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15. 16:25ㆍ문화재
보물 제409호 당진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
당진 영탑사는 상왕산(210m) 동쪽 기슭에 있는 가람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주변에는 개심사, 문수사,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여래삼존불 등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영탑사 절 입구에는 연못이 있고 수백년이 된 고목이 늘어서서 일주문을 대신한다.
당진 영탑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현재의 대방(大房) 앞에 5층석탑을 세운 뒤 영탑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현재의 법당 자리에 있던 천연암석에 불상을 조각하고 절을 중건하였으며,
대방 앞 정원에 있던 5층 석탑을 법당 뒤의 바위 위로 이전하였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영탑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1798년에는 지윤(智允)이 유리광전을 중수하였다.
그 뒤 1911년에 신도들이 중수하였으며, 1928년에 이민동(李敏東)이 노전(爐殿)을 중건하였다.
1988년에는 법당을 신축하였고, 1992년에는 화재로 노전이 소실되었으나 최근 복원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당우로는 법당을 비롯, 유리광전·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정면 3칸의 유리광전 안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인 약사여래상이 양각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형 범종이 있다.
또, 법당 뒤에는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16호로 지정된
자연암석을 기단으로 하여 세운 7층 석탑이 있는데,
원래 5층 석탑이었으나 1911년의 중수 때 2층을 더 올려 7층으로 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보물 제409호인 금동삼존불상이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봉안하였다.
유리광전(약사전)
영탑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고려 말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 사찰을 둘러보고 기이한 바위가 빛을 발하고 있음을 심상치 않게 여겨
여기에 약사여래상을 새겨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영험이 잇따라 치병(治病)을 비는 민간 신앙이 성했다고 한다.
일례로 유리광전의 편액을 보면 지은이가 보이지 않는다.
전하는 이야기를 보면 1835년(현종1년) 연천면 대자리에 사는 이씨부인이
지극정성으로 이 약사여래마애불에 백일기도를 드린 후
얻은 아들이 장성하여 8세가 되었을 때 이 아들이 쓴 것이라고 한다.
영탑사 약사여래상
상왕산(象王山) 영탑사 유리광전(琉璃光殿) 내에 모셔져 있는 약사여래상으로,
상왕산 연화봉(蓮花峰)에서 옮겨 온 것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여래좌상의 크기는 높이가 1.8m이며 제작시기 고려 말엽으로 추정된다.
3m 규모의 자연 암석 면에 새겨져 있는 이 불상은 현재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자연 풍화되어 보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거구의 당당한 면모나 광배(光背)를 대신하고 있는
자연석의 웅대하고 기이한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준다.
여래의 얼굴은 둥근 방형(方形: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몸통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다.
두부(頭部)에는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나지막이 솟아 있다.
반듯한 이마 아래로는 활 모양의 눈썹이 선명하며, 반타원형의 두 눈은 반개(半開)하였다.
눈초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양미간에서 뻗은 코는 우뚝한 편이다.
우묵한 인중(人中) 아래로는 적당한 크기의 입술을 부드럽게 다물고 있다.
좌우로는 활짝 펼쳐진 기름한 두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경계가 분명한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여래상은 전체적으로 보아 떡 벌어진 당당한 어깨에 좌폭이 상당히 넓어 균형 잡힌 안정감을 준다.
깊이 있는 조각 수법을 사용하여 입체감이 강조되었다.
어깨와 무릎의 둥근 실루엣을 통해서는 부드러운 양감을 드러내고 있다.
착의 형식을 살펴보면 양어깨를 감싼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으로
대의(大衣: 설법을 하거나 걸식을 할 때 입는 중의 옷)의 양 옷깃이 수직으로 늘어지고 있다.
가슴은 좁게 터 상당 부분 감추었으며, 다리의 옷주름 선과
무릎 위에 내려놓은 양손의 위치는 마멸되어 분명하지 않다.
마모가 되었는지 약사여래의 지물(持物)인 약합(藥盒)은 보이지 않는다.
<칠층석탑>
당진 영탑사 칠층석탑(唐津 靈塔寺 七層石塔)은
영탑사 유리광전 뒤의 자연 암반 위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칠층석탑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당진군사』에는 조선 정조 22년(1798) 연암당 지윤스님이 유리광전을 보수하면서
그 뒤 바위에 5층탑을 세운 후 절 이름을 ‘영탑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원래는 7층탑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후 훼손되어 5층만 남아있던 것을 1920년대에
이 절의 신도들에 의해 다시 7층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창건 내력에 나와 있는 기록과는 다른 기술이다.
