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17. 19:00ㆍ국내 명산과 사찰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탑
분황사(芬皇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분황사는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으면서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으로 유명하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 간 사찰로 명성이 높다.
선덕여왕 3년(634년)에 지어진 절로서, 원효대사가 거주하면서 화엄경소를 쓴 곳이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경덕왕 14년(755년)에
불상주조의 대가인 강고(强古), 내말(乃末)이 만든 약사여래상이 있었다.
신라에는 예로부터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던 7곳의 가람터가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용궁 남쪽의 분황사이다.
선덕여왕이 창건한 분황사의 ''분황(芬皇)'은 '향기 날 분',
'황제 황'자로 향기 나는 황제란 절이란 뜻이다.
인평(仁平)으로 연호로 바꾼 그해 창건된 분황사는
신라 최초로 여왕에 올라선 것을 내외에 알리는 상징적인 절임을 알 수 있다.
분황사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도 가위 등 여자와 관련된 유물이 있었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알려질 만큼 유명했다.
선덕여왕의 권유로 자장법사도 오래 머물렀으며, 분황사에는 원효의 아들인 설총이
원효의 유해를 부수어 만든 소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설총이 예배를 드리자 돌아섰다고 하는데 고려 당시에도 돌아선 채로 있었다 한다.
원효가 이곳에서 해동종을 완성했다고 하여 해동종을 분황종이라고도 한다.
이 절은 평지 일 탑 일금당의 가람배치로서 다른 사찰에서 보듯
중문, 탑,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 같은 것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절터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치는 않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화쟁국사비적, 삼룡변어정(8각 석정)이라는 우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로 지정된 분황사 약사여래입상 등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쪽에 단정하게 쌓여 있다.
@국보 제30호 분황사 모전석탑
통일신라 이전에 세운 모전탑으로 『동경잡기』에는 ‘분황사9층탑(芬皇寺九層塔)’이라고 되어 있으나
원형은 5층인지 7층인지 9층인지 알 수 없다. 지금은 3층만 남아 있고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탑은 전탑 양식이 유행하여 백제의 미륵사지 목탑구조 모방 전탑과 결합하여
통일신라 석탑의 정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통일신라의 모전탑 및 전탑은 안동, 의성, 제천 등지에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에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어갔다고 한다.
이 탑은 바닷속의 안산암을 갈아서 쌓은 것으로 1915년 탑을 수리하다가
사리장치가 든 돌 상자 속에서는 구슬과 금은으로 된 바늘, 고려 시대 화폐가 발견됨으로써
고려 시대에도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바늘은 탑을 건립한 선덕여왕과 관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에는 1층 탑신 4면에 감실을 만들고 돌문을 달았으며
이 입구마다 좌우로 수문장인 금강역사상이 있고, 탑에는 돌사자가 놓여 있다.
금강역사상은 조각이 아름답고 입체감이 두드러져 삼국시대 조각기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분황사 탑은, 높이 9.3m로, 돌을 벽돌[塼]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서,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뒤에 몇 차례 보수되어 어느 정도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분황사 탑은 한국 최초의 석탑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기단(基壇)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 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塔身) 밑이 약 36㎝ 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 폭보다 약간 좁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 있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조각의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가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층탑신 4면에 감실을 개설한 예는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에서
초층탑신 4면에 통로를 개설하고 그 중심에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를 세운 점과 서로 통하며,
이러한 형식은 목탑에서 초층탑신 내부가 공간이 되고
4면에 내부로 통하는 문을 개설하는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층과 3층 탑신은 초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서 장중한 감을 준다.
옥개석(屋蓋石)은 벽돌 1장의 두께로 처마로 삼고 아래위에 탑신을 향하여
감축되는 받침과 낙수면(落水面) 층단이 있다. 받침은 초층부터 6단, 6단, 5단이며,
낙수면 층단은 초층과 2층이 10단이고, 3층 상면은 층단으로 방추형을 만들었으며,
그 정상에는 화강석으로 된 앙화(仰花)만이 남아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때 제2층과 제3층 사이에서 석함(石函) 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각종 옥류(玉類)와 패류(貝類), 금·은제의 바늘, 침통(針筒)·가위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상평오수(常平五銖) 등 옛 화폐가 발견되어
고려 숙종이나 예종 연간에 탑이 조성되었음을 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지금 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이 창건 당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석정>
분황사 경내, 당시의 우물 석정에는 아직도 물이 마르지 않고 있는데
이 우물 속에 호국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1965년 우물 속에서
14구의 목이 부러진 석불들이 출토되었고 이 석불들은 경주국립박물관 경내에 전시되고 있다.
석정은 신라 샘의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초석의 규모로 보아 당시에는 대단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옛적에는 보광전이란 현편이 걸려 있었던 것 같은 데 지금은 현판이 보이지 않는다.
법당 안에는 약사불이 모셔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755년(경덕왕 14) 분황사의 약사여래 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0만 6700근이요, 장인은 강고(强古) 내말(乃末)이다.
같은 왕 때 한기리의 여인 희명(希明)의 아이가 태어난 지 다섯 달 만에 눈이 멀어
이 절의 천수대비(千手大悲)에 기도하였더니 눈이 떠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따로 관음전이 없었다면 아마도 보광전에 모신 것이 아니었나 추축해 본다.
1998년 보광전 수리공사 시 해체한 종도리에서 확인된 보광전 중창과
중수 내용을 기록한 상량문(上梁文)에 의하면,
분황사가 지금처럼 사역이 축소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때 약사여래도 화를 당했다.
1608년(광해군 원년) 보광전(普光殿) 등의 전각을 중창하고,
5,360근의 청동으로 약사여래를 주조·봉안하였다.
1680년(숙종 6)에는 허물어져 가던 보광전을 중수하였으며,
상량문은 이때 작성하였다. 지금의 보광전은 조선 시대에 세워졌다.
사리탑 옆에 광배를 갖춘 석조여래인데 설명이 없다.
손에 든 지물이 마모가 심하여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합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석조여랫상은 약사불로 추측된다.
분황사 앞 보리밭,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은 황룡사지 기념관이다.
보리밭 좌측에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의 옛 당간으로 현재
경북 유형문화제 제192호 지정되어 있다.
분황사와 당간지주의 거리를 볼 때 옛적에는 큰 가람이었음을 미루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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