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사면불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2019. 7. 1. 21:07문화재

우리나라 최초의 사면불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禮山花田里石造四面佛像)

 

문경 사불산 사면불 및 문경 지역의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땅거미가 내려앉는 늦은 시간이지만 욕심을 내어

우리나라 최초의 사방불이 있다는 예산으로 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면불로 알려진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禮山花田里石造四面佛像)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 있다.

도로변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진 야산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사면불은 백제 시대의 불상으로 현존하는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오래된 큰 규모의 석불로 알려져 있다.

 사면불의 높이는 본존불로 보이는 남면 좌상(坐像)120cm,

동면입상은 130cm, 북면입상은 168cm이며,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이라고 도 불리며 보물 제7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은 1983년도에 지금의 위치에서 동쪽에 있는

 미륵당(彌勒堂) 또는 미륵댕이라 불리는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에는 도괴(倒壞)되어 땅에 묻힌 상태여서 많이 손상되어 있었는데,

특히 서면상은 마멸이 가장 심해 알아볼 수 없다.

원래부터 반듯하지 않은 석주의 가장 넓은 면에

사면불의 본존으로 보이는 불좌상(佛坐像)을 조각하고,

나머지 3면에는 불입상(佛立像)이 조각되어 있다.

 

 

사면불은 보호각 안에 모셔져 있다.

 

 

 

 

 

사면불상의 남면

보물 제794호로 지정되어 있는 예산 화전리 사면불은

원래 암반 위에 돌출한 돌기둥을 4면으로 깎아 각 면에 사방불상을 새긴 것이다.

이러한 모양을 석주형(石柱形)이라 부른다.

가장 넓은 남면에는 좌상을 새기고 동··서면에는 입불(立佛)을 새겼다.

남면불이 이 돌기둥의 주불(主佛)로 생각되며, 따라서 불전(佛殿)의 주불도 남방불로 생각된다.

이와 유사한 형식의 사방불로는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과 칠불암 사면석불이 있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본존불이 좌불상으로 봉안되지 않은 것이 다르고,

칠불암 사면불은 사방불과 본존불이 같은 장소에 분리되어 조성되어 있다.

 

 

(굴불사 사면불)  

 

 

칠불암 삼존불과 사면불

 

화전리 사면석불의 특징은 각 상의 주위를 마치 감처럼 파서 원각상에 가깝게 조각한 것이다.

불좌상은 석주의 1/3 정도를 깎아 들어가 조각하여 원각상에 가깝다.

남면 남방불상(南方佛像)은 현재 머리, 두 손, 오른쪽 무릎 부분 등이 파손되었다.

 하지만 발굴 때 머리의 발견으로 원모습을 충분히 복원하여 볼 수 있다.

얼굴에 표현된 미묘한 묘사는 잘 알아볼 수 없도록 깨어졌지만,

전체 윤곽에서 듬직하고 박력 있는 불력(佛力)을 느낄 수 있다.

 

 

 

체구는 두꺼운 옷 속에 둘러싸여 있어서 가슴이나 배 등의 양감 표현이 없다.

하지만 장대한 상체에 어깨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으며,

전체적인 윤곽이 퍽 세련되어 당대의 뛰어난 걸작으로 생각된다.

두 손은 결실되었지만, 손을 끼우던 구멍 자리와 출토된 손 모양으로 보아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있었으리라 본다.

 

 

불의는 통견의로 오른쪽 어깨를 덮어 내린 대의(大衣)의 한 자락은 가슴을 거쳐 배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왼쪽 어깨를 덮어 내린 대의의 한 자락은 거의 직선에 가깝게 흘러내려

다리를 거쳐 상현좌(裳懸座: 불의가 아래로 흘러내려 보이지 않는 대좌)를 이루고 있다.

 직선적인 옷 주름이나 평행 계단식의 힘차고 강인한 주름선은

인도 굽타 불상을 기원으로 하는 운강석굴 불상에 유행되었던 옛 방식을 따르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는 백제불교가 인도 간다라미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사료된다.

특히 대의(大衣) 안에 비슷한 불의(佛衣)를 입고 있는데 이것은 상의(上衣)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백제의 불입상에서 흔히 보이는 것처럼 장신의 체구에 대의가 가슴 앞에서 많이 벌어지고,

 끝자락이 왼쪽 어깨 뒤로 넘겨져 있다. 대의 사이로 Y형의 내의와 둥근 띠 매듭이 보인다.

 배 아래로 늘어진 옷 주름이 두꺼운 층단형으로 표현되었다든가

 대좌 위에까지 늘어진 치마가 좌우로 강하게 뻗쳐 있는 특징들은

 7세기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고식적 요소이다.

백제의 불입상 가운데 양식적으로 가장 비교되는 예는 부여가탑리사지출토금동불입상이며,

이후 태안과 서산의 마애불입상들로 진전된 듯하다.

 따라서 이 사면석불의 제작 시기는

태안 마애삼존불상(국보 제307)보다는 다소 앞선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태안마애삼존불/국보재307호)

 

 

 

 

광배는 160나 되는 거대한 주형 거신광(舟形擧身光)이다.

