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14. 22:02ㆍ국내 명산과 사찰
남원 지리산 실상사 제2부
남원 지리산 실상사의 창건주이며 실상산문의 개산조인 홍척국사는
신라 후기의 스님으로 헌덕왕 때(809~ 825) 당나라로 건너가
혜능선맥 마조의 고제자였던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문하에서
선종의 진리와 법을 전해 받고 깨달아 흥덕왕 1년(826년)에 귀국했다.
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탑의 비문에서
“북산에는 도의(道義)요. 남악에는 홍척(洪陟)”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홍척보다 5년 앞서 821년(헌덕왕 13년)에 귀국한 도의는
설악산을 근거로 하여 신라의 북방에서 선법을 펴고 있었고,
홍척은 남쪽인 지리산에 자리 잡고 활동하였다.
도의와 더불어 당시 남북을 대표하는 고승이었으며 우리나라 선불교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828년 지리산 실상사를 창건하였는데,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경덕전등록> 권 11에 의하면 그의 법통을 이은 이로
흥덕대왕과 선강태자가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왕족의 귀의를 받아 선풍을 크게 날렸음을 알 수 있다.
문하에는 편운(片雲)·수철(秀徹) 스님 등 제자가 1천여 명이나 있다.
@스님이 입적하자 나라에서는 ‘증각(證覺)’이라는 시호와 ‘응료(凝蓼)’라는 탑호를 내렸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開山祖)인
증각 홍척스님의 호는 홍직(洪直)이며.
실상화상(實相和尙), 남한조사(南韓祖師)라고도 불린다.
실상사 극락전에 탑과 탑비가 있으며,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은 보물 제38호,
보물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碑)는 보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각대사탑비 보물 제39호
증각대사탑비는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탑비이다.
이수 높이 1.03m, 귀부 너비 1.61m. 재료는 화강석이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증각대사는 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로 불리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826년(흥덕왕 1)에 귀국했다.
선문 9선 중 최초의 산문인 실상산문을 개창했다.
정확한 입적연대는 알 수 없으나 9세기 중반경으로 추정된다.
비는 일찍이 비 몸돌이 없어지고 지금은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받침돌은 당시에 일반화된 용머리를 형상화하지 않고 거북 머리[龜頭]를 그대로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작품으로,
앞면 가운데에 '凝蓼塔碑'(응료탑비)라는 전액이 새겨져 있다.
탑비는 9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증각대사의 묘탑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보물 제38호)이 탑비 뒤편에 세워져 있다.
@극락전
극락전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졌다.
절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에 의하면 순조 31년(1831)에 지어졌다고 한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주포식 맞배지붕의 목조 건물로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
가운데 칸에는 세 짝의 문을 달았고 양쪽은 한 짝씩의 문을 달았다.
건물 안은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뒤쪽 높은 기둥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불단 위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여래좌상 좌우에는 목조보살상이 있었으나 몇 년 전에 분실하였다고 한다.
신중탱
극락전의 옛 이름은 부도전(扶道殿)으로 계오대사가
1684년(숙종 10)에 건물을 짓고 부도전(浮屠殿)이라 하였다.
이처럼 부도전이라 한 것은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1751년(영조 27)에 포문비구(抱文比丘) 한심(漢諶)이 옛 연하당(蓮荷堂)과
금당(金堂)의 기와를 사용하여 요사채를 수리하고 부도전(扶道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88년(정조 12년)에 금파 관오대사가 대시주 이휘와 별좌 홍찬, 재민과 더불어 중수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 처윤과 함께 중건하여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극락전 옆에 있는 요사채는
1932년에 남성법(南性法) 스님이 영원사(靈源寺)에서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한다.
@수철화상탑 보물 제33호
보물 제33호. 높이 2.42m. 신라 말 선종 산문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크게 일으킨
수철(秀澈, 817∼893)의 유골을 모신 승탑이다.
실상사 서쪽에 있는 극락전의 오른쪽에 있으며,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위치로 보인다.
