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토함산 불국사(2/2)

2019. 5. 13. 21:05국내 명산과 사찰

경주 토함산 불국사(2/2)

총림이 아니더라도 보물급 불상을 모시고 있는 사찰은 많다.

그러나 국보급으로 지정된 불상은 그리 많지 않은데

경주 불국사는 신라불교의 보고(寶庫)라는 이름에 걸맞게 2기의 국보급 불상이 있다.

비로자나불좌상과 아미타불좌상이다.

특히 비로자나불의 수인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도 통상 일반사찰에서 볼 수 있는 수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모신 법당이다. 751년경 18칸으로 건립되었으며,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60년에 중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73년 불국사 복원 당시 신라 때의 기단과 초석 위에 세웠다.

건축양식은 조선 후기에 속한다.

비로자나부처(毘盧舍那佛)님은 화엄세계(華嚴世界)의 본존불(本尊佛)로서

부처의 지혜가 태양과 같이 밝고 광대무변함을 상징한다.

이 금동 비로자나불좌상은 국보 제26호로 8세기 중엽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이다.

 당시의 탁월한 주조(鑄造)기술을 보여주는

이 불상의 높이는 1m 77cm이다. 원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국보 제26)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 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 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 모양과는

일반사찰에서 볼 수 있는 수인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의 주불이며,

 화엄학에는 왼손은 중생계(衆生界), 오른손은 법계(法界)를 상징한다고 한다.

따라서 팔공산 동화사 석조비로좌나불좌상(보물제244)이나

괴산 각연사 석조비로좌나불(보물제433)과 같이 대부분 사찰에 모신 비로좌나불은

석조, 목조, 금동을 가리지 않고 오른손이 왼손 검지를 감싸고 있는데

국보로 지정된 불국사의 이 비로자나불의 수인은 이와 반대로 취하고 있다.



참고로 위와 같이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고 있는 비로자나불이 있는 곳은

김천 직지사 비로자나불, 밀양 천왕사 석조비로자불좌상(보물제1213).

상주 남장사 철조비로좌나불좌상(보물제990),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불좌상(보물제542),

당진 영탑사금동비로자불삼존좌상(보물제409) 등이 있는데

향후 이에 대한 연구검토가 따라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불국사의 이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 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사리탑(舍利塔:보물 제61)

불국사 비로전 좌측 보호각에 보존된 사리탑으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 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 모양의 돌을 위 · 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 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탑신(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누어진 4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돋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 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 장식은 일부만 남아 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 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본강점기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나한전(羅漢殿)

부처님의 제자상을 모신 곳으로 열여섯 분을 모셨으므로 십육 나한 전

또는 16 응진전(十六應眞殿)이라고도 한다.

1593년 왜구의 침략으로 타 버린 뒤 1647년에 나한상을 조성하고 전각을 세웠으며,

1760년 중창 불사 때 현재의 곳으로 옮겼으며 1973년에 중수하였다.






극락전(極樂殿)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으로 이 법당은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한 750년경 6칸으로 건립되었으나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린 것을 1750년에 중창에 중창하고 1925년에 중수하였다.

건축양식은 조선 후기의 다포계이며, 정면 3, 측면 3칸의 이 건물은

 안에 높은 기둥 네 개를 세웠고, 안쪽 두 기둥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세워 벽화(壁畵)를 그렸다.

 본래의 벽화는 1514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고, 지금의 후불벽화는 1973년 중건 때 조성한 것이다.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세 줄로 된 16단의 계단이 있으며,

48개의 계단은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大願)을 표현한다.

 

극락전 앞 석등(長明燈)이 단아하면서도 매우 아름답다.

장명등은 부처님의 자비와 광명을 중생들에게 밝혀주는 등불이다.

대웅전 앞 석등과 그 모양이 똑같아 동시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법당에 모셔져 있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27호로 8세기 중엽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이다.

당시의 탁월한 주조(鑄造)기술을 보여주는

이 불상의 높이는 1m 77cm로 본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국보 제27)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높이 1.77m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 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뚝하다.