자연 암반을 기단(基壇)으로 삼아 7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이 탑은
바위와 탑이 만나는 부분이 조금 어긋나 있어 원래의 자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탑신의 각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1층부터 5층까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처마의 선이 거의 직선을 이루고 있지만,
새로 만든 6층과 7층의 옥개석은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리고
밑면의 받침조각도 얇아서 서로 대조를 보이고 있다.
탑의 상륜부는 지극히 간략화된 모습이다.
칠층탑에서 조망
산신각
영탑사란 편액이 붙은 이 전각은 종무소다. 종무소 바로 옆방에 금동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이다. 불상은 본존불과 협시보살이 함께 주조되었는데 보존상태가 완벽하다.
본존불의 얼굴은 네모난 형태이면서 볼에 살이 풍부하며,
가늘게 내려 뜬 눈, 오똑한 코, 미소를 머금은 작은 입 등은 고려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좌우 협시보살은 모습과 수법이 동일한데, 머리에는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보관을 쓰고 있으며,
크고 장식이 많은 목걸이와 팔찌, 어깨에서 팔에 걸쳐 내려뜨려진 옷자락 등
전체적으로 매우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불상 받침은 연꽃 문양인데, 양쪽의 보살 받침은 본존불 받침에서 나온
두 줄기의 연줄기가 올라가서 만들어진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唐津靈塔寺金銅毘盧遮那佛三尊坐像 )
1964년 9월 5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09호로 지정된 영탑사의 금동불상은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두 보살이 협시하는 불삼존상(佛三尊像)이다.
크기는 51cm이며,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에 관한 명문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조성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또한 언제부터 이 불상이 영탑사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당진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은 1928년 8월 12일
탐욕스러운 일본 총독부 한 순사(이교영)에 의해 도난되었다가 9월 11일 회수되었고,
1975년 6월 30일에는 일본으로 밀반출 하려던 일당(김천덕과 송영식)에 의해 도난되었다가
1976년 12월 2일 회수되어 경찰서 창고에 5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영탑사 종무소가 있는 옆 요사채에 유리벽으로 보호각을 설치하고
새로 조성한 목조탱화와 함께 봉안되어 있다.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은 주존인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이 양쪽에서 협시하는 구도이다.
비로자나불상은 통견(通肩) 형식으로 법의(法衣)를 착용하고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불상은 머리가 몸에 비해 큰 편으로, 상체는 장방형이며
하체는 그 폭이 불상의 어깨 넓이 밖에 되지 않아 안정감이 떨어진다.
비로자나불상은 낮고 편평한 육계(肉髻: 정수리 위에 솟아나온 부분)에
나발(螺髮: 소라 형태의 머리카락) 형식의 머리카락을 하고 있으며,
육계와 머리가 인접한 곳에 중앙 계주(髻珠: 머리카락을 묶는 구슬 장식)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그다지 길지 않는 눈썹과 가늘고 긴 눈, 오뚝한 코, 살짝 다문 입, 적당한 크기의 귀를 가지고 있다.
얼굴은 부풀어 오른 듯한 양 볼과 이중 턱 등 전반적으로 살찐 모습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굴곡진 형태로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불상은 좁고 처진 어깨와 지나치게 좁아진 무릎 등에서 단아한 모습을 느낄 수 있다.
가슴 앞의 법의의 가장자리에는 옷깃이 표현되어 있다.
옷주름은 약간 도식적인 느낌이 없진 않으나 불신(佛身)의 윤곽을 따라 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오른쪽 어깨 위에는 리본형의 띠매듬을 한 법의 자락이 이색적이다.
한편 불상의 법의 자락은 흘러 내려 대좌의 상대(上臺)를 덮고 있다.
대좌는 상대와 중대, 하대를 갖춘 팔각연화대좌(八角蓮華臺座)이다.
상대는 법의로 가려져 있지만, 하대의 복련(覆蓮: 연꽃을 엎어 놓은 모습)과 같은 모습의
앙련(仰蓮: 연꽃이 활짝 핀 모습) 형식을 하고 있다.
중대 각 면에는 세 개의 잎사귀를 맞대어 놓은 듯한 안상(眼象)이 뚫려 있으며,
중대 양쪽 옆면에서 뻗어져 나온 연꽃 줄기는 협시보살상의 연화대좌를 이루고 있다.
