호)을 들 수 있다,
이 불상들은 대체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로 추정되는 것으로
마애석불의 시원을 이때쯤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군위삼존불석굴)
이후 보다 본격적인 마애석불의 예는 경주 남산에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불곡(佛谷)의 여래좌상(보물제198호)을 위시해 탑곡(塔谷)의 사방불(보물제201호),
칠불암(七佛庵)의 마애불상군(국보312호) 등이 그 예이다.
고려 시대에는 더욱 많은 마애불을 볼 수 있는데 전국적인 확산분포와 대형화가 그 특징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북한산 승가사의 여래좌상(보불제215호), 법주사의 마애여래의상(보불제216호),
대흥사 북미륵암의 여래좌상(국보제308호), 천안 삼태리의 여래입상(보물제407호) 등이다.
이 마애불들은 그 시원이 중국에 있다 할지라도 조각기법이나
표현의 독자성 등에서 한국적인 불상표현의 한 갈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괴산 원풍리마애이불병좌상 보물 제97호)
그러나 이들 마애불상은 독존불이나, 삼존불 내지 불보살 군(群)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2불이 마애불로서 나란히 조각된 것은 괴산원풍리마애불병좌상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불병좌상(二佛並坐像)은
통일신라 시대의 청송 대전사(大田寺)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지는 청동이불병좌상과
(대전사청동이불병좌상)
황룡사지(皇龍寺址) 출토 금동이불병좌상,
(황룡사지 금동이불병좌상)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보협인석탑(寶篋印石塔)에 새겨진 이불병좌상 등 약 7점 정도가 확인된다.
또한 785년∼794년 동안 발해의 수도로 5경 중 하나였던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옛터에서 8구 이상의 이불병좌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마애불은 아니고 금동 혹은 흙으로 빚은 이불병좌상이다.
소백산 비로사 적광전에도 유일하게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이불(二佛)이 봉안되어 있지만 역시 마애불은 아니다.
(보물 제97호 괴산원풍리마애이불병좌상)
괴산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槐山院豊里磨崖二佛並坐像)은
고려 시대 조성된 것으로 높이 12m의 가파른 암벽에 세로 363㎝, 가로 363㎝의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병좌한 불상 2구와 화불 등을 돋을새김으로 조성된 마애불이다.
원래는 괴산원풍리마애불좌상으로 불리다가
2010년 괴산원풍리마애이불병좌상으로 바뀌고 보물 제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불병좌상이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견보답품(見寶塔品)」의 내용 중
석가불(釋迦佛)이 다보불(多寶佛)과 다보탑(多寶塔) 안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도상화한 불상을 일컫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모처럼 기대하고 간 원풍리이불병좌상은
무엇을 보수 하는지 몰라도 보수 중이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가려진 곳을 고려하여 인터넷에 올려진 옛적 사진과 비교하여 살펴보면
우측불상
좌측불상
우측 불상은 얼굴이 길쭉한 장방형이고 왼쪽은 사각형으로 두 분 모두 가는 눈에 다문 입으로
삼도는 뭉개져 구분하기가 어렵다.
옛날 사진에는 왼쪽 불상의 코 부분에 네모나게 파 놓은 흔적이 있는 데
현재의 모습은 코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별도로 만들어 끼운 것으로 사료 된다,
우측의 다보여래는 본래 그 형상이 일정치 않아 알 수 없지만,
석가모니불로 추정되는 좌편 불상은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석가모니상을 많이 닮았다.
(석가모니불/영국제국박물관소장 )
@두 불상의 가사는 모두 통견(通肩)으로 좌측 불상은
왼쪽 어깨 위에 걸쳐진 대의(大依) 끝단에 주름이 선명하고,
오른쪽 불상은 같은 통견이면서도 <U> 자 형을 이루고 있다.
가사의 흐름으로 보아 승각기(僧却崎)가 보임직 하지만 마모가 되어 알 수 없다.
두 불상 모두 그 형상이 넓적하며 평면적인 얼굴로 가는 눈,
뭉툭한 코, 꽉 다문 입 등이 묘사되어 있고, 대체로 건장한 인상을 준다.
좌측 불상은 넓은 어깨와 굵은 팔로 인해
매우 강건해 보이며 가슴은 평면인 데 반하여
우측 불상은 가슴이 들어가서 움츠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두 손의 위치는 마모되어 수인을 판독할 수 없다.
