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신흥사(3)

2019. 5. 1. 22:14국내 명산과 사찰




설악산 신흥사(雪嶽山 新興寺 由來)(3)

설악산은 내설악 외설악으로 구분되며 내설악의 대표적 사찰은 백담사이고,

외설악의 대표적 사찰은 신흥사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설악산 신흥사는

신라(新羅) 진덕여왕 6(서기 652)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향성사(香城寺)라고 하였다.

향성사(香城寺)라는 사명(寺名)

불교의 중향성불토국(衆香城佛土國)이라는 글에서 따온 것으로,

중향성(衆香城)은 금강산(金剛山) 철위산(鐵圍山)을 의미한다.

불토국(佛土國)은 부처님께서 교화할 대상적 국토라는 의미다.

 

처음 향성사(香城寺)가 있던 곳은 지금의 켄싱턴호텔 자리이며,

여기에 가람을 세운 후 46년간 존속하다가 효소왕 7(서기 69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옛 향성사가 있던 절터에는 당시에는 9층 석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켄싱턴호텔 앞에 3층 석탑(향성사지 3층 석탑: 보물 제433)만 남아 있어

이곳이 옛 향성사의 가람터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향성사가 화재를 당한 지 3년 후 의상조사께서 능인암(현재 내원암) 터에 다시 중건하고

사명(寺名)을 선정사(禪定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후 946년간 수많은 선승이 이곳에서 수도 정진하여 왔으나

조선 인조 20(서기1642) 또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된 것을

2년 후 영서(靈瑞), 혜원(惠元), 연옥(蓮玉) 세 분의 고승들께서 중창을 서원하고

 기도 정진 중 비몽사몽 간에 백발신인이 나타나서 지금의 신흥사 터를 점지해 주며

 이곳은 누 만대에 삼재가 미치지 않는 신역(神域)이니라말씀하신 후

홀연히 사라지는 기서(奇瑞)를 얻고 절을 중창하니 지금의 신흥사이다.

 절 이름을 신인(神人)이 길지(吉地)를 점지해 주어 흥왕(興旺)하게 되었다 하여

신흥사(神興寺)라 한 것이다.

 

신흥사(神興寺)의 사명(寺名)이 신흥사(新興寺)로 바뀐 이유는

6·25사변 때 고성군 건봉사는 전소되었고 영북지역의 대본산 기능이 마비되었을 무렵

고암, 성준 두 스님의 원력으로 여기 신흥사를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승격하여 업무를 이관하게 되었다.

이후 신흥사는 영동지역의 불교를 새롭게 일으키는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불사를 전개해 나갔다. 속초노인복지관을 개관하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사회복지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춘천에는 불교방송지국을 개국하여 포교에 전념하는 사찰이 되었다.

 이렇게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 신흥사가 과거의 신흥사가 아니라

 새로운 신흥사가 되었다며 신흥사(新興寺)의 귀신 신자(神字)를 시대에 맞게

새로울 신자(新字)로 고쳐 사용하자는 중론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995년부터 영동불교를 새로 일으킨다는 서원을 담아

사명(寺名)을 신흥사(新興寺)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신흥사 홈피에서)


조계선풍시원도량설악산문

일주문 앞에 새로 세운 산문이다. 불교신문에 게재된 기사에 따르면,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주지 우송스님)에 장대한 규모의 설악산문이 열렸다.

 <조계선풍 시원도량 설악산문(曺溪禪風始原道場雪嶽山門)>이라는

현판을 내건 설악산문은 높이 14m에 가로길이만도 17m에 이른다.

지난 20146월부터 12월까지 7개월간 건립 불사를 시행했고,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신응수 대목장이 총괄했다.

특히 김양동(계명대 석좌교수) 서예가가 쓴 현판의 글씨는

신흥사 스님들로부터 선기(禪氣)가 충만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지난 521일 하안거 결제 법회에 앞서 사부대중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설악산문 현판 제막 법회에서 신흥사 조실 무산스님은

 설악산문을 현판 하는 뜻이란 주제의 법어를 결제법어를 대신해 설했다.

 

무산스님은 법어에서 무릇 한 산중에 들어가는 문을 구산산문처럼 무슨 무슨 산문이라 부르는 것은

 거기에 빛나는 선풍이 깃들어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라며

 이 자리는 설악산에서 도의선사에 의해 시작되고 수많은 용상대덕에 의해 전승돼온

 조계선종의 전통을 더욱 계승하고 발전시키겠다는 다짐을 내외에 천명하는 법회라고 말했다.