@수철(秀澈, 817 ~ 893)화상은 신라 말기의 승려로
수철은 시호(諡號)이며 법명(法名)은 알 수 없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출가하여 연허(緣虛)의 제자가 되었으며,
대덕(大德) 천숭(天崇)에게 불경을 배우고 동원경(東原京) 복천사(福泉寺)에서
윤법(潤法)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지리산 실상산문의 개산조(開山祖)인 홍척(洪陟)의 법을 이었으며, 많은 제자를 길렀다.
867년에 경문왕이 궁궐로 청하여 선(禪)과 교(敎)의 같고 다른 점을 물었으며,
헌강왕도 수철을 존경하여 심원사(深遠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 뒤 지리산 실상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제자들을 불러 “나는 가려 한다.”라는 말을 마치고, 열반에 들었다.
향년 76세, 법랍은 58세였다. 시호를 추증하여 수철(秀澈)이라 하였고,
탑호(塔號)는 능가보월(楞加寶月)이라 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 수인(粹忍)·의광(義光) 등이 있다.
승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 원당형(圓堂形)의 모습이다.
단면 8각의 바닥돌은 제법 높은 편이며, 윗면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이 바로 받침돌이 놓여 있다.
8각의 아래 받침돌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아랫부분에는 제법 높직한 굄을 둘렀고,
그 위의 옆면은 구름무늬로 장식되었는데,
면마다 구름 속의 용이나 사자의 모습이 돋을새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 받침돌 위에는 하나의 돌로 조성된 8각의 가운데 받침돌 굄돌이 놓여 있는데,
제법 높직하면서 위아래 단으로 나뉘어 있다.
가운데 받침돌은 낮고 좁은 편으로,
면마다 신라 석조물에서 주로 보이는 안상(眼象)이 오목새김 되어 있으며,
안상 안에는 사리함(舍利函)이나 주악상(奏樂像) 등의 여러 조각이 새겨져 있어 화사하게 보인다.
위 받침돌은 밑면에 8각의 각진 받침이 3단으로 새겨져 있고,
옆면에는 하나의 꽃잎이 위로 솟아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무늬 16개가 세 겹으로 돋을새김 되었는데,
꽃잎 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모두 48개의 연꽃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화려하게 보인다. 윗면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이 2단의 각진 굄만 있다.
받침돌 위에는 하나의 돌로 만든 8각의 몸돌 굄돌이 얹혀 있다.
굄돌의 높이는 낮은 편인데, 옆면에는 면마다 1구씩의 가늘고 긴 안상이 새겨져 있고,
옆면 윗부분의 덮개돌 모양 밑면에는 마치 석탑 받침돌의 덮개돌에 있는 부연(副椽)처럼
각진 받침이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윗면에는 낮고 각진 굄,
높고 둥근 굄, 낮고 각진 굄 등의 3단 굄이 몸돌을 받치고 있지만, 많이 파손되어 뚜렷하지는 않다.
몸돌은 8각의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을 새겼고, 앞면과 뒷면에는 문비(門扉)를 조각하였는데,
문비의 좌우 면에는 사천왕상이 돋을새김 되었다.
문비와 사천왕상 등의 조각은 8각 원당형 승탑의 기점인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부터 나타난다.
지붕돌은 전체적으로 평박(平薄)해 보인다.
밑면에는 몸돌 바로 윗부분에 1단의 각진 받침이 있고,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 처마 주변에는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었으며,
그 바깥쪽에는 각진 서까래가 새겨져 있다.
윗면인 낙수면에는 8각의 합각(合角)마다 내림마루인 우동(隅棟)이 굵게 표현되었고,
우동과 우동 사이에는 기왓골이 뚜렷하며,
처마의 끝부분에는 수막새와 암막새 기와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추녀는 거의 수평에 가까운데, 완만한 곡선을 이룬 전각에는 귀꽃이 없다.
다만, 우동 끝부분에는 잡상(雜像)을 놓았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받치도록
8각의 각진 굄을 2단으로 조성해놓았지만, 상륜부의 부재는 현재 노반(露盤)만 남아 있을 뿐이다.
