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24. 21:45ㆍ국내 명산과 사찰
국보 제312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慶州南山七佛庵磨崖佛像群)
@경주 남산 고위봉(高位峰: 해발 494m) 중턱에 있는 칠불암은 마애삼존불과 사방불로 유명해진 암자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유물들로 보아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남산 내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불상을 갖춘 암자다.
유구(遺構)의 상태로 보아 원래는 석경(石經)을 벽면으로 세운
일종의 석굴사원(石窟寺院)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칠불암이라 부르게 된 것도 마당에 있는 바위에 삼존불(三尊佛)을 비롯하여
사방불(四方佛)이 조각되어 있어 일곱 분의 여래를 모신 암자라 하여 칠불암으로 불려왔으며,
지금의 암자는 1930년대에 세워졌다. 이 칠불은 조각 수법이 빼어날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방불의 연구에 귀중한 유물이 된다.
또, 이 절의 위쪽 신선바위[神仙巖]에 부조된 반가상(半跏像)을 한 보살상도
매우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칠불암의 삼존마애불과 사방불은 국보 제312호로,
신선암의 마애보살반가상은 보물 제199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인법당(因法堂)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요사채 등이 있는데,
산신각에는 특이한 모자를 쓴 산신탱화가 있었으나 분실되었다.
또한, 이 암자에는 칠불 외에도 폐탑의 탑재를 모아 올린 3층 석탑 1기와
옥개석으로 보이는 6개의 석재, 여덟 겹의 연꽃이 새겨진 배례석(拜禮石)이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석재유물과 기왓조각들이 있는데, 이들은 거의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대안당(大安堂)>
칠불암 가는 길 첫 번째 만난 암자다. 처음에는 이곳이 칠불암인 줄 알았는데
편액을 보니 <대안당(大安堂)이다.
이 암자는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대사가 머물면서
대안(大安)대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도량으로 전하고 있다.
대안(大安)은 신라의 삼국 통일시절 원효와 함께 활동하던 고승이다.
진평왕부터 문무왕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신라 불교는 크게 발전하였다.
당시 신라 불교계에는 원광, 안함, 자장, 의상으로 이어지는 왕실불교의 흐름이 있었으며,
이와 달리 혜공, 혜숙, 원효, 대안과 같은 서민불교의 흐름도 있었다.
서민 중심의 포교활동을 펼쳤던 대안은 괴상한 옷을 입고 늘 저잣거리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그는 평소에 구리로 만든 밥그릇을 두드리며 ‘대안(大安)’, 즉 ‘크게 편안하라’라고 외치고 다녔는데,
이로 인해 그의 이름은 ‘대안’으로 불렸다. 그가 ‘대안’이라 외치고 다닌 것은
오랜 전란으로 심신이 지친 백성들에게 심리적으로 평안함을 주려는 방편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대안대사와 더불어 신라의 대중교화의 선구자로 두 분의 기담이 전하는 데,
한 분은 등에 삼태기를 지고 길거리에서 대취하여 노래하고 춤추었던 혜공대사와,
둘은 소성거사를 칭하며 바가지를 두드리며 무애가를 부르며 길거리를 돌아다녔던 원효대사다.
대안당을 지나 칠불암 가는 길은 대숲 터널을 지나간다.
필자가 방문하는 이날은 초파일을 앞두고 절에서 행하는 행사와
설상가상으로 등산객들로 무척이나 분잡스러워 사진촬영이 상당이 힘들었다.
삼성각
동쪽에서 북쪽으로 4m 정도의 돌 축대를 쌓아 법단을 만들고 그 위에 사방불을 모시고,
1.74m 간격을 둔 높이 5m 너비 8m로 병풍처럼 솟아 있는 절벽 바위 면에 삼존불을 부조했다.
원래는 보물 제200호로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국보 제312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으로 승격되었다.
(전면의 이 여래는 사방불의 동면으로 약사여래다)
마애 삼존불상은 4.26m 높이의 바위 면에 꽉 차게 부조한 마애불로서,
거의 환조(丸彫)에 가까운
고부조(高浮彫: 모양이나 형상을 나타낸 살이 매우 두껍게 드러나게 한 부조)로 되어 있다.