하대 윗부분은 복련 형식으로 모서리마다 연잎을 표현하고 그 사이 마다 연잎을 두었으며,
다시 연잎 사이에 작은 연잎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법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형식이다.
하대의 아랫부분 각 면에는 중대의 안상(眼象)과는 다른 형식의 안상이 새겨져 있다.
통견(通肩)으로 입은 법의나 옷주름의 표현은 신라 말기의 양식을 계승하여
형식화가 더욱 진전된 것이며,
왼쪽 어깨에서 내려온 가사 끈의 매듭표현은 고려불상에 나타나는 새로운 요소이다.
@본존과 유사한 신체비례를 보여주는 협시보살상은 얼굴모습과 신체표현, 조각수법이 동일하다.
보살상의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化佛)과 화려한 문양이 부조된 삼면보관을 쓰고 있다.
보관 안으로는 보계(寶髻)가 높이 솟아 있으며 보발(寶髮)이 어깨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손발의 위치는 좌우대칭이며 바깥 손은 가슴 앞에 들고 한 손은 무릎에 대고 있다.
3줄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했고 어깨에서 가는 허리까지 사선(斜線)으로 지나가는
천의(天衣)의 중간에 또다른 천의자락이 걸쳐진 표현이나 허리를 묶는 리본형의 띠매듭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천의표현이나 띠매듭은 송대(宋代)의 불상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삼존상 모두 대좌를 덮으며 수직으로 흘러내린 옷자락이
일정한 간격의 주름을 형성하며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대좌의 상대에는 8면에 각각 꽃무늬를, 하대에는 꽃무늬가 있는 안상(眼象)을 투조했는데
중대에서 좌우로 솟아난 연줄기와 어울려 장식적인 아름다움도 갖추고 있다.
현재 완전하게 남아 있는 삼존상의 귀한 예로서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경직된 면은 있지만 통일신라 말기를 잇는 형식적 특징과
새로운 요소를 동시에 보여주는 고려 전기의 중요한 상이다.
@영탑사 금동비로자불삼존좌상은 주존이 비로자나불이기 때문에
좌협시보살상은 문수보살(文殊菩薩), 우협시보살상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일 가능성이 있다.
불상과 보살상들은 얼굴 표정이 좁고 길어 신체와 비례되며,
또한 단아한 자세 등은 고려시대 중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영탑사의 금동비로자나불의 특징은
대좌까지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고려시대 중기의 불상으로서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좌권인 비로자나불상의 한 예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비로자나불상으로 꼽히는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국보 제233-1호)의 수인은
좌권인이 아닌 오른손이 왼손을 감싸고 있는 우권인의 지권인(智拳印)이다.
왼손이 오른손의 검지를 쥐고 있는 영탑사의 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이 좌권인을 한 불상은 많지는 않지만
경주 불국사 비로자나불좌상(국보26), 밀양 천왕사 석조비로자불좌상(보물제1213호).
상주 남장사 철조비로좌나불좌상(보물제990호),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불좌상(보물제542호), 등에서 볼 수 있다.
수인의 위치가 달라진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학자들은 불상 제조시 도형(圖形)의 오류에 기인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에 주불이며,
화엄학의 교리로 본다면 법계를 상징하는 오른손이,
중생계를 의미하는 왼손을 감싸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지며,
사실 대부분의 비로자나불상이 이를 따르고 있는 것이 반증이라고 사료된다.
협시 보살상의 얼굴 표현이나 대좌 중대의 안상 형식 등은
중국 요(遼)나라 불상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어서 주목된다.
대웅전
<대웅전>
측면3칸, 정면 5칸의 다포식팔작지붕이다.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모시고 신중탱과 범종이 있다.
옛 법당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다고 한다.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좌측에 관음보살, 우측에 지장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석가모니불
관음보살
지장보살
신중탱
영탑사 법종
지방문화재 219호로 지정된 동종(銅鍾)은 조선시대 조성된 것으로
영탑사 범종은 종(鐘)의 표면에 「1760년 2월 가야사 법당 금종을 백근의 금을 녹여 만든다
(乾隆25年 庚辰2月 伽倻寺法堂金鍾百斤金入重造成也)」는 기록이 있고,
덕산ㆍ홍주ㆍ면천의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이 있다.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 이구 (李球. 1788-1836)의 묘를 쓰기 위해 불태운 절이다.
어떻게 해서 그 절의 금종이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적묵당
좌로부터 대웅전, 종무소, 요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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