노반의 겉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윗부분은 덮개돌 모양으로 생겼지만, 부연만 조각되어 있다.
이 승탑의 북쪽에는 수철화상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탑비가 있다.
비명의 내용으로 보아, 이 승탑은 893년(진성왕 7)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철화상탑비 보물 제34호
전체 높이 2.9m, 비신 높이 1.68m, 너비 1.12m. 비신은 푸른 돌로 되어 있으며,
이수(螭首)와 대석(臺石)은 화강암이다. 비문의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비의 주인공인 수철(秀澈)은 신라 말기의 선승(禪僧)으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실상사의 제2조가 되었다.
893년(진성여왕 7) 5월 77세로 실상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의 출생에서 입적 및 조탑(造塔) 경위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실상사에서 수철이 입적하였으나, 원래는 심원사의 승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深源寺○國師秀澈和尙(심원사□국사수철화상)’으로 쓰여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지지 않으며
글씨는 자경(字徑) 2㎝ 내외의 해서(楷書)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
비의 건립 연대 또한 명확하지 않으나 비문 가운데
‘贈太師景文大王(증태사경문대왕)’ 및 ‘贈太傅獻康大王(증태부헌강대왕)’이라는
구절이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동문선』권33의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사은표(謝恩表)」 및 『동사강목』 효공왕 1년 7월조에
위와 같이 전대왕(前代王)들을 추증(追贈: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줌)한 기록이 있으므로,
이 탑비의 건립 연대는 효공왕대(897~912)로 추정된다.
비음(碑陰)에는 일찍이 비가 쓰러져 1714년(숙종 40)에 중건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 달리 귀부(龜趺)가 없고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새긴 장방형의 받침돌 위에 비를 세웠다.
그리고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복련(覆蓮)을 둘렀다.
이수에는 구름 속에 반룡(蟠龍: 승천하지 않은 용) 두 마리가 대칭 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전액(篆額)이 음각되어 있는데,
조각 수법이 형식적이며 장엄 조식(莊嚴彫飾)이 약화한 경향이 뚜렷하다.
@증각대사탑 보물 제38호
높이 2.42m. 신라 말 선종 산문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세운
홍척(洪陟)의 유골을 모신 승탑이다. 실상사 서쪽에 있는 극락전의 왼쪽에 있으며,
그의 제자인 수철의 승탑은 극락전의 오른쪽에 서 있다.
승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 원당형(圓堂形)의 모습이다.
8각 2단의 아래 받침돌은 네모나면서 넓은 바닥돌 위에 올려져 있는데,
아랫단에는 8각의 모든 면에 구름무늬가 돋을새김 되었고,
윗단은 제법 높은 굄으로 이루어졌다.
아래 받침돌 위에는 다른 돌로 조성한 가운데 받침돌 받침이 놓여 있는데,
높이가 역시 제법 높은 편이다.
아랫부분에는 얕은 턱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모서리마다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으며,
윗부분에는 난간의 모양을 새겨놓았다. 곧 모서리 기둥과
모서리 기둥을 연결하여 난간 부재인 돌란대[廻欄帶]를 8면의 면마다 모두 새겼고,
각 면의 가운데 부분에는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인
동자주(童子柱)를 돌란대를 받치는 기둥으로 얕게 조각하였으며,
모서리 기둥 위에는 귀꽃을 장식하였다. 모서리 기둥의 윗면에는
가운데 부분에 2단의 낮은 받침을 새기고서 모서리 기둥까지의 공간을 둥글면서 얕게 마감하였다.
가운데 받침돌은 위아래에 낮은 턱이 있으며, 면마다 안상(眼象) 안에
공양비천상(供養飛天像)과 보살좌상이 1구씩 조각되어 있다.
위 받침돌은 단면이 거의 둥근데, 2단의 낮은 받침 위에는 2장의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仰蓮)의 연꽃무늬를 세 겹으로 돋을새김해 놓았다.
