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12. 21:14ㆍ국내 명산과 사찰
경주 토함산 불국사(1/2)
석굴암에서 신라불교 요람을 일컫는 불국사로 향했다.
석굴암에서 도로를 따라 구비구비 고갯길을 승용차로 10여분 내려오면 불국사 입구다.
불국사(佛國寺)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동쪽 토함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이다.
신라시대인 경덕왕에서 혜공왕 시대에 걸쳐 대규모로 중창되었다.
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수축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불타버렸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따르면 불국사는 신라 법흥왕 15년 528년에
왕모 영제 부인의 발원으로 지어졌고,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해 봉안하였다고 한다.
문무왕 10년 670년에는 무설전을 새로 지어 이곳에서 화엄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모습, 오늘날 불국사의 상징물로 알려진 석탑(석가탑·다보탑)이나
석교 등의 축조를 포함한 대규모 중창이 이루어진 것은 신라의 재상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 권5 〈제9 효선〉(孝善第九) 〈대성효이세부모 신문대〉(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에는
김대성을 신라 신문왕 때, 혹은 경덕왕 때의 사람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오늘날에는 경덕왕 때의 사람이며 불국사의 창건도 경덕왕 10년의 일로 보고 있다.
일주문(一柱門)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에서 첫 번째의 문으로 일주(一柱)라는 명칭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불국사 일주문은 원래 자리는 아니지만
1973년 중창 때 진입의 편의를 위해 현 위치에 조성되었다. 조선 시대 다포식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십이연기 불교의 윤회설에 따라 김대성 자신의 전생 부모님을 위해 석굴암 성불사를,
현생의 부모를 섬긴다는 뜻에서 불국사를 창건하였으며,
공사를 마치기 전에 죽자 국가에서 나서서 완성시켰다고 한다.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고금창기(불국사 창건에 관한 최고의 기록)는
문헌적인 근거가 약해 불국사가 일정 기간에 창건되기보다는
긴 세월 동안 여러 세력에 의해 점차 완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의 일반적 견해이다.
1593년 5월 의병과 승군의 활동으로 큰 피해를 보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왜군의 방화와
파괴 등으로 큰 피해를 입어 2,000여 칸의 대가람이 전소되는 고난을 겪게 되었다.
이후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면서 불국사도 국가의 지원 및 스님과 신도들의 노력으로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중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반야연지)
1963년 3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었다가,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 제2조」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정기준에 따라
「사적」으로 재분류됨에 따라 2009년 12월 21일 이를 해제하고,
동 일자로 대한민국의 사적 제502호로 재지정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불국사다보탑(국보 20호), 불국사삼층석탑(국보 21호),
불국사연화교칠보교, 불국사청운교백운교,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26호),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 등 다량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학술적·역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의 배치를 보면, 대웅전은 중앙에 위치하여 남향하였고,
그 앞에 석등이 있으며, 다시 그 앞의 동서에 각각 석탑 1기가 서 있다.
동쪽 다보탑의 기묘하고 정밀한 형태는 유례가 드물고,
서쪽 석가탑은 예로부터 애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즉 이 탑의 축조를 맡은 백제의 석공인 아사달의 아내 아사녀가
남편을 찾아왔으나 탑이 완성되기 전이라 만날 수 없었다.
조언하기를 불국사 아래에 있는 영지(影池)에 그 그림자가 비친다고 하여
그곳에 가서 기다리다가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서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른다.
천왕문(天王門)
천왕문(天王門) 안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셔있는 전각이다.
가람(伽藍)의 삼문(三門) 중의 하나이다. 비파를 지닌 신(神)은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손에 칼을 쥐고 있는 신(神)은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이다.
서쪽을 지키는 신(神)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龍)을 쥐고 있고,
북쪽을 지키는 신(神)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탑(塔)을 들고 있다.
