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전이 없는 가람 정릉 봉국사

2019. 6. 4. 23:10국내 명산과 사찰

대웅전이 없는 가람 정릉 봉국사

 

@봉국사(奉國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교구 조계사 말사이다.

 1669(현종10) 조선 태조의 둘째 왕비 신덕왕후의 정릉묘가 복원되면서

경국사, 흥천사와 함께 문정왕후 능묘의 원찰로 지정되었던 3대 가람중 하나로

봉국사의 창건 당시 옛 이름은 약사사였다.

봉국사가 1354(고려 공민왕 3)에 나옹(懶翁) 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1395(태조 4)에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당시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가 전각을 지어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약사사(藥師寺)라고 한 것이 창건의 시작이다.

현재 봉국사는 대웅전이 없고 대신 만월보전에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모시고 있고

좌측 편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는 특이한 가람구조다.

 

봉국사는 1468(세조 14)에는 사승(寺僧)들이 중건하였고,

1669(현종 10)에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을 수봉(修封)하고

태묘에 제사를 드리게 되면서 정릉의 사초(沙草)를 새로 하는 동시에

정자각(丁字閣), 안향청(安香廳), 전례청(典禮聽) 등을 새로 세우면서  원찰(願刹)로 지정되었다.

이때 나라를 받든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봉국사로 고쳤다고 전한다.

남양주의 봉영사(奉永寺)와 같이 사찰명에 <()>가 들어 있는 것은

왕실, 또는 왕실의 능묘와 관련된 것임을 의미한다.

1882(고종 19)에 임오군란으로 불탄 것을 이듬해 청계(淸溪)와 덕운(德雲)이 중창하였다.

 

@1898년에는 운담(雲潭영암(永庵취봉(翠峰) 등이 명부전(冥府殿)을 중건하였고,

1913년에는 칠성각을, 1939년에는 염불암(念佛庵)을 창건하였으며,

1977년에는 일주문(一柱門)에서 조금 올라간 곳에 아담한 2층 건물을 지어

아래는 천왕문(天王門), 위는 일음루(一音樓)라는 종루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만월보전(滿月寶殿)을 비롯하여 독성각(獨聖閣), 용왕각(龍王閣),

명부전, 용왕각(龍王閣), 천불전(千佛殿), 광응전(光膺殿)이 있고,

광응전에는 칠성각과 산신각의 두 편액이 함께 걸려 있다.

광응전에는 일반 사찰에서 볼 수 없는 후토(后土) 신을 모시고 있다.




사천왕상은 소박하게 조성되어 있다.  좌로부터 북방 다문천왕과 동방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





<만월보전>

봉국사는 대웅전을 두지 않고 만월보전이 대웅전 역할을 한다.

대개 약사전(만월보전)에는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하고 협시불로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모시는데

봉국사의 만월보전(약사전)에는 좌우에 석가모니불과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명부전(지장전)이 있는데도 지장보살을 만월보전에 모신 특이한 전각이다.


중앙에 약사여래를 모시고 좌측에 석가모니불을 우측에 관음보살을 모셨다.


약사여래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약사여래>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동방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부처의 원만행(圓滿行)을 닦는 이로 하여금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묘과(妙果)를 깨달아 얻게 하는 부처이다.

그는 과거세에 약왕(藥王)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한 12가지 대원(大願)을 세웠다.


(신중탱)


@약사여래에 대한 민간신앙에 따르면 어떤 병은 그의 상을 만지거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기만 해도 효과적으로 치료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약사여래에 대한 신앙이 성행해

탑의 기단이나 1층 탑신에 약사여래의 권속을 조각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거듭되는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하는 기원법회가 자주 열렸다.

오늘날에도 약사여래는 한국에서 석가모니불·아미타불·미륵불과 함께 가장 널리 신봉되는 부처의 하나이다.


 

약사여래는 구원불의 하나인 아축불(阿閦佛 Akṣobhya)과 동일시되기도 하며

동방의 극락세계를 주재하고 있다고 하는데,

일본의 몇몇 종파에서는 그를 또 다른 구원불인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약사여래가 거느리고 있는 권속 가운데 12신장(十二神將)

독실한 불교도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중국의 불교도들은 나중에 그 신장들을 중국 역법에서의

십이지(十二支)와 연관 지어서 생각하게 되었다. (본방 은진사참조)

약사경 藥師經 Bhaiṣajyaguru Sūtra4차에 걸쳐 한문으로 번역되었는데,

그 최초의 번역본은 동진시대(東晉時代 : 317~420)에 나왔다. 티베트어로도 2차례에 걸쳐 번역되었다.