본존은 높이가 2.6m나 되는 거대한 좌상이며, 두 협시보살도 2.1m로 인체보다 훨씬 장대하다.
본존은 머리가 둥글고 크며 소발(素髮)에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하여 박진감이 넘치며,
부풀고 곡선적인 처리로 자비로운 표정을 띠고 있다.
즉, 부풀고 두껍게 처리한 눈두덩이라든가 쌍꺼풀진 오른쪽 눈,
부드러우면서도 양감 나게 처리한 코, 세련된 입,
어깨까지 닿은 긴 귀 등 자비롭고 원만한 얼굴 모습을 성공적으로 묘사하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으며, 어깨는 넓고 강건하여 건장한 가슴,
가는 허리와 더불어 당당하며 박진감 넘치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두 손이 유난히 큼직하다.
(사방불에 가려 전면촬영이 불가했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인데 상체의 옷 주름은
곡선적인 계단식 주름이며, 옷깃이 반전(反轉)되었다.
하체의 옷 주름은 큼직한 선으로 처리되었는데,
두 다리 밑으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규칙적인 지그재그 무늬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좌는 위로 향한 연꽃잎과 아래로 향한 연꽃잎의 이중 연화 좌로서
단판칠엽(單瓣七葉)은 잎들 사이의 잎에 중간선을 그은 특이한 형태로서,
9세기에 나타나는 독특한 연화문의 조형(祖形)으로 주목된다.
광배는 보주형(寶珠形)의 소박한 무늬를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협시보살은 좌우 모두 같은 모습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비슷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데,
풍만한 얼굴,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 풍만하고 육감적인 체구,
유연한 삼곡(三曲)의 자세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오른쪽 보살은 정병(淨甁)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로 추정되며,
왼쪽 보살은 꽃을 들고 있고, 흐리지만 보관에 보병(寶甁)이 보여 대세지보살로 추정된다.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두는 본존불은
아미타불이기에 칠불암의 삼존불의 본존을 아미타불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사방불의 서면불(西面佛)이 아미타불이므로 석가모니불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두 협시불 모두 본존 쪽을 향하여 몸을 약간 비틀고 있다.
(좌 협시불)
(사방불의 동면과 남면, 본존불 옆은 좌 협시불)
(사방불의 동면)
삼존불 앞의 돌기둥에 새겨진 칠불암의 사방불은
높이가 2.23m 내지 2.42m 정도로 바위 모양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고 있는데,
네 상 모두 연화좌에 보주형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 하였다.
동면상(東面像)은 본존불과 같은 양식으로 통견(通肩)의 법의가 다소 둔중하나
신체의 윤곽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고 있어서 약사여래로 생각된다.
(사방불 남면)
(사방불의 남면)
남면상(南面像)은 여러 면에서 동면상과 비슷하나,
가슴에 표현된 군의(裙衣)의 띠 매듭은 새로운 형식에 속하며,
무릎 위의 옷 주름, 짧은 상현좌(裳懸座)의 옷 주름이 상당히 도식화되었다.
(왼쪽은 사방불의 서면이고, 오른쪽은 북면이다.)
서면상(西面像)은 동면상과, 북면상(北面像)은 남면상과 서로 유사하나,
북면상은 다른 세 불상과 달리 특히 얼굴이 작고 갸름하여 수척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네 상의 명칭을 확실히 하기는 어려우나,
방위(方位)와 수인(手印)·인계(印契)에 의하여 볼 때 일단 동면상은 약사여래, 서
면상은 아미타여래로 볼 수 있다.