(좌로부터 동방지국천왕, 남방증장천왕)
사천왕의 구별은 사천왕의 지물(持物)로서 대개 파악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사찰의 천왕문을 보면 팔공산 은해사, 순천 송광사와 같이
서방 광목천왕은 탑과 창을, 남방 증장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동방 지국천왕은 칼을, 북방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는 데 반하여,
조계사, 하동 쌍계사, 김천 직지사나 중국 보타산 혜제사 등의 사천왕은
동방 지국천왕은 비파를, 남방 증장천왕은 칼을, 서방 광목천왕은 여의주와 용을,
북방 다문천왕은 보탑과 당(幢)을 들고 있다.
경주 천왕문의 사천왕상은 조계사의 유형을 같이 하고 있다.
이는 조성 시기가 시대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의 사천왕상이 들고 있는 지물은 주로 병장기로서
칼, 화살, 창, 금강저(金剛杵 : 악마를 깨뜨리는 무기) 등과 같은 것이며
북방 천왕의 경우 반드시 탑을 받들고 있지만, 이에 반해 조선 후기로 오면서 크게 변화하여
비파, 칼, 용과 여의주, 당과 탑으로 정형화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원대 라마교 약사칠불의궤공양법(藥師七佛依軌供養法)의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
(본방 고창 선운사 사천왕상 참조)
(좌로부터 서방광목천왕, 북방다문천왕)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좌세는 특이한 편이다.
대체로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올려 어그러진 얼굴과 검은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형태의 악귀가 받들고 있다.
다른 한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있거나 사람의 배 부분을 밟고 있다.
조선 시대 이전에는 주로 동물을 밟고 있는 데 반해
조선 시대에는 민간인의 형태 또는 전형적인 악귀의 모습을 취한다.
양쪽 발밑에 모두 8구의 악귀를 밟고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밟지 않고 있는 예도 있다.
불국사의 사천왕상은 전례(前例)를 취하고 있다.
(국보 제23호)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국보 제23호)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 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랫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이는 반원 아치 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범영루(泛影樓)
범영루는 750년경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건립하였고
1593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것을 1612년과 1688년에 각각 중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3년 불국사 복원 때 정면 1칸, 측면 2칸, 3층의 옛 모습 그대로 중건한 것이다.
범영루에 지금은 법고(法鼓)가 매달려 있으나
원래는 범종각(梵鐘閣)으로써 범영루는 범종각의 이름이다.
누각의 모양을 하였으므로 루(樓)라 하였고
범영(泛影)은 범종의 소리를 그림자에 비유하여
범종의 소리가 온 누리에 번져서 넘치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최초의 이름은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한다.
이는 수미산(須彌山) 모양의 팔각(八角)정상에 108명이 앉을 수 있도록 누를 짓고
아래는 오장간(五丈竿)을 세울 수 있도록 설계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수미산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 정상은 욕계(欲界) 33천의 위이다.
108이라는 숫자는 인간의 번뇌를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수미범종각이라는 이름은 소리가
33천의 온 세상에 울려 퍼져 인간의 모든 번뇌를 씻어 없애주는 것을 뜻한다.
(국보 제22호 연화교및 칠보교)
안양문(安養門)은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전으로 통하는 중문(中門)이다.
연화교, 칠보교(국보 제22호)를 올라오면
이 문으로부터 아미타부처님의 세계인 극락정토가 전개된다.
‘안양’이라는 이름은 ‘극락’을 뜻한다.
751년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세워진 이 문은
1593년 임진왜란 때 타 버린 것을 1626년과 1737년에 중건했다.
현재 안양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되었다.
1964년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서 고려 건축양식을 채택하였고
강릉 객사문과 도갑사 해탈문을 참고한 것이라 하겠다.
연화교(蓮花橋) 칠보교(七寶橋) (국보 제22호)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 동안 스쳐 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 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경주불국사 가구식석축(慶州佛國寺架構式石築)(보물 제1745호)
경주 불국사는 신라의 동악인 토함산 서 측 기슭에 위치한다. 불국사는 북측이 높고 남측이 낮으며,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적 조건에 맞추어 석축을 가구식으로 조화롭게 쌓아
평탄한 대지를 조성하고 정연하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사역은 크게 동쪽의 대웅전 영역과 서쪽의 극락전 영역으로 구분되며,
대웅전 뒤쪽으로 강당인 무설전이 있고, 그 뒤 높은 지대에는 관음전과 비로전이 위치한다.