@두 불상 모두 구멍(벌집풍화, honey-comb)이 감실 안팎으로 여러 개가 있고
얼굴에는 총탄을 맞은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두 분의 머리에는 수십 기의 구멍이 나 있는데
바위의 특성상 암석이 마모되어 빠져나간 것으로 보이며,
좌측 불상의 턱 아래는 완연한 총탄 자국으로 보인다.
복부 아랫부분은 마멸이 심해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불상 좌우의 좁은 여백에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보살상 같은 것이 새겨져 있고,
머리 주위에는 각 5구씩의 화불(化佛)이 희미하게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불상의 군데군데에는 채색을 가했던 흔적도 엿보인다.
이불병좌상은 중국에서는 북위 시대, 특히 5, 6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나,
우리나라에는 그 예가 많지 않다. 이불병좌상이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견보답품(見寶塔品)」의 내용 중 석가불(釋迦佛)이 다
보불(多寶佛)과 다보탑(多寶塔) 안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도상화한 불상이다.
(북위 금동이불병좌상)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중국에 소개된 것은 2세기경이지만
유행은 5세기경으로 이불병좌상 역시 북위 시대 이후부터 활발히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3대 석굴인 운강석굴, 돈황석굴,
용문석굴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이불병좌상이 확인된다.
현재 프랑스 기메박물관에 소장된 북위 시대 제작의 금동이불병좌상은
당시 북위 불상의 양식과 이불병좌상의 모습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발해의 이불병좌상)
벽화나 회화로 조성될 경우 석가불이 영취산에 행하는 모습과 함께
다보불이 등장하며, 또 칠보탑 안에 나란히 앉은 모습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불상으로는 상징적으로 두 구의 불상만 나란히 배치한다.
(통도사 다보탑벽화)
@이불병좌상에 등장하는 다보여래(多寶如來)는 동방 보정세계(寶淨世界)의 교주로
보살로 있을 때, “내가 성불하여 열반에 든 뒤에, 시방세계(十方世界) 어느 곳이든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는 나의 보탑(寶塔)이 솟아 나와 그 설법을 증명하리라”라고 서원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역시 보탑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동방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다보여래/막고굴의 259굴)
다보불(多寶佛)은 범어로는 프라부타라트나(Prabhutaratna)이며 번역하여
다보(多寶) 또는 대보(大寶)라 한다.
통상적으로는 다보여래(多寶如來) 또는 다보불(多寶佛)이라 한다.
이 부처님이 무한한 과거시에 보살 행자로 있을 때 크나큰 서원을 세우기를
「내가 장차 성불하여 중생들을 제도하고 마침내 입멸하게 되면
온몸 그대로 사리가 되어 어떠한 부처님이든
법을 설하는 장소에는 반드시 출현하여 그의 설법을 증명하리라.」라고 하였다.
(흥천사 다보여래)
그리하여 수많은 부처님이 출현하여 법을 설할 때마다
보탑(寶塔)의 모습으로 솟아올라 이를 증명하였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할 때도 적문삼주(迹門三周)의 정종분(正宗分)을 마치고 이어서
그 유통분(流通分)을 설하려 하자 홀연히 땅속에서 다보불의 전신이 그대로 사리가 되어 출현,
그 설법을 증명하였다. 즉 다보불의 전신 그대로가 화석(미이라)이 되고
그 화석을 안치한 하나의 보탑이 땅속에서 솟아오른 것이다.
( 영은사 다보여래/중국 항저우)
그리고 그 탑 속에서 다음과 같은 찬탄의 음성이 새어 나온다.
「거룩하시고 거룩하시도다. 세존이시여,
능히 평등한 큰 지혜로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시며,
부처님께서 보호하고 생각하시는 그것으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시니,
이처럼 세존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진실이어라.」
(영은사 다보여래/중국 항저우)
한편 다보불은 일정한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항상 석가모니 부처님과 다보불은 동일한 연화대에 나란히 앉게 된다.
따라서 다보불의 전신사리를 봉안한 보탑, 즉 다보탑은 언제나 석가탑을 쌍으로 안치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경덕왕 10년 (751년)에 김대성이 세운 불국사의 다보탑(국보 제20호)이 유명하다.
불국사 다보탑 국보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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