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석굴암

2019. 5. 10. 20:52국내 명산과 사찰

경주 석굴암

40여 년 만에 경주 석굴암을 찾아갔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옛적 코흘리개 학창시절에는 수학여행의 단골 코스였고,

그 후에도 석굴암과 불국사라고 하면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들어왔던 곳이기에

 경주를 여러 번 내려갔지만, 석굴암과 불국사는 다 본 것처럼 느껴져 생략했는데

 이번 경주 남산의 마애불 찾아가는 길에 옛적 생각을 해가며 둘러 보았다.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있는 석굴(石窟)로서

국보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경덕왕 10(751),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 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민족통일의 염원을 담아 1989421일 불국사 월산(月山)스님이 첫 타종을 했다는 불국대종각).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서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하여 석불사가 현재의 석굴암으로 여겨지고 있다.

 석불사에는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한다.

그 뒤로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 중수하거나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고,

 정선은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일주문의 이 현판은 호남의 대표 서예가로 추앙받는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선생의 글씨라 한다.)

 

석굴암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석굴이며, 일제강점기,

1912년부터 1915년까지 3년간 걸쳐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공사가 있었다.

첫 번째 수복 때 석굴암은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고 한다.

천장이 새서 불상은 비를 맞고, 주변의 불상 배치도 불분명했으며

전체의 반 이상이 돌과 흙에 파묻혀 있었고

그 틈새마다 잡초와 넝쿨, 이끼가 덮여 있었다고 한다.


(일주문에서 석굴암까지는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다.)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조립·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해방 이후 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간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어,

현재는 일본인들에 의한 부실 복원에 따른 문제점을 해결하고,

또한 습도에 의한 부식방지를 위해 유리 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석굴암 아래에 있는 수광전이다.)   

@석굴암의 구조는 방형으로 전실(前室)을 지나 통로를 지나면 원형 굴이 나타난다.

천장은 돔형으로 밖에서 보면 그 위에 흙을 덮은 모양이다.

너비는 좌우 약 6.7, 전후 약 6.6, 입구의 넓이 3.35,

치밀한 건축적 계산 하에 설계되어 만들어졌다.


(수광전의 연등)

천장은 돔형으로 되었고 중심에는 연판(蓮瓣)을 새긴 둥글고 깨진 돌로 눌러놓았는데,

그 교묘한 구조와 우아한 조각은 놀랄 만하다.

그리고 이 석굴암 옆에 보면 굴이 있는데, 이 굴에서 문무대왕릉과 연결되는 길이 있다.

 

(수광전의 수각)


내부에서는 보존을 위해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의 보문사에도 경주의 석굴암과 비슷한 석굴암이 있다.

서울의 석굴암은 1970년부터 1972년까지 2년간 만들었으며

경주의 석굴암보다 약간 작다. 경주의 석굴암은 문이 1개인데

 서울의 석굴암은 문이 3개이며 팔부신장(八部神將)은 생략되었다고 한다.

(본방 보문사 참조)


석굴암 보수시 남은 석물이라고 한다.








석굴암은 유리벽으로 둘러져 있고, 사진촬영도 금지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문화재청과 인터넷에서 펌한 것이다.





(국보 제24호 토함산 석굴의 석조석가모니불좌상)

석굴암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흰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높이 약 3.4의 거대한 불상이다. 석굴 중앙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부좌(趺坐)하였고,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莊重雄麗)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집게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을 하였고,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成道相)이라고 한다.





1990년 석굴암


(보문사의 석굴암의 좌대는 경주 석굴암의 좌대와 동일하다)


(경주 석굴암을 모방한 보문사의 석굴암의 천장도 )




석굴암 전각 앞에 있는 석물로 옛 석등의 하대석으로 추측된다.

지대석은 일부 파손되었으나 복련은 선명하다.


수광전이다.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다.


 



목조 아미타탱을 모셨다.






수광전의 연등






(석굴암 통일대종이 있는 종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