@수락산 흥국사의 만월보전에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이 약사여래는 봉국사에서 모셨던 약사여래로 이런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태조 이성계의 딸로 출가한 여식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이태조가 중병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릉 봉국사에 약사여래를 조성하고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지성의 기도를 드렸는데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었는지 태조 이성계가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이런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많은 참배객이 찾아왔는데

어느 날 봉국사의 약사여래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다행히 수소문 끝에 어느 골짜기에서 이 약사여래를 발견하고 원래 자리로 옮기려 하였지만,

바위 처음 꼼짝하지 않아 옮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부처에게 스스로 절을 택할 수 있도록

나라 안의 이 절 저 절 이름을 나열하였는데 흥국사라는 이름이 나오자 부처가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신 약사여래가 현재 흥국사 만월보전에 모신 약사여래라고 한다.

 

이 설화에 나온 태조 이성계의 딸이 경순공주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는데

이는, 경순공주의 생모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잠들어 있는 정릉을 지키는 원찰이라는 것과

태조 1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과 두 동생 (방번과 방석)이 방원에게 죽자

다음 해에 경순공주가 태조의 권유로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 설화이다.

역사를 사찰과 접목하여 설화로 꾸민 것이 아닌가 사료되지만

경순공주의 출가 내력을 살펴보면 가공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순공주의 어머니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이며, 방번과 방석의 누이가 된다.

 1392(태조 1)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뒤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나자,

전 왕비 한씨의 소생인 여섯 왕자를 제쳐두고 강씨 소생인 제8남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이에 13988월 방원(뒤의 태종)이 자기 휘하의 사병을 동원하여

방석과 그를 보좌하던 정도전 일파를 죽였다(1차 왕자의 난).

이때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도 죽임을 당하자

 이듬해 이성계는 그녀의 신변 보호를 위해 강제로 출가시켰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경순공주가 출가한 절이 지금의 동대문 밖에 있는 청량사인데

그 후 유점사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청량사는

오늘날에도 비구니들의 도량으로 유명하다.

수락산 흥국사에도 같은 전각(만월보전) 이름에 동일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독성각



용왕각


명부전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두고 좌우에 시왕을 모셨다.













천불전




석가모니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광응전

@광응전은 희귀한 전각명에 속한다.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모르나

직지사 등 몇 사찰 전각에서 <광응전>이란 전각명이 흘깃 나오고는 있지만,

그 창건 내력은 기록된 바가 없어 궁금하였다.

우연히 수락산 내원암에서 이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어 이를 기술한다.



수락산 내원암은 영조의 계비(繼妃)인 순정왕후(純貞王後)가 왕손을 얻기 위하여

용파(龍波), 농산(農山), 두 화상(和尙)에게 명하여 이 절에서 2백일 간 기도를 하게 한 일이 있고

그 보람으로 정조(正祖) 14년 순조(純祖)의 탄생이 있자

 同王(동왕) 18년에 칠성각(七星閣)을 짓고 어필로 光膺殿(광응전)이라 下書(하서)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칠성각이 광응전의 이명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봉국사의 광음전에는 칠성각과 산신각이란 두 개의 편액 또 붙어 있고,

 법당 안에는 치성과여래와 산신 그리고 후토신의 조상이 모셔져 있다.

그럼으로 봉국사의 광응전은 후토성모를 모시는 전각으로 사료된다.

후토성모는 대지를 상징하는 토속여신. 곧 지모신(地母神)을 모신 전각인 셈이다.

 또한 후토(后土)는 땅의 모든 신(토지신, 산신, 지신)을 관장하며,

뭇 생명을 낳는 대지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후토는 모든 이의 조상을 의미한다.

후토 신앙은 도가에서는 고대 유교에서 전생 되어 온 후토 신앙을 숭배한다.



@산신례참 경문에는 후토성모, 안제부인, 산신이 등제하는 데

후토성모는 도교 옥황상제 아래 사어 중의 한 분으로 여와씨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복희씨의 여동생 여와씨가 후토이며,

 정확한 명호는 <후토황지기성모원군(后土皇地祇聖母元君)>이라고 한다.

옥황상제가 하늘을 관장하는 신이라면 후토는 대지의 어머니로 만물의 생육과 아름다움을 관장한다.

이는 조상숭배와도 직결되는 믿음으로 중국 각처에는 후토묘가 성행한다고 한다.

 후토성모를 후토부인과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당나라 민간설화인 <후토부인전>에 보면 2천리 땅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묘사되며

묘지를 관장하는 하급신령 후토신이 있습니다.


칠성각




칠성여래(치성광여래)

칠성여래는 손에 금륜을 들고 있으므로 다른 도상과 쉽게 구별되는데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것은 약사여래와 같다.

뒤편탱화에 보관을 쓴 두 분여래가 일광과 월광보살이다.

사진에서 보듯 칠성탱화에는 칠성을 불교화한 칠여래 가 반드시 그려지므로

칠 여래가 그려져 있는 그림의 본존은 칠성 여래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금륜보계치성광여래(金輪寶界熾盛光如來) 또는 금륜불정존(金輪佛頂尊)이라고 한다.


산신

후토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