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보리사 미륵곡석조여래좌상과 마애불

2019. 6. 25. 22:59문화재

 

 

경주 남산 보리사 미륵곡석조여래좌상(慶州南山彌勒谷石造如來坐像)과 마애불

 

경주기행 이튿날 미륵곡석조여래좌상을 보러 보리사를 들렸지만,

사찰 들머리를 찾지 못해 보리사 부근을 뱅글뱅글 세 번이나 맴돌다가 결국 포기하고

그다음 날 아침 기림사로 향하는 길에 다시 시도하여 겨우 들머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른 아침 냉냉한 고요함 속에 잠든 가람을 여명의 여린 빛이 온기로 감싸는데

석조여래좌상 앞에는 연세 지긋한 보살 한 분과 함께 보리사의 비구니 스님이 예불하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 외지에서 오신 분 같지는 않고 아마도 동네분이 스님과

무언가 축원을 드리는 것 같이 보인다.

빠듯한 다음 행선지와 귀경길 시간에 쫓겨 마애불이 있는 곳으로 먼저 발길을 돌렸다.

마애불을 보고 내려왔지만, 예불은 아직 끝나지 않아

법당에 참배한 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석불상만 몇 캇을 담고 돌아 나왔다.

보리사의 문화재는 보물 제136호 지정된 미륵곡석조여래좌상과

경북 유형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된 남산 미륵곡 마애여래좌상 있다.

법당은 주마간산 격으로 눈팔매 짓만 해 보았다.

 

 

보리사는 큰 가람은 아니지만 얕은 언덕에 몇채의 전각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명의 따스한 햇살이 가람을 감싸고 있다. 대웅전 앞 3층석탑이 눈길을 끈다.

안내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문화재급은 아닌 모양이다. 

 

 

범종각

 

 

대웅전이다. 단청을 보니 오랜 된 전각은 아니고 최근에 지은 모양이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다. 문수와 보현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뒤편 후불탱화는 목조로 양각되어 있고 좌측에 지장보살을 모셨다.

 

 

신중탱이다. 오추사마로 불리는 예적금강 아래 위태천과 좌우에 신장들을 모셨다. 

 

 

 

 

 

대웅전에서 바라 본  삼층석탑과 범종각

 

 

삼성각 옆에 미륵곡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사시예불 시간대도 아닌데 이른 아침에 스님과 보살 한분이 축원을 드리고 있다.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보물 제136호 /건립 시기: 8세기 

불상 높이 2.44m, 대좌 높이 1.92m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66-2

 

 

보물 제 136호 미륵곡석조여래좌상

@경주 남산 보리사 미륵곡석조여래좌상(慶州南山彌勒谷石造如來坐像)

보리사지석불좌상(菩提寺址石佛坐像)이라고도 불리며,

불상의 높이는 2.44m, 대좌의 높이는 1.92m로 전체 높이는 4.36m이다.

보물 제1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시대에 이곳에 보리사라는 사찰이 있었기에 그렇게 불린 모양이다.

대좌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서 원래는 법당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나

 현재는 보리사 삼성각 옆 노천에 모셔져 있다.

비록 광배 윗부분에 금이 가고

대좌도 깨어진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보존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신라 시대의 보리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이 석불좌상은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 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머리에는 커다란 육계(肉髻)와 나발(螺髮)이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장방형으로 양감이 풍부한 편은 아니지만,

가늘게 뜬 긴 눈, 오뚝한 코,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입 등이 조화를 이루며 묘사되어 있다.  

 

 

  

얼굴은 신체와 다른 돌로 이루어졌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보인다.

 좁아진 듯한 어깨에 가슴은 건장한 편이지만 평평하게 처리되어

석굴암 본존불에서 느껴지는 탄력과 긴장감은 많이 줄어들어 있다.

이러한 점은 다소 작게 표현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이라든가

폭이 좁아지고 높이가 낮아져 빈약해 보이는 하체에서도 공통되는 것이다.

 

 

 

한편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드러난 가슴 위로 비스듬히 입은 내의가 보인다.

왼쪽 어깨 위에 걸쳐진 대의 끝단에는 약간의 주름이 표현되었고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이 가슴 부분의 옷깃 속으로 살짝 접혀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승가리(僧伽梨: 大衣)가 표현된 통견(通肩)의 법의는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 국보 제82)

긴장된 옷 주름을 따르고 있지만,

그보다 자유분방하게 처리되었으며,

 

 

(감산사지 석불입상)

굴불사지석불상(掘佛寺址石佛像, 보물 제121)

남면 본존불 하체에 표현된 옷 주름보다는 발달한 면을 보여 준다.

 

 

경주 남산 굴불사지 사면불(남면)  

 

 

 

광배는 화려한 주형 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윗부분이 절단되었으나 지금은 붙여 놓았다.

내부는 굵은 철선(凸線)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고 이 선을 따라 12잎의 꽃무늬를 새겼다.

