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포석정(鮑石亭)

2019. 5. 15. 21:25국내 명산과 사찰

경주 포석정(鮑石亭)

 

@대한민국의 사적 제1호로 지정된 포석정(鮑石亭)

신라의 제55대 왕인 경애왕(景哀王 924~927)이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끝내 자살했다는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포석정(鮑石亭)은 신라의 별궁이 있던 자리로, 옛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석조구조물만 남아 있다.

남북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환경을 최대로 활용하고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에 인공적인 기술을 가미하여 이룩한 조화미는

 신라 궁원기술(宮苑技術)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포어(鮑魚: 전복) 모양의 수구(水口)뿐인데

일본강점기에 임의로 보수되어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다.











포석정은 원래 중국 고대 강가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악귀를 쫓는 행사의 하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에서 유래하였다.

 353년 중국의 왕희지가 쓴 난정서문(蘭亭敍文)에 보면

맑은 시냇물을 아홉 구비로 돌아 흐르게 하여 흐르는 물속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게 하되

 술잔이 아홉 구비를 다 지날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술 3잔을 마시게 하였다.

포석정은 전복을 닮은 형상이지만 이때 술잔의 모양은 뿔 모양이었다.

포석정의 면적은 7,432m²이며, 폭은 약 35cm, 깊이는 평균 26cm, 전체 길이는 약 10m이다.

 포어형(鮑魚形)으로 좁은 석구(石口)를 두르고,

한쪽에서 계류를 끌어들여 다른 쪽으로 흘러나가게 되어 있다.

원래는 남산계곡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 돌이 있었고,

그곳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신라 시대에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는 삼짇날에 술잔을 물에 띄워 두고,

왕과 귀빈을 비롯한 참석자가 물길을 따라 앉아서 술잔이 돌아오기 전에 시를 짓던 놀이를 일컫는다.

유상곡수라는 시회(詩會)는 중국 동진 시대부터 유행했던 것으로,

통일신라 시대에 화려했던 궁정 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연회를 행하던 장소보다는 의식이 행해졌던 곳이라는 설이 더 힘을 받고 있다.


 

@신라말의 혼란기에 제55대 왕으로 즉위한 경애왕(景哀王 924~927)

 재위 4년 만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재위 기간에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고려 왕건과 교류를 하기도 했고, 황룡사에서 300여 명의 선승이 참여한 모임인

백좌통설선교를 개최하기도 했다.

백좌통설선교는 대규모 선승모임의 시초로 일컬어진다.

능은 경주 해목령에 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 곡수연(曲水宴)을 차리고

아름다운 궁녀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번화곡(繁華曲)>.

 그 곡조가 매우 구슬퍼서 이 노래를 진후주의 옥수후정화 玉水後庭花에 비했다고 한다.

이 시는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106 악고와

대동운부군옥 大東韻府群玉18에 전해지고 있다.

풍전등화 같은 난세에 외롭고 암울했던 심정을 토한 것일까.


 

祇園實際兮二寺東 (기원실제혜이사동)

兩松相依兮蘿中 (양송상의혜나중)

回首一兮花滿塢 (회수일혜화만오)

細霧輕蕓兮幷濃 (세무경운혜병몽롱)


@(): 담장이 넌출/@(): , 마을

@(): 배춧과에 속하는 두해살이풀. 봄에 피는 노란 꽃으로 유명하다. 평지, 채종유라고 불린다.


 

기원정사와 실제사, 두 절의 동쪽에

소나무 한 쌍이 등 넝쿨 속에 기대 있도다.

머리 들어 한 번 바라보니 꽃이 언덕에 만발했는데,

옅은 안개와 유채꽃이 둘 다 이슬이 가득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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