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상운사

2019. 8. 28. 21:47국내 명산과 사찰

북한산 상운사

북한산 상운사 가는 길은 원효봉에서 내려오는 길과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에서 보리사 법당 뒤편 등로로 따라 올라가는

 두 가지 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

 오늘은 예정에 없던 흥국사를 들리는 바람에 보리사 쪽으로 오르는 코스를 택했다.

상운사 가는 길이라 잠시 쉬어갈 겸 보리사 대웅전을 둘러 보았다.

보리사(菩提寺)는 사()라기 보다는 암자다.

당우라야 겨우 대웅전이 전부다. 무더운 날씨 탓인지 오늘따라 등산객도 그리 많지 않았다.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상운사(祥雲寺) 입구다. 상운사는 돌장승이 양쪽 입구에 세워져 있다.

2기의 돌장승은 <입차문내(入此門內)> <막존지해(莫存知解)> 라는 글로

사찰의 표지석과 일주문 역할을 함께 하고 있다.

옛적에는 나무장승으로 세워놓았는 데 석장승으로 바뀌었다.

해석하면 이 문을 들어서면 아름알이는 놓아라는 의미다.

지식, 지혜를 놓으면 어떻게 사물을 분별하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지혜(智慧)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객관적 과학적 고찰로 통하여 오감(五感)으로 얻어지는 지식(knowledge)이다.

 이런 지식은 시간이 개입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경험으로 얻어지는 지혜(知慧: wisdom)이다.

여기에는 공간이 개입되어 있다.

그런데 불교는 여기에 오감에 의한 것도, 경험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닌

선정(禪定)과 같은 방법으로 얻어지는 증오(證悟) ,

시공(時空)을 초월한 반야(般若 prajna)의 지혜를 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막존지해>의 해()는 반야가 아닌 지식과 그런 지혜를 놓아라는 의미다.

()은 세속(世俗)과 비속(非俗)의 경계를 의미한다.



@상운사(祥雲寺)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북한산 원효봉 남쪽에 있는 조계사의 말사이다.

북한산이란 산명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고려시대에 축성(築城)한 중흥산성을 보수축하였는데

이후 한성의 북쪽이라는 의미에서 북한산(北漢山)이란 산명을 별칭으로 사용해 오다가,

일제 강점기 이후로 점차 북한산(北漢山)이란 산명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상운사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삼천사(三千寺)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자세한 기록을 없다.

상운사는 1711(숙종 37)년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산성 수비를 위해 승군(僧軍) 주둔시키고자 창건한 13개 승영사찰(僧營寺刹) 중 하나다.

 

조선 중기 이후 승병들이 머물렀던 상운사의 창건과 관련된 내용은 몇 가지 자료에 수록되어 있는데,

먼저 1745년 간행된 北漢誌에 의하면 상운사는 북한산성 축조 후 건립된 11개의 사찰 중 하나로

 1722년 창건되었다고 적혀 있고, 1943년 안진호(安震湖)가 편찬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상운사의 원래 이름은 노적사(露積寺)이며,

조선 경종(景宗) 2년인 임인년(壬寅年, 1722)에 승병장 회수(懷秀)가 창건하였다.

 건물이 총 133칸이나 되는 거찰(巨刹)이었으며

영조(英祖) 21년 무렵 상운사로 개칭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운사극락전중창기에도 태월지총스님이 1813(순조 13)

극락전 중창을 기념하면서 지은 것으로 1722년 회수스님에 의해 창건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1745년 성능(聖能)스님이 편찬한 북한산성 지리지인 북한지 北漢誌의 상운암 조에

 상운암은 영취봉 아래에 있다.

 133칸의 규모이며 승() 회수(懷秀)가 창건하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 후 625 이후에 폐허가 된 것을 명선(明煽) 화상이 중창하였고

이후 1980년대에 법당을 중건하고 요사채를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천불전, 약사굴, 불음각, 요사채 2동이 있고,

유물로는 석조 약사여래와 고려 중기에 세워진 석탑의 부재를 모아 복원한 삼층석탑,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지방문화재 제190호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삼존불이 있다.


@불음각(佛音閣)

2층의 누각(樓閣)으로 되어 있을 때는 범종루라 하고,

불전사물 가운데 범종만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범종각이라고 한다.