 

 

  

 

 

 

두광과 신광의 안쪽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당초문(唐草文)을 화려하게 새겼고,

두광에는 3구의 화불(化佛), 신광에는 4구의 화불을 배치하였으며,

바깥쪽으로는 불꽃무늬가 유려하게 새겨져 있다.

이처럼 불꽃무늬·화불·꽃무늬 등이 빽빽이 새겨진 장식적인 광배는

이후 석조불상 광배의 전형적인 형태를 이루게 된다.

 

 

 

 

 

 

 

 

 

 

 

  

광배 뒷면에는 약합을 든 약사불좌상(藥師佛坐像) 1구가

선각에 가까운 얕은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데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법은 밀양 무봉사석조여래좌상(舞鳳寺石造如來坐像, 보물 제493)이나

 경북대학교 소장 광배 등에서 희귀하게 나타나는 예라고 한다.

 

 

(밀양 무봉사 석조여래좌상 전면)  

 

 

(밀양 무봉사 석조여래좌상 뒤면) 

··하대로 이루어진 팔각의 연화대좌는 상대는 앙련이,

하대에는 복련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에는 각 모서리에 기둥 형태가 새겨져 있는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양감이 줄어들어 평면성을 띤 이 석불좌상은

 감산사불상이나 석굴암 본존불 좌상과 같은

8세기 불상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으로부터 훨씬 진전되어

9세기 양식으로 이행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높다란 육계, ··입이 정제된 세련된 얼굴,

당당한 신체, 굴불사 남면 본존불보다 진전된 옷 주름 등에서

다소 위축되고 경직되는 9세기 불상과는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 불상은 8세기 불상의 세련된 불격(佛格)

사실주의 조각으로 성공시킨 당대의 역작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마애불을 가기 위해 보리사를 나와 사찰입구 왼쪽 대숲이 있는 길에서 중간 오솔길을 오른다.

 

 

 

시대 고대/남북국 문화재 지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3

크기: 높이 1.2m 제작시기: 8세기 후반(통일신라시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보리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불상.

 

 

@경주 남산 미륵곡 마애여래좌상(慶州 南山 彌勒谷 磨崖如來坐像)

 경주시 남산 보리사 미륵곡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마애여래 좌상이다.

19851015일에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정 명칭은 <보리사마애석불>이다.

경주시 배반동 보리사 입구에서 보면 대숲이 있고

그 대숲 가기 전 중간 언덕에 난 소로(小路)의 비탈길을 좀 오르면

 동쪽을 향한 높이 2m의 바위벽에 새긴 마애불이 보리사마애석불이다.  

 

 

 

불상 높이 1.2m.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3.

암벽을 배 형태로 파내어 감실(龕室)을 조성한 뒤 얕게 부조(浮彫 : 돋을새김)한 여래좌상이다.

 8세기 후반 통일신라 시대의 마애불로서는 드물게 보는 온화한 표정과

단정한 자세에 의해 명상에 잠긴 부처의 자비심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마애불이다.

 

 

 

네모진 얼굴은 살이 쪄 풍만한 모습이다. 명상하는 눈은 가늘게 눈매를 표현하고

 작은 입은 양 입가를 깊이 파내어

이른바 고졸(古拙 :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음)의 미소를 띠고 있다.

 이러한 온화한 미소는 통일신라 시대 석불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것이다.

눈매가 날카롭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마치 미청년을 연상시키는,

같은 보리사 경내의 석불좌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머리는 나발(螺髮 :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이 뚜렷하고

육계(肉髻 )는 삼각형이다. 하지만 머리와의 윤곽선이 불분명하다.

세부 굴곡까지 표현한 두 귀는 길어서 어깨까지 닿았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두 겹으로 부조되어 있다.

신체는 방형(方形 : 네모반듯한 모양)의 구조물을 포개 놓은 듯 평면적이다.

 

 

 

전체 윤곽은 얕게 부조했지만, 옷 주름은 내의의 가슴 띠를 제외하고는

 모두 선조(線彫 : 가는 선으로 쌓아 올리거나 선을 파 들어가는 조각법)로 표현하였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다.

 직사각형으로 길게 트인 가슴의 옷깃 사이로 두툼하게 새긴 내의 자락이 드러나 있다.

 

 

  

양손은 복부에서 곧게 드리워진 옷자락에 가려 수인(手印)을 확인할 수 없다.

 이처럼 대의 자락이 가슴의 옷깃 속에 한 번 여며진 뒤 복부 중앙으로 곧게 드리운 착의(着衣) 형식은

 신라 조각에서 처음 나타나는 예이다.  

가부좌(跏趺坐)한 하체 밑으로 연꽃무늬를 얕게 선각(線刻)하였다.

배 모양의 감실 자체가 광배(光背)를 의도한 듯 달리 광배는 표현되지 않았다.

 

 

 

방형의 풍만한 얼굴, 특이한 선정의 자세, 신체 굴곡이 무시된 평면적인 부조로,

선조화된 옷 주름 선 등에서 8세기 후반의 보리사 경내 석불좌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