 스님은 또 오늘 현판한 설악산문의 이름이 헛되지 않으려면 더 많은 가행정진이 필요하다라며

 모름지기 수행자란 장대 끝에서 허공으로 한 발 더 내디뎌 시방세계와 한 몸이 되어

설악산 산봉우리처럼 우뚝하다는 말을 들어야

비로소 오늘 설악산문을 현판한 뜻이 살아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설악산문의 현판 서각은 김기철 각수장이 맡았다. 신흥사 주지 우송스님은

 설악산문의 선맥을 잇고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기 위해 백담사 무금선원과

기본선원, 신흥사 향성선원을 문 연 조실 스님의 원력으로

마침내 설악산문이 열려 감동과 환희심이 절로 난다라고 말했다.

[불교신문3205/201661일자]


일주문







사천왕문

세심교를 건너면 신흥사의 사천왕문을 만난다. 신흥사의 일주문은

1811(순조 11) 주운스님과 철수스님 이 창건하였는데,

그 뒤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72년에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중건한 것이다.

대개의 사찰에서는 경내·외를 구분하는 문으로 해탈문 혹은 불이문을 두고 있으나

 신흥사는 사천왕문이 경내에 이르는 마지막 문이 된다.


(좌로부터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사천왕의 구별은 사천왕의 지물(持物)로서 대개 파악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사찰의 천왕문을 보면 경주 불국사, 팔공산 은해사, 순천 송광사와 같이

서방 광목천왕은 탑과 창을, 남방 증장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동방 지국천왕은 칼을,

북방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는 데 반하여,

 조계사, 하동 쌍계사, 김천 직지사, 팔공산 동화사나 중국 보타산 혜제사 등의 사천왕은

동방 지국천왕은 비파를, 남방 증장천왕은 칼을, 서방 광목천왕은 여의주와 용을,

 북방 다문천왕은 보탑과 당()을 들고 있다.

신흥사의 천왕상은 조계사의 유형을 같이 하고 있다. 이는 조성 시기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좌로부터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의 사천왕상이 들고 있는 지물은 주로 병장기로서

, 화살, , 금강저(金剛杵 : 악마를 깨뜨리는 무기) 등과 같은 것이며

북방 천왕의 경우 반드시 탑을 받들고 있지만,

이에 반해 조선 후기로 오면서 크게 변화하여 비파, , 용과 여의주, 당과 탑으로 정형화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원대 라마교 약사칠불의궤공양법(藥師七佛依軌供養法)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본방 고창 선운사 사천왕상 참조)





보제루

신흥사의 본전인 극락보전 앞에 있는 장방형(직사각형)의 큰 누각이다.

장대석으로 쌓은 2단의 축대 위에 정면 7(22.4m), 측면 2(8.5m)의 누마루식 홑처마 맛배 지붕이다.

1985.9.13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영조 46(1770)에 세워진 것으로 누각식으로 되어 하층 중앙 칸은 극락보전으로 가는 통로가 되고,

 상층은 다락으로 되어있다. 본래 사찰의 본전 앞에 세워지는 누각은

각종 법회를 거행하던 곳이었으며 사방이 개방되어 있었다.

현재는 그 기능이 사라졌으며, 세살의 분합문을 달았다.


극락보전 앞 석등


적묵당



괘불대


극락보전

아미타불을 모신 신흥사의 본전이다. 정면 3, 측면 3,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多包)식 단층집이다.

1971.12.16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인조 25년 영서, 연옥, 혜원 스님이 창건하였고,

조선 영조 26(1750) 각중(覺重) 등이 중수하였다.





순조 21(1821) 거관(巨寬), 근민(近旻), 부총(芙聰), 승기(勝琦), 창오(暢悟) 등이 중수하였고,

 순조 27(1827)에는 단확 하였으며, 최근 들어 1977년에 보수하였다.

공포의 아름다움과 단청의 다양한 문양은 다른 건물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면어칸(御間) 사분합문의 꽃살 문양과 협칸의 빗살문양이 돋보인다.

