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성주사지(聖住寺址)

2019. 7. 27. 11:59문화재

보령 성주사지(聖住寺址)

 

보령 성주사는 신라말기에 개산된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의 중심사찰이었다.

 삼국유사1 ‘태종춘추공조에 의하면 백제 법왕이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오합사라고 불렀으나

 신라 문성왕(839~859) 때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無染)

 가람을 크게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성주사(聖住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오합사가 성주사라는 이 사실은 1960년부터 출토된 기와 조각에서도 확인되었다.

성주산문은 9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으며,

무염대사는 당시 최고의 선종 승려로 알려져 있다.

 

 

 

백제시대의 사찰이었던 성주사는 백제의 멸망 직전에 이 절에 큰 적마(赤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아다니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시해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599(법왕 1) 헌왕태자, 곧 법왕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국사 무염(無染)이 김양(金陽)의 전교에 따라

이 절을 중창하고 주지가 되어 선도(禪道)를 선양하게 되자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리게 되었다.

 

 

그 뒤 이 절은 성주산파의 총본산으로 크게 발전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중건되지 못하여 현재 폐사 터만이 사적 제307호로 남아 있다.

그러나 번창하였을 때에는 절에서 쌀 씻은 뜨물이 성수천을 따라 10리나 흘러내렸다고 한다.

 

 

 

성주사지는 1968, 1974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금당, 삼천불전지, 회랑, 중문 등의 건물지가 밝혀졌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의 소조불두와 백제·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와당류가 함께 출토되었다.

 

 

 

문화재로는 국보 제8호인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寶光塔碑)를 비롯하여

신라 말에 건립된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9),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보물 제47),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보물 제20),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보물 제2021),

성주사지 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 성주사지 석계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

성주사지 석불입상(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3)이 있다.

보령 성주사는 일반 가람의 형태와 다르게 금당 뒤에 3기의 석탑이 서 있는 구조가 특이하다.

 

 

4기의 석탑과 석등, 석불입상, 당간지주, 석계단 등을 보면

성주사는 옛적에 큰 규모의 가람였음을를 말해준다.

이 가운데 백월화상 탑비는 890(진성여왕 4)에 세워진

신라 최대의 것으로 최치원(崔致遠)이 글을 짓고

최인연(崔仁渷)이 썼는데 고어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외에 금당을 오르는 석계단은 현재 2단이 남아 있는데,

석계단 양쪽에 목에 방울이 달린 석수(石獸) 2기가 앉아 있으며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주사지는 1991년부터 1996년까지 6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중문-석등-5층석탑-금당의 불대좌-강당으로 이어지는 11금당 가람 배치에,

오른쪽은 삼천불전지, 외쪽은 다른 불전지의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보령 성주사지(保寧 聖住寺址)1984813일 사적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보령성주사지 석등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주사지의 5층석탑 앞에 있는 높이 2.2m의 작은 석등으로 8각을 기본으로 하였다.

일제시대에 탑 앞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것을 적당히 조립하였다 하는데,

1971년 석탑 4기를 해체수리할 때 현재 위치에 복원하였다.

 

 

  

지대석(地臺石)은 주변의 판석을 모아 대용하였고

그 위에 지대하석(地臺下石)과 연화하대석을 하나의 돌로 만들고

각 면에 2개씩의 안상(眼象)과 복련(覆蓮)을 새겼다.

3단의 굄 위에 서 있는 단면8각형의 간석(竿石)에는 아무 장식이 없다.

 

 

상대석은 하대석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태이며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이 놓이는 아랫면에 1단의 굄을 새겼다.

화사석은 정8각형으로 사방에 네모난 문을 내었는데 창의 주변에 문을 고정시켰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옥개석 아랫면에 1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가 약간 위로 반전하고 있으며,

낙수면이 완만하고 합각(合角)의 윤곽도 뚜렷하며 윗면에는 상륜받침으로 2단의 굄이 있다.

조각이 조잡하고 간석이 가늘고 길어 균형이 맞지 않는 점, 창에 문의 고정흔적이 없고

등을 봉안하는 내부가 비실용적인 점 등으로 보아 석탑보다는 시대가 뒤떨어진 형식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령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9호)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

보물 제19. 높이 660cm. 이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으로

 층수만 다를 뿐 각부의 세부표현이나 양식 등은 3기의 3층석탑과 거의 유사하다.

지대석 위에 하대석이 놓여 있는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하대갑석의 윗면은 경사가 급하며 가운데에 3단 굄이 있다.

상대석은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조각되었으며,

갑석 밑에 부연이 있고 윗면에는 3단 굄 위에 별석을 끼워넣었다.

이와 같이 탑신과 기단 갑석 사이에 별개의 굄을 삽입하는 것은

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석탑 형식이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만 표현되었고,

 옥개받침은 4단으로 처마 끝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갔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다.

 

 

 

윗층 받침돌과 1층 몸돌 사이에는 다른 돌로 만든 굄대가 있다.

이 굄대는 이 석탑의 특징으로,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을 비롯하여

 평창 월정사 팔각다층석탑(국보 제48),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 제111)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굄대는 밑면이 소로[小累]와 같이 안으로 휘어진 굽 모양을 하고 있고, 윗면에는 테두리를 장식한 굄이 새겨져 있다.