신체 표현은 장중하여 건장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데 있는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 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 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 경주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출처/ 문화재청






범종각(梵鐘閣)

범종은 법구사물(法具四物) 중의 하나로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도구이며,

시간을 알리거나 공양과 예배를 알리는 기구이다.

이 범종의 천판(天板)에는 한 마리의 용으로 뉴()를 두고 그 옆에 음통(音筒)이 마련되어 있으며

종신(鐘身) 상부에는 두 점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돌린 상대(上帶)를 돌려는데,

 그 두 점선 사이 칸 안에 연당초문을 돋을무늬로 채우고

그 아래 상대와 같은 대()로 사방위에 네 개의 정방형의 연곽(蓮廓)을 마련하고

각각 그 안에 9개의 꽃잎 가운데 유두(乳頭) 모양의 꼭지 둔 연회(蓮蕾)를 두었다.

 또한, 종신 허리 부분에는 비천인 상 4개를 유곽과 일직선을 이루는 곳에 돋을 문양으로 배치하였고

 그 사이 두 곳에 연꽃문양의 당좌(撞座)를 표현하였으며,

종구(鐘口)에는 상대(上帶)처럼 하대(下帶)를 두었는데 문양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형태는 국보 제29호로 지정된 771년에 만든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높이 333.cm)을 모방해서 만든 근세의 작품이다.








범영루








월산대종사부도


불국사박물관









대웅전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靈山會上圖 四天王 壁畵(보물 제1797)

불국사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慶州 佛國寺 靈山會上圖 四天王壁畵)’

1769년에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와 상궁 김씨 등이 시주하여 제작한 불화로,

 영산회상도와 2점의 사천왕 벽화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조성연대는 영산회상도에만 1769년이라는 연대가 있고

사천왕벽화에는 조성연대 없이 화원의 이름만 적혀 있는데,

영산회상도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이 사천왕벽화를 그리는 데도 참여하였고

두 불화에서 인물표현과 채색 등에 유사점이 많은 것을 볼 때

영산회상도와 사천왕벽화는 같은 해에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화는 18세기 중후반 통도사와 봉정사 등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승들이 함께 제작한 것으로,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색감과

안정적인 구도 등 경상도 지역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영산회상도를 구성함에 있어 그림과 벽화가 한 세트를 이루는 구성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조선 후기 불화 조성의 한 면을 잘 보여주는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국보제27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에 광배를 조성해 놓았다.



국보제26호 금동비로자나불좌상에 광배를 붙여놓았다.



삼장보살도(보물 제1933)

이 불국사 삼장보살도는 1739년 밀기(密機), 채원(彩元), 서징(瑞澄) 등이

경주 거동사(巨洞寺) 오주암(五周庵)에서 제작하여 불영사에 봉안하였다는 분명한 화기를 남기고 있어

18세기 전반기 삼장보살도 도상 및 화풍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천장보살이 범협(梵夾) 같은 지물을 들고 있다든가,

지지보살과 지장보살의 협시가 좌우 대칭을 이루며 무장형의 인물을 배치하였다든가 하는 점은

이 삼장보살도가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을 근거로 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팔공산 지역과 구미, 상주 일원의 경북 중북부 지역의 결합된 화풍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더불어 삼존을 동일 선상에 수평으로 나란히 앉힌 구도는 시각적으로 안정을 구가하며,

인물의 세부 묘사력도 섬세하고 정취 하다. 명도는 낮고 채도가 높은 붉은색과

 녹색, 황색, 육색 계통을 주조 색으로 사용하여 종교회화가 지향하는

숭고함과 장엄함을 잘 표출하였다. 물론 앞선 시기의 담백한 담채풍의

맑고 명랑한 색채감에 비해 좀 더 짙고 탁해진 느낌은 있지만,

이는 시대적 미의식과 작가의 취향 등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구사된 선묘는 주로 변화가 드문 일정한 선을 사용하였으나,

머뭇거림 없는 붓질도 유려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강조색으로 사용된 백색은 색감이 또렷하게 돌출되어

평면적인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한 점도 기법상 주목할 만하다.

이렇듯 이 삼장보살도는 모든 면에서 18세기 전반기 불화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며,

이 시기 화풍 및 삼장보살도의 도상 등 불화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