그 위에는 단면 8각의 몸돌 받침이 하나의 돌로 조성되어 올려져 있는데,
높이가 매우 높다. 아랫부분에는 2단의 굄이 높이 자리하고 있고,
윗부분의 윗면에는 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무늬를 새긴 덮개돌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각 면에는 북을 옆으로 엎어 놓은 듯한 고동(鼓胴) 모양의 간주(竿柱)가
모서리마다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는 안상이 조각되었다.
몸돌은 단면이 8각으로, 모서리마다 모서리 기둥이 있고,
앞뒷면에는 윗부분에 둥근 반원이 올려져 있는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으며,
문비의 좌우 면에는 사천왕상이 얕게 돋을새김 되었다.
몸돌의 윗부분에는 목조 건물의 가구(架構)처럼, 주두(柱頭)를 비롯하여
평방(平枋), 창방(昌枋), 접시받침 등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밑면과 처마 밑에 각각 비천상과 서까래가 새겨져 있다.
윗면인 낙수면에는 내림 마루인 우동(隅棟)과 함께 기왓골이 표현되었으며,
추녀 윗부분에는 귀꽃이 붙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머리 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단면 8각의 면마다
연꽃무늬를 새긴 앙화(仰花)와 함께 보륜(寶輪), 보주(寶珠) 등이 얹혀 있다.
이 승탑은 각각의 부재가 높아서 전체적으로는 고준(高峻)한 편이며,
장엄 조각은 대체로 가냘파 보인다. 홍척은 828년(흥덕왕 3)에 실상사를 창건하였는데,
입적 시기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승탑의 건립 시기 역시 9세기 후반으로 보인다.
극락전 앞에는 보리수가 탐스럽게 열렸다.
<실상사 목탑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실상사 유적발굴조사단은
산내면 입석리 사적 제309호인 남원 실상사에서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경북 경주 황룡사지 목탑지 보다
규모가 1m 정도 넓은 목탑지를 발굴했다고 1999년 11월 26일 밝혔다.
이 목탑지의 규모는 남북과 동서가 각각 7칸인 정방형의 건물로
크기는 지금까지 국내 최대로 알려진 황룡사 목탑지 22m 9㎝보다
약 1m가 넓은 23m 20㎝로 밝혀져 국내 최대 규모의 목탑지로 확인됐다.
또 구들을 놓기 전에 양쪽에 돌을 쌓아 만든 고래(일명 연도(연도(煙道)))도
국내 최대 규모인 것으로 드러나
이 사찰이 통일신라 시대 불교 문화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실상사는 보물 제37호인 삼층석탑과 함께
당시 불교 문화의 찬란한 꽃을 피웠던 국내 사찰 중의 하나로 재평가되고 있다.
부여문화재연구소 실상사 유적발굴조사단은 지난 4월부터 오는 2천 년까지
실상사 일대에 대해 발굴작업을 계속, 당시 불교 문화의 전모를 밝혀낼 예정이라고 한다.
목탑은 사리(사리(舍利))를 봉안할 목적으로 세운 목조의 중층누각(重層樓閣)건물로
국내에서는 목탑이 전부 소실되고 목탑지만 발견되고 있는데
현재 발견된 목탑지로는 백제의 부여 군수리사지와 금강사지, 익산 미륵사지가 있으며
신라의 목탑지로는 황룡사지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목탑으로 유명한 곳은 3곳이 있다.
•보은군 법주사 팔상전 국보 제55호 5층 목탑
•화순군 쌍봉사 대웅전(보물 제163호 지정되었던 원래 건물은 소실되고, 1966년 복원)
•부여군 백제문화단지의 능산리사지 5층 목탑(재현복원)
(본방 속리산법주사와 쌍봉사 참조)
'국내 명산과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물 제159호 마애약사여래삼존불입상으로 유명한 함안 방어산 마애사 (0) | 2019.08.24 |
---|---|
함안 방어산 마애사 만수전 (0) | 2019.08.17 |
보리수(菩提樹) (0) | 2019.08.12 |
남원 지리산 실상사(제1부) (0) | 2019.08.10 |
보물 제41호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0) | 2019.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