이들은 소리로써 불음(佛音)을 전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범종각 대신 불음각이라 칭하는 사찰도 있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소리의 종이라는 뜻이다.

그 상징적인 의미는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한다는 것이다.

 큰 사찰이면 불전사물(범종, 법고, 운판, 목어)을 다 갖추고 있지만,

규모가 작은 사찰이라도 범종만은 반드시 비치하게 된다.

이 당우는 산문(山門)을 들어서서 좌측 편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다.

상운사는 일주문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경내에 들어서서 왼쪽에 불음각을 조성해 놓았다, 이 범종은 1987년에 주조된 것이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1983년에 중건되었다.

대웅전은 전면의 각 칸에 사분합의 문을 달았으며, 외벽에는 십우도를 그려 장엄하였다.

전면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은 화엄경(華嚴經)6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에 나오는 내용으로 그 내용과 뜻은 다음과 같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부처님의 법신 법계에 충만 하사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일체중생 앞에 널리 나투시니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 인연 따라 나아감에 두루 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 언제나 이 보리좌에 앉아 계시네.


 



  

대웅전 내부에는 금동으로 조성한 석가, 약사,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약사여래의 지물로 상징되는 약호(藥壺:약병)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마곡사 대웅보전에 모신 삼존불과 동일하다.


신중탱

법당에는 석가모니 후불탱, 지장시왕탱, 신중탱, 칠성탱 등 4점의 탱화를 봉안되어 있고,

이는 모두 건물의 중건에 맞추어 1982년에 조성되었다.


칠성탱


지장탱




@대웅전 옆에 있는 이 향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넘는다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아이를 못 낳은 여인들이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는다고 한다.


@삼층석탑(三層石塔)

대웅전과 약사굴 사이에 서 있는 이 탑은 고려 시대 석탑부재를 모아 1999년 복원한 것이다.

높이는 455cm이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보개와 보주 등이 남아 있어 대체로 완전하지만,

탑신부는 면석이 훼손되고, 옥개석은 파괴되어 있다.



기단부는 2단이지만 엉성하게 보인다. 이중 기단은 상대, 하대 갑석이

모두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탱주는 한 개만 보인다.

이는 곧 신라 시대가 아닌 고려 시대 이후로 추정되는 자료가 된다.



또 상대갑석과 하대갑석은 각기 1매씩의 면석이 훼손되어 있다.

초 층 탑신에는 감실을 마련하였고, 탑신석을 바치는 탑신괴임대를 앙련석(仰蓮石)으로 끼워 놓았다.

옥개석은 4단의 층급받침을 마련하였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조금 가파르다.





 이 석탑은 2단 기단에 삼층석탑이라는 통일신라 시대 전형석탑의 양식을 띄고 있으나,

초층탑신에 감실을 마련한 점과 양련석의 탑신괴임대를 끼워 놓은 것,

탱주가 하나인 점을 감안할 때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시대 중기 석탑으로 추정된다.




@상운사 마애불(磨崖佛)

삼층석탑이 있는 옆 밭에서 조금 올라가면 3기의 승탑(부도)이 있고

그  승탑이 있는 곳에서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암벽에 마애불 1기가 조성되어 있다.



암벽에 저부조로 선각 된 마애불은 결가부좌한 자세로

두 손을 맞잡은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다.

선정한 두 손 위에 약합 같은 형상이 보이는 데 선각이 뚜렷하지 않아 약합인지 단정할 수는 없다.

만약 약합이라면 이 마애불은 약사여래가 된다.

머리는 보관을 쓰고 있는 듯 보이는데 분명하지 않다.

광배는 배모양의 거신광(몸광배)을 하고 있다.




불상 주위에는 방형의 홈이 뚫려 있어. 건립시

목조전실(木造前室)의 가구(架構)를 설치한 것이 아니었나 추측할 수 있다.

정교함이 보이지 않는 단조로운 조각 솜씨와 단지 선만으로 부조된 주형광배 등

그 표현된 조각수법으로 보아 이 마애불의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 후기로 추정된다.




@약사굴(藥師窟)

약사전(藥師殿)이 아닌 약사굴(藥師窟)로 편액이 붙어 있다.

굴 안에는 석조약사여래와 산신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

조선전기 작품으로 밝혀져 있으며 석불의 높이는 109cm이다.