극락보전으로 올라가는 석조계단은 하나의 돌로 된 층계인데,

영조 37(1761) 홍징(弘徵), 홍운(弘運) 등이 쌓았다.

1977년 보수 때 계단을 3조로 개조하였다.

계단 하단 양쪽에 용두를 조각하였고, 측면에 귀면상을 조각하였다.

축대 정면왼쪽에는 길상초와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법당 안에는 보물 제1721호로 지정된 목조 아미타불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아미타불삼존불좌상

보물 제1721호로 지정된 신흥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애석하게도 조성발원문이 남겨져 있지 않으나

아미타불상의 밑바닥에 順治辛卯八月日畵員無染(순치신묘팔월일화원무염)”이라는 묵서명이 있고,

관세음보살의 복장 속에도 順治八年八月十九日畵員無染(순치팔년팔월십구일화원무염)”이라는

 축원문이 발견되어 1651(효종 2)에 무염(無染) 화사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아미타불) 

극락보전 내의 높은 수미단 위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아미타불좌상은 안정된 신체비례를 지닌 단정한 모습이다.

정수리의 육계(肉髻)는 둥그스름하며,

머리 위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 즉 나발(螺髮)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육계 위에는 정상 계주(髻珠)가 있고, 육계와 머리 사이에는 반달형의 중심 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에 이목구비가 단정하며, 귓바퀴와 귓불이 밖으로 휘어진 귀가 특징적이다.

불상의 옷은 양쪽 어깨를 다 덮어 입은 통견(通肩)이며,

가슴 아래로 내의가 가로질러져 있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오른 발목 위에 올려 역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 수인을 짓고 있다.


(관음보살)  

아미타 불상 왼쪽의 관세음보살상은 본존과 거의 같은 모습인데,

단지 크기가 조금 작고 머리 위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화려한 불꽃무늬의 보관 중앙에는 화불(化佛)이 있다.

보관 아래에서 내려온 보살의 머리카락, 즉 보발(菩髮) 한 가닥은

귀를 감싸고 나머지는 어깨 위로 흘러내린다.

역시 가슴 아래로 내의를 묶은 띠가 가로질러져 있는데,

내의 상단에 굵직굵직하게 잡힌 주름은 본존과 차이를 보인다.


(대세지보살) 

아미타 불상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상 역시 관세음보살상과 기본적으로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차이가 있다면 보관에 화불이 아닌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편, 관세음보살상에서 나온 축원문(祝願文)과 기문(記文, 1720),

각종 씨앗, 후령통 등의 복장 유물이 수습되어 불상 조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아미타삼존불좌상의 특징은 불분명한 육계(肉髻), 사각형의 얼굴,

가늘고 작은 눈과 입, 건장하지만 굴곡이 없는 신체, 넓은 무릎 폭,

통견법의의 착의법과 옷 주름 등 17세기의 시대양식과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160가 넘는 큰 크기 역시 이 시기 불상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 목조 아미타삼존 불좌상은 조성발원문이 분실되어 아쉽기는 하지만,

다행히 관세음보살좌상의 조성기를 통해 1651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연도와 작가를 알 수 있어

조선 시대 후기 불교 조각사의 기준작으로 주목된다.



@명부전(冥府殿)

신흥사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기 위한 불전으로 1737(영조 13)에 창건되었으며

 1797(정조 21)1975년에 중수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 기와지붕이다. 201112월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법당 안에는 보물 제1749호로 지정된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은 조선 후기 작으로 보물 제1749호로 지정되어 있고 

 지장보살상의 크기는 높이 98.4, 무릎 너비 76.9이며,

도명존자상 높이는 140, 무독귀왕 상 높이 155.5이며, 재질은 목조로 제작 시기 1651년이다.

 

보물 제1749. 신흥사 명부전에 봉안된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은 중앙에 지장보살상이 앉아 있고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서 있는 구조이다.

신흥사 극락보전의 목조 아미타여래 삼존상 중 관음보살상 내부에서

명부전 불상 조성에 대해 밝힌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발원문에 따르면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은

16518월 조각승 무염(無染)을 비롯한 도우(道祐), 해심(海心), 덕명(德明), 처상(處常), 성잠(性岑),

원철(元哲), 도래(道來), 민기(敏奇), 의신(義信), 영택(靈澤), 영봉(靈峰),

 처인(處仁), 일상(日祥) 등 모두 13명에 의해 조성되었다.