두광(頭光)은 연꽃무늬·빗살무늬·덩굴무늬가 차례로 새겨졌으며,

이 주위로 불꽃무늬가 외곽으로 새겨져 있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이나

익산 삼기면 연동리 석불 여래좌상(보물 제45)과도 친연성이 있지만

소박하면서 박진감 넘치는 것이어서 보다 옛날식으로 평가된다.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불/국보제84호)

 

 

사면불의 동면

동면 동방불상은 입상인데 남방 좌불상보다 다소 소박하고 단순하다.

등신대(等身大)의 이 불상은 비교적 당당하고 세련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 넓은 가슴, 균형 잡힌 어깨와 양감 있는 팔,

자연스러우면서도 곧은 하체 등에서 이 불상의 우아하고 세련된 형태미를 볼 수 있다.

 

 

 

 

 

 

 

 

 

통견의 불의는 소박하면서도 단순하게 처리되었지만

산뜻하고 우아한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광배는 8엽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 홑잎의 연꽃잎무늬)을 새긴 두광만 있을 뿐

신광은 마모되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사면불의 북면

북면 북방불상은 동방불상과 흡사하지만 노출되었던 부분도 있어서 원모습에서 어느 정도 변형되었다.

 

 

 

 

 

 

 

 

 

 

사면불의 서면

서면 서방불상은 전면 노출되어 마멸 때문에 원모습을 상당히 잃어버렸다.

사면불 중 가장 마모가 심하다.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의 특징은 백제의 서산 운산면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등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보다 선행한 양식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백제 작으로 자랑할 수 있는 작품 중 가장 이른 것이며,

 세련미에서는 서산 운산면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에 버금갈 만한 중요한 대작이라 하겠다.

 또한, 이 불상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사방불이라 할 수 있으므로

우리나라 조각사 연구 내지 백제 미술사상 가장 귀중한 작품의 하나로 생각된다 

 

 

 

사방불에 대한 소고(小考)

사방불이란 방위에 따라 부처님 네 분을 모셨다는 단순한 의미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방은 온 우주를 상징하는데, 이는 불국토 사상과도 맥을 함께 한다.

사방불의 역사는 인도 초기불교 시대의 산치대탑으로 거슬러올라가는데,

산치대탑 내부 사방에 불상이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 사방불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사방불이 바로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이다.

 

 

  

@<사방불의 유래>

문헌에 나타난 사방불에 관한 최고의 언급은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에 관한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죽령(竹嶺) 동쪽 약 100리쯤 되는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587(진평왕 9) 별안간 사면이 방장(方丈)만 하고

 사방에 여래가 새겨진 대석(大石)이 하늘로부터 산꼭대기에 떨어졌다.

 

 

(문경 사불산 대승사 사면불 )

이 사방불은 홍사(紅紗)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예배드리고,

 절을 그 바위 곁에 세운 뒤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하였다.

 현재 문경의 사불산에 사면불이 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 탄 그 사방불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밖에 신라의 유물·유적 가운데 사방불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사방불이 표현된 석탑 또는 석조물로는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사면석불(四面石佛),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방불, 경주경찰서 앞뜰 석탑 2기의 사방불,

경주 동천동 석탑사방불, 국립경주박물관 석탑 5기에 새겨진 사방불,

안강(安康)금곡사지(金谷寺址) 사방불, 경주 호원사지(虎願寺址) 사방불 등이 있다.

 

이 석조 유형물들의 정확한 성립연대는 알지 못하지만,

굴불사지의 사면석불만은 삼국유사에 언급이 있어서 대강 그 성립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경덕왕이 백률사(栢栗寺)에 행차하기 위해 산 아래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땅을 파게 하였더니 사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이에 절을 창건하고 굴불사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한다면 굴불사지의 사방불은 742(경덕왕 1)에서 764년 사이에 발견된 것을 알 수 있다.

굴불사의 사면불은 조성 시기가 통일신라 시대로 밝혀졌지만,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은 백제의 석불상이며

또한 건립시기에 대하여 문헌상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조각된 기법으로 볼 때 이 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방불의 사면에 어떤 부처를 모시는가에 대해서도 이론(異論)이 많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풍수지리설의 오행 사상과 결합하여

오방불(五方佛)이라는 독특한 사방불 사상이 발달했다.

 동서남북 사방에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이 배열되었고,

중앙에는 비로자나불이 자리를 잡았다.

 8세기 이후에는 신라에서 약사신앙과 화랑들에 의해 신앙이 되던 미륵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사방불이 동() 약사불·() 미륵불·(西) 아미타불·

() 석가모니불로 재편되었고 중앙에는 비로자나불이 자리 잡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확인되고 있는 사방불의 경우 동방 약사불, 서방 아미타불은 거의 고정적이나

 남과 북은 미륵과 석가 혹은 석가와 미륵 등 일정하지 않으며,

 밀교 경전에서의 사방불과는 더더욱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당시 불교 신앙이 독창적으로 반영된 결과로 판단된다

. 화전리 사면석불은 동방은 약사여래, 서방은 아미타삼존불,

남방은 좌상인 석가모니불을, 북방은 미륵보살로 보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