 

 

  

각 층의 몸돌은 윗층으로 올라갈수록 우아한 체감률을 보이며,

모서리 기둥이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었다.

각 층의 지붕돌은 비교적 너비가 좁은 편인데, 밑면 받침은 4단이고,

추녀 밑은 거의 수평을 이루다가 모퉁이에서만 가볍게 위로 휘어진 반곡(反曲)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의 윗면인 낙수면은 완만하고, 전각(轉角)의 반전(反轉) 역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꼭대기에는 1단의 굄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이 놓여 있지만,

보륜(寶輪보개(寶蓋) 등 다른 머리장식은 없어졌다.

 

 

 

이 석탑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1층 탑신 밑의 별석받침이나 4단의 옥개받침, 옥개석의 끝부분이 약간 반전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1971년 해체 수리공사 때 1층 탑신 윗면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유물은 없고 사리공의 석재 뚜껑만 있었다

 

 

 

 

그외에 금당을 오르는 석계단은 현재 2단이 남아 있는데,

석계단 양쪽에 목에 방울이 달린 석수(石獸) 2기가 앉아 있으며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층탑 옆에는 불상이 없는 불대좌만 남아 있다.

 

 

 

금당 뒤에는 3기의 석탑이 있다. 좌측 서삼층석탑과 중앙 삼층석탑은 기 지정 보물로,

우측 (동)삼층석탑은 2019년 3월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보령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보물 제20호)

 

 

 

 

보령성주사지 중앙(中央)삼층석탑

보물 제20. 높이 3.7m. 19631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성주사지의 금당터 뒷편에 나란히 서 있는 2개의 3층석탑과

 1개의 5층석탑 중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좌우에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웠다.

 

 

 

(자물쇠와 시비(문고리)의 문양이 탑신에 부조되어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석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크고,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2층 이상의 몸돌은 적당히 크기가 줄어든 모습이다.

 

 

 

 

 

지붕돌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위로 살짝 들어올려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보령 성주사지 서(西) 삼층석탑(보물 제47호) 

보물 제47. 높이 400cm. 3기의 석탑은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3층석탑으로

 세부표현에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같은 양식을 보여준다.

사적기에 의하면 3기의 3층석탑은 3세불인 정광불·약사불·가섭불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석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고,

 갑석의 윗면은 약간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 호형과 각형으로 된 2단 굄이 있다.

 

 

 

상대석도 마찬가지로 각 면마다 우주와 탱주를 조각했으며 비스듬히 경사진 갑석 밑에는 부연이 있고,

그 윗면에는 2단의 굄이 있으나 탑신과 갑석 사이에 별석의 받침대가 삽입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는 각각 다른 돌로 구성되었는데,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특히 1층 옥신의 앞면과 뒷면에는 중앙삼층석탑과 같이 탑신에 자물쇠 장식이 있는 문비가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자물쇠와 문비의 문양은 통일신라말 조성된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에서 나타나 있다.

 백장암의 삼층석탑에서는 두분의 보살이 시립해 있고 그 중간에 자물쇠와 문비가 부조되어 있지만

보령성주사지의 삼층 석탑에서는 시립된 보살 없이 문양만 부조되어 있다.

 

 

(국보 제10호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이를 유추하면 성주사의 서 삼층석탑은 그 조성연대가 백장암의 삼층석탑과 같은 통일신라 말기 임을 분명 알 수 있다.

(동 삼층석탑과 중앙 삼층석탑도 동일 문양을 하고 있음으로 조성시기도 같은 시기 임을 미루워 알 수 있다.)

참고로 이와같은 문양으로 실물로 출토된 것은 보물 제777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빗장으로 현재 호암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비교적 완만하게 내려오다가 처마 끝부분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

상륜부는 파손이 심하여 현재 방형의 노반만 남아 있다.

 1971년 이 탑을 해체·수리했을 때 1층 탑신 윗면에 있었던

사각형의 사리장치는 이미 도굴당해 없어진 상태였다.

 

 

 

 

보령 성주사지 동()삼층석탑(보물 제2021호)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東 三層石塔)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4기의 석탑 중 하나인 신라의 삼층석탑이다.

197973일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26호 성주사지동삼층석탑으로 지정되었다가,

 201932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021호로 승격되었다.

성주사지 금당지 뒤 3기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탑이다.

 

 

2중 기단(二重基壇) 위에 만들어진 3층 석탑으로 면석(面石)과 몸돌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옥개석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목각되어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9C)의 전형적 3층 석탑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1층 탑신석에는 문액(門額)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양각하였으며,

승탑(부도)로 추정되어 오다가 성주사 사적기에 의해서 사리탑으로 알려지고 있다.

  

 

옛 성주사 금당을 중심으로 전면에 오층석탑 1기는 전형적인 가람배치 양식에 따라 배치되었으나

후면에 배치된 삼층석탑 3기는 독특한 가람배치로 국내에는 그 예가 없어

오층석탑이 조성된 후에 다른 곳에서 옮겨와 배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후면의 삼층석탑 3기 중 서쪽과 중앙의 2기는 1963년 보물로 지정하였으나

동쪽의 삼층석탑 1기는 충청남도 지정문화재로 관리하여 오던 것을

2019년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되었다.