약사굴의 주불인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앙련과 복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얼굴은 턱이 길고 입의 인중이 짧고 이목구비가 가운데로 쏠려있으나

 전반적으로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에는 삼도의 표현이 있고,

가슴이 넓게 열린 대의를 걸치고 있다. 대의의 주름은 직선적이고 간략화되어 있으며,

가슴 부근에는 군의의 띠 자락이 가늘게 배 앞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오른 무릎 위에 살짝 내려 촉지인을 취하고,

 왼손 손가락은 보수된 것 같으며 배 앞에서 선정인을 취하고, 그 위에 약합이 올려져 있다.

이 불상은 하부에 조상기문을 남기고 있는데,

약사굴에 봉안할 당시 절에서 찍어 놓은 사진에 의하면

홍치(弘治) 10, 1497(연산군 3)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불화들은 1988년에 조성된 것이다.

이 석불은 조선 초기 불교 조각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천불전 법당



@천불전(千佛殿)

천불전은 콘크리트 2층 건물로 근래에 건립되었다. 1층은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불단 중앙에 조선 후기의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뒤쪽으로는 금동으로 조성된 소형의 여래불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좌측에는 별도로 아미타삼존불입상을 봉안하고 있다.

지장보살의 지물은 정형적인 육환장이지만

관음보살은 허리를 구부리고 연꽃을 담은 화분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운사 천불전의 이 아미타삼존불은 대좌의 조상기에 따르면

1713(숙종 39)에 조성된 불상임을 알 수 있고,

1730(영조 6)에 개금이 한차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목조아미타불삼존불 좌상은 본존과 대세지보살은 조각 수법이 같고,

관음보살은 크기와 조각 수법이 다르다.

이는 원래 천불전에 봉안되었던 관음보살상이 도난당하여

도난당한 불상을 대신하여 주지스님께서 원불로 모시고 다니는 불상을 모셔놓은 것이라고 한다.


아미타여래 

본존인 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 61cm의 목조불상으로

신체에 비하여 약간 얼굴이 크고, 어깨를 당당히 펴고 고개를 앞으로 숙여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나발(螺髮)이 촘촘하고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 육계가 솟아 있으며,

이마 위에 반원형의 중앙계주(中央髻珠)와 머리 정수리에 원통형의 낮은 정상계주(頂上髻珠)가 있다.

 둥근 얼굴에 가늘고 길게 뜬 눈, 원통형의 코, 미소를 머금은 입 등과 목에 삼도(三道)를 가지고 있다.

 대의자락이 오른쪽 어깨에 걸쳐 반달 모양으로 접힌 후 팔꿈치와 배를 지나

 대의자락 일부가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자락은 어깨에서 수직으로 내려와

반대쪽 대의자락과 U자형으로 겹쳐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은 파도가 일렁이듯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으며,

왼쪽 허벅지 밑으로 길에 늘어진 대의 끝단은 연봉우리형을 하고 있다.

대의 안쪽에 복견의(覆肩衣)를 입고, 가슴을 가린 승각기(僧脚崎)를 수평으로 접고 있다.

뒷면은 목 주위에 대의를 두르고, 앞쪽에서 넘어온 대의 자락이 길게 연판형으로 늘어져 있을 뿐이다.

두 손은 따로 만들어 손목에 끼웠고, 가슴 앞에서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아미타 수인을 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아 균형 잡힌 느낌을 주는 조선 후기의 뛰어난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세지보살 

대세지보살 좌상은 본존불과 거의 흡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

그다지 높지 않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상투를 틀고 있는데 두 갈래를 묶은 쌍계형이다.

왼손은 가슴 앞까지 들어 올렸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서 설법인을 취하였다.

조성연대는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1713(숙종 39)에 조성되었다.

관음보살 

관음보살좌상은 보살상의 바닥 밑면에는 종이를 바르고 그 위에 묵서로 개금기를 적어 놓았는데,

 이에 의하면 조상 하한연대가 1800(정조 24)에 해당하는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보살상의 얼굴은 방형에 가까우며, 각지고 뭉텅하게 처리한 코,

입가를 살짝 눌러 미소와 볼의 양감을 표현하고 있다.

대의는 가슴에서 좁게 열려 앞선 시기의 불상과 일단의 양식변천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직선적인 선의 처리, 움츠려 있는 모습,

협소한 어깨 등에서 17세기 후반경부터 유행하는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불전의 신중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