불국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김대성이 751년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774년 (혜공왕 10)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는 기록이 있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528년(법흥황 15)에
불국사가 세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때가
527년(법흥왕 14)임을 생각할 때 대대적인 불사가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되며,
현존하는 유구들이 통일신라 시대 이후의 것으로 볼 때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불국사의 창건으로 볼 수 있다. 창건 이후 불국사는 임진왜란 전까지 여러 차례 중창과 중수가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2,000여 칸의 건물들은 모두 전소되고 석조물만 남았다.
창건기의 석조물로는 석축, 연화·칠보교, 청운․백운교, 다보탑, 석가탑, 석등, 사리석탑,
당간지주, 석조, 각 건물의 기단과 초석 등이 있다.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사찰에서 의식이 있을 때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단다. 당을 매다는 긴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양쪽에 세운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나란히 서 있는 2쌍의 당간지주 중 동쪽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이지만,
서쪽 당간지주는 기둥 크기와 제작수법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각기 다른 부재를 후대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국사 경내 입구 대석단 앞에 동서 방향으로 2쌍이 나란히 서 있다.
두 쌍의 당간지주 가운데 서편 당간지주는 좌우 기둥의 크기와 제작수법에 차이가 있어
각기 다른 부재를 후대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편 당간지주는 전반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다고 하겠으나
양 기둥의 하부가 절단된 것을 1924년도에 시멘트로 접합하였고 풍화가 진행되고 있다.
원래의 위치에 남아 있는 동편 당간지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불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석조유물일 뿐 아니라, 전체적인 조형이나 장식적인 의장면에서
통일신라 시대 당간지주의 양식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편 당간지주는 당간지주의 원래 용도가 단절된 조선 시대에 이르러
괘불을 현괘하기 위한 용도로 다시 고안된 사례로 중요한 문화사적 의의를 지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양 기둥의 양식이나 제작연대가 다른 것을 조합하고 있어
조형성이 다소 떨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웅전 (보물 제1744호)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多包系)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쌓은 기단은 지대석(地臺石)·면석(面石)·갑석(甲石) 등을 고루 갖춘 것으로
4면의 중앙에 계단 1개씩을 두고 다듬은 주춧돌을 놓았다.
내부는 안두리기둥[內陣柱]과 바깥두리기둥[外陣柱] 을 세웠으며,
안 두리기둥은 모두 고주(高柱)로 하고 뒷면 고주 사이에 후불벽(後佛壁)을 설치하였으며,
이 앞에 불단(佛壇)을 마련하고 불상을 모셔놓았다.
기둥은 단면을 원형으로 만들고 민흘림으로 처리하였으며,
바깥 두리기둥의 윗몸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두르고
바깥쪽은 3출목(三出目) 7포작(七包作), 안쪽은 4출목 9포작의 다포계 공포(栱包)를 짜 올렸다.
중앙 어간(御間 : 중앙간) 기둥머리에는 용머리를 돌출시켜놓았다.
또 첨차의 쇠서[牛舌] 위는 연꽃봉오리와 봉황 머리를 조각하여 화려한 장식으로 꾸미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불전 건축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특징이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으며, 금모로 단청을 칠하였다.
한편, 이 건물은 1765년(영조 41)에 중창(重創)된 것인데,
중문(中門)인 자하문과 함께 당시 불국사의 건축을 대표하고 있다.
이 건물의 앞에는 국보로 지정된 다보탑과 석가탑이 좌우로 놓여있고,
둘레에는 1973년에 복원된 회랑(回廊)이 둘려 있어서
부처를 모신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해 놓고 있다.
2011년 12월 30일 보물 제1744호로 지정되었다.
#수미단(須彌壇) 가운데 안치된 목각(木刻)의 석가모니 불상 좌우에는
목각의 미륵보살(彌勒菩薩)상과 갈라보살(羯羅菩薩)상이 협시(脇侍)하고 있고,
그 좌우에는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두 제자상(弟子像)이 모셔져 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은 미래의 부처이며, 갈라보살(羯羅菩薩)은 과거의 부처이다.