 

 

 

동 삼층석탑은 조성 양식으로 보아 다른 석탑 3기와 같이 통일신라말기에

동일한 장인에 의해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기 지정된 탑들 못지않게 균형 잡힌 비례와 체감,

우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지정가치가 있다.

 

 

동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개의 층으로 조성한 탑으로 총 높이는 4.1m이다.

기단 각 면에는 기둥의 형태가 조각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특징으로는

상층 기단 상부에 괴임대 형식의 별석받침(별도의 돌로 만든 받침석),

1층 탑신 전후면에 문고리와 자물쇠가 표현된 문비(문짝 모양)가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국보 제8. 전체 높이 455cm, 비신 높이 263cm, 너비 155cm, 두께 43cm.

현재 귀부의 머리와 몸체부분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나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를 갖춘 완전한 형태의 비석이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신라 헌덕왕 때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이

 성주사에 머물다가 입적한 지 2년 뒤에 부도를 세웠다고 하므로

이 탑비는 890(진성여왕 4)에 부도와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최치원이 찬한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이며 글씨는 해서체로 최인곤이 썼다.

이수는 앙련이 받치고 있으며 4면에 구름과 용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고,

이수 앞면 중앙에 있는 제액(題額)은 마멸이 심하여 해독하기 어렵다.

 

 

  

비문에는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행적이 모두 5천여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는데,

찬자(撰者)는 최치원(崔致遠)이며 글씨는 그의 종제 집사시랑(執事侍郎) 인연(仁兗)이 썼다.

비문에는 건립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은데,

낭혜화상이 입적한 2년 뒤에 부도(浮屠)를 쌓았다는 비문으로 보아

이 때 비문이 작성되고 비가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한편, 그 밖의 비문내용을 참고하여 효공왕대 초기에 비문이 작성되고

 서자(書者)인 최인연이 909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집사시랑이 된 이후에 비문이 쓰였고

비가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다.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한 이 비문은

신라의 골품과 고어(古語)를 연구하는 자료로서도 귀중하다.

글씨는 자경 2.5의 해서로 최치원의 필의(筆意)를 지닌 구양통(歐陽通)류에 속한다.

 

 

 

 

@사산비명(四山碑銘)

네 편의 비문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 터에 있는

 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崇嚴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 국보 제8),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경내에 있는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령탑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碑銘: 국보 제47),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말방리 대숭복사에 있었던 초월산대숭복사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는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 보물 제138)을 가리키며,

위의 네 군데 산 이름을 취하여 일반적으로 사산비명이라 일컫는다. 

짜임새의 어색한 점 등이 최치원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나 필획의 크기에 변화를 주어

 행서의 필의를 해서에 가미시킨 점은 독특하다.

 이 탑비는 신라 석비 가운데 가장 크며 조각솜씨도 뛰어날 뿐 아니라

신라 사회제도와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비의 주인공인 무염화상(無染和尙)은

출생: 801(애장왕 2) 하여 888(진성여왕 2)때 열반한 통일신라시대 선승 이다.

속성은 김씨(金氏).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 법명은 무염(無染).

범청(範淸)의 아들로 어머니는 화()씨이다. 29대 태종무열왕의 8대 손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다.

 또한 무염은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헌덕 13) 당나라로 가서 성남산(城南山)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법맥을 이은 마곡(麻谷)보철(寶徹)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므로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낭혜화상 비각 안에 모아 둔 성주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 )

 

845(문성왕 7) 귀국하여 보령 성주사(聖住寺)

선문구산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교화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하여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등 여섯 왕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법을 물었고,

 제자는 2,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원장(圓藏), 영원(靈源), 현영(玄影),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이 그의 선풍을 선양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세웠다.

 

 

1293(충렬왕 19) 천책(天頙)이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는

그의 무설토론(無舌土論)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 논에서,

부처의 교설을 뜻하는 불교(佛敎)와 선종 조사들의 도인 조도(祖道)를 구별하였는데,

이와 같은 구분은 그에 의해서 처음 도입되었다.

 

 

또한 말을 매개로 하거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이심전심하는 것이 조도라고 정의하였고,

청정이나 부정 등의 상대적인 구별을 넘어선 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말을 빌려서 깨끗함과 더러움을 분별하는 불교는

낮은 근기의 중생들을 위해서 쓴 부처의 방편이라고 보았다.

88889세로 입적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葆光)이다.

탑은 성주산 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최인연(崔仁渷)이 쓴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현재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남 문화재자료 제373호 성주사지 석불입상

@성주사지 석불입상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保寧 聖住寺址 石佛立像)은 통일신라의 석불입상이다.

2000920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73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사지내 강당지 동편에 있는 석불입상으로 얼굴이 타원형으로 인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얼굴부위, 목부위, 가슴부위가 일부 훼손되어 있으며

지대석의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에 옮겨온 것으로 추정하며,

조성시기는 조선시대 중·후반기에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