(삼존불 앞은 사방불의 북면)
이 불상군의 성격은 사방 석주 각 면에 한 불상씩 사방불을 새기고,
그 앞의 바위에는 삼존불을 새겨 삼존불이 중앙 본존불 격인 성격을 띤
오방불(五方佛)로서의 배치 형식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양식적으로는 풍만한 얼굴 모습, 양감이 풍부한 사실적인 신체 표현,
협시보살들의 유연한 삼곡 자세 등 경주 남산 삼릉계 석불 여래좌상(보물 제666호)이나
경주 석굴암 석굴의 본존불 좌상(국보 제24호),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제121호) 등의 불상 양식과 상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불상군의 조성 연대는 통일신라 시대 최성기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사방불(四方佛) 신앙은 동서남북의 사방에 부처를 모시고 신봉한
신라인의 불국토 신앙의 유형 가운데 하나다. 문헌에 나타난 사방불에 관한 최고의 언급은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에 관한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죽령(竹嶺) 동쪽 약 100리쯤 되는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587년 (진평왕9) 별안간 사면이 방장만 하고 사방에 여래가 새겨진 대석이
하늘로부터 산꼭대기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 사방불은 홍사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예배드리고, 절을 그 바위 곁에 세운 뒤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문경의 사불산에 이 기록대로 사방불로 추정되는 바위는 있지만,
마모가 심하여 기록과 같은 바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방불(四方佛)은 서방의 아미타불만 일정하게 나타나고
나머지 방향에는 소의(所依) 경전이나 종파에 따라 다른 불상이 나타난다.
〈금광명경〉에 의하면 동방 아촉불, 서방 무량수불, 남방 보생불, 북방 미묘성불이 각각 배치되나
〈공작왕주경〉이 유행하면서 동방에 약사불이 나타나는 예도 있다.
〈금강정경〉에 의해 동방 아촉불, 서방 아미타불, 남방 보생불, 북방 불공성취불로 구성된다.
이 기록을 근거로 유사성을 따라 추정하면 칠불암의 사면불은
<금광명경>과 <공작왕주경>으로 근거로 하여 추정해보면
동면은 약사여래, 서면은 아미타불, 남면은 보생불, 북면은 불공성취불로 추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6세기 초 북위부터 수 대에 크게 유행하여 많은 작품이 남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세기 중엽의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보물 제794호)을 비롯한
통일신라 시대의 굴불사지 사면석불 상(보물 제121호)과 경주 남산 칠불암 사면석불 등이 유명한 데
그중에서 칠불암의 사방불은 2009년 국보 제312호로 승격되었다.
(사방불의 북면)
@경주 남산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慶州南山神仙庵磨崖菩薩半跏像)
보물 제199호로 지정된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절벽의 바위 면을 얕게 파고,
고부조(高浮彫 : 모양이나 형상을 나타낸 살이 매우 두껍게 드러나게 한 부조)로 새긴 마애불로,
전체높이는 190㎝이다.
남산의 많은 불상 중 제일 먼저 달빛과 햇빛을 받는다고 하는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절벽의 바위 면을 주형의 감실처럼 얕게 파고,
그 안에 두광과 신광을 갖춘 반가부좌의 자세를 하고 있다.
마애보살반가상 주변에 가구의 흔적과 기와 조각이 산재하고 있어
원래는 목조 전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머리에는 높은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썼으며, 그 위로 보계(寶髻)가 솟아 있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정제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두 볼이 처져 비만한 모습은 근엄한 표정과 함께 남성적인 기풍이 뚜렷하다.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까지 늘어져 둥글게 뭉쳐 있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무릎 폭이 넓어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는데,
천의(天衣)는 약간 비만한 몸의 굴곡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무릎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들어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쥐고 왼손은 엄지와 장지를 맞대었으며,
오른발은 대좌 아래로 내려 연꽃 족좌(足座)를 밟고 왼 다리를 무릎 위로 올려
유희좌(遊戱坐)에 가까운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의 보살상은 시대가 지나면
보타락가산(普陀洛迦山)에 상주하는 관음보살로 표현되는 것이 원칙이다.
대좌는 옷자락이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裳懸座)로서,
옷 주름은 옛날식의 기하학적인 의문(衣文)이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다.
발밑에는 동적인 화려한 구름을 새겨 상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으면서
이 보살상이 천상(天上)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광배는 바위 면을 주형(舟形)으로 얕게 파내어 거신광(擧身光)으로 삼고,
그 내부는 세 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였다.
광배의 윗면은 일단의 턱이 지면서 가로로 길게 팬 자국이 있어
본래는 목조 전실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체의 양감(量感)이 강조된 조각 기법과 섬세한 세부 표현,
장식성의 경향이 엿보이는 점 등에서 이 마애보살상은
전성기 통일신라 조각 양식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 양식이
형식화되어 가는 단계인 8세기 후반 또는 말경의 상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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