이는 과거·현재. 미래의 삼세(三世) 부처님이 불국사라고 하는 부처 세계에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석가상(釋迦像)과 두 보살상(彌勒菩薩 . 羯羅菩薩) 그리고 두 제자상(像)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복장기(腹藏記)에 의하면 이 5구(五軀)의 상(像)은 681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3년 임진왜란 당시 대웅전이 소실(燒失)되었을 때, 함께 불에 탔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다섯 구의 상은 1659년 대웅전을 중건할 때 새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730년과 1769년에 각각 도금(鍍金)하였다. 대웅전은 681년 4월 8일 낙성(落成)되었으며
1436년~1470년. 1564년에 중건하였고, 1765년에 중창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이때 세워진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에 다포계(多包系)의 팔작(八作)지붕 건물이며,
내고주(內高柱)와 뒷면 고주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설치하여 벽화(壁畵)를 그렸다.
조선 후기 불전(佛殿) 건축의 대표적 건물이다.
(대웅전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靈山會上圖 四天王 壁畵(보물 제1797호))
불국사 대웅전은 창건 당시 기단과 석등 등의 석조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유구 위에 영조 41년(1765)에 중창된 건물로 중창기록과
단청에 대한 기록이 함께 보존된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 건물로 기둥을 생략한
내부 공간 구성 및 살미첨차의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 조각,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
내·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불전으로 그 가치가 크다.
‘불국사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慶州 佛國寺 靈山會上圖 및 四天王壁畵)’는
1769년에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와 상궁 김씨 등이 시주하여 제작한 불화로,
영산회상도와 2점의 사천왕 벽화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조성연대는 영산회상도에만 1769년이라는 연대가 있고 사천왕벽화에는
조성연대 없이 화원의 이름만 적혀 있는데, 영산회상도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이
사천왕벽화를 그리는 데도 참여하였고 두 불화에서 인물표현과 채색 등에 유사점이 많은 것을 볼 때
영산회상도와 사천왕벽화는 같은 해에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화는 18세기 중후반 통도사와 봉정사 등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승들이
함께 제작한 것으로,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색감과 안정적인 구도 등
경상도 지역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영산회상도를 구성함에 있어
그림과 벽화가 한 세트를 이루는 구성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조선 후기 불화 조성의 한 면을 잘 보여주는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다보탑(多寶塔:국보 제20호)
다보탑과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절 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 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운 3층 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다보탑의 구조)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1916년 이전의 다보탑 모습(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당하여,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 있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석가탑)(국보 제21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 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다보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각 10.75m, 10.29m로 비슷하다.
탑은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 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떠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추어올려 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16년의 석가탑 모습/불국사 홈피에서)
1966년 9월에는 안타깝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 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 장식을 본떠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무설전(無說殿)
경론(經論)을 강술(講述)하는 강당,
말로써 경론을 강술하는 곳 임에도 무설(無說)이라고 한 것은
진리의 본질과 불교의 깊은 뜻이 언어라고 하는 수단으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임을 표현한 것이다.
670년 개창(開創)되자 중국에서 돌아온 의상(義湘) 대사가 최초로 강론을 하였다.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48년과 1708년에 중건하여 1910년까지 보존됐으나,
그 뒤 허물어진 채 방치되었다가 1973년 불국사 복원 때,
유지(遺址)의 기단 위에 옛 크기대로 32칸으로 지은 것이다.
건물 양식은 맞배집으로서 조선에 속한다.
무설전 법당에는 교각지장보살을 모셨다.
무설전의 영상회상도
관음전 가는 돌계단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조선 초기(1400년경) 건축양식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은 이승에서 고난받는 중생의 소리를 눈으로 보고,
그 고난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이와 같은 관음보살의 신앙은 대표적인 민간신앙의 하나다.
원래 992년 전단향목(栴檀香木)으로 만든 관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1674년과 1701년 그리고 1796년에 각각 개금(改金)을 하였기에
이로써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관음전이 불에 탈 때도 관음상은 안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제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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