화성화원(畵成畵員) 명단도 있어 불상을 만든 화원과

개채(改彩)를 담당한 화원이 별도로 존재하였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시왕, 판관, 사자, 동자상 조성에 대한 기록도 있어

원래는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그리고 권속들이 함께 명부전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찍힌 신흥사 명부전의 모습에는

시왕상이 있어 전쟁 이후 어느 시점에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은 민머리 형에 오른손을 가슴 위로 들고 왼손은 무릎에 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모습이다.

당당한 자세에 높이 98.4의 큰 크기, 넓은 무릎에서 안정적인 신체비례를 보인다.

장방형의 얼굴에는 넓은 이마, 좌우로 긴 눈, 오뚝한 코, 짧은 인중을 표현하였으며

양 끝이 살짝 올라간 작은 입으로 옅은 미소가 느껴진다.

입이라든가 유난히 돌출된 큰 귀, 귀 가운데 부분에 낮게 솟은 돌기 등의 표현은

무염의 독특한 조각적 특징이다. 착의법은 변형통견식으로 양어깨 위에 대의를 걸쳤고

가슴에는 수평으로 된 승각기를 입었다. 다리 위를 덮은 옷자락은 좌우 대칭을 이루는데

다리 사이로 흘러내린 옷 주름은 간략하면서도 도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좌우 도명존자상과 무독귀왕상은 신체가 짧은 편이며 합장을 하고 서 있는데

얼굴 표현은 지장보살상과 거의 비슷하다.

젊은 비구의 모습을 한 도명존자는 청색 장삼 위에 붉은색 가사를 둘렀으며

 옷 주름은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뒷면 다리 부분에는 네모난 복장공이 뚫려 있다.

머리에 원류관을 쓴 무독귀왕상은 얼굴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표현하였고 붉은색 관복을 입은 모습이다.

 

설악산 신흥사의 명부전에 봉안된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은 1651년 무염에 의해 조성된 불상으로

정확한 조성 시기, 제작자 등이 분명하여 17세기 중엽 불교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다.

무염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이며 1633년에 처음 화원으로 등장하여 1650년대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이 불상은 무염의 작품특성을 이해하고 그의 조각적 특징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전승되는지를 보여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삼성각




조사전




@고암 상언(古庵尙彦) 스님과 정호 성준(晶湖聲準) 스님의 부도탑과 탑비


(정호당 성준대선사 탑비)

@성준선사(1932~1977)의 법명은 성각(性覺)이며, 법호는 성준(聲準)이며,

자호는 정호(晶湖)이다. 정호당(晶湖堂) 성준(聲準) 대선사는

조계종 정화 6 비구 가운데 한 분으로 종단의 기틀을 다지고

 신흥사를 크게 일으킨 중흥조(中興祖)로 일컫는다.

정호당 성준 대선사는 1955년 범어사에서 고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고 1960년대 정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만덕사와 소요산 자재암, 봉은사 주지를 지냈고, 조계종 감찰부장과 재무부장, 감찰원장을 역임했다.


(정호당 대선사 부도)


(고암상언 대종사 탑비)

고암 상언(古庵 祥彦, 18991988) 대종사는 189910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식현리에서 양주 윤씨인 부친 문()과 모친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상언(祥彦)이요, 속명은 지호(志豪), 법호는 고암당(古庵堂)이다.

19(1917)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제산(霽山) 스님을 은사로 수계하였고,

 상언(祥彦)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24(1922)때 해인사에서 용성 진종(龍城 震鐘, 1846~1940)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및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1923년 이래 여러 선원에서 25하안거를 성만하였다.

40(1938) 내원사 천불선원에서 용성 스님을 모시고 안거 중 깨침을 얻어,

스승에게 인가를 받았고, 전법게와 함께 고암(古庵)이라는 당호(堂號)를 받았다.

 46(1944) 때 대선사 법계, 55(1953) 때 대종사 법계를 품수 받았고,

3, 4, 6대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셨다. 1981년 이후 미국에서 포교하셨으며,

89(1987) 때 대각회 이사장에 취임하셨고,

1988년 세수 90, 법랍 71세로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입적하셨다.

남긴 것은 법문 노트 몇 권과 염주, 주장자, 옷 한두 벌, 가사 한두 벌 정도였다.


(고암상언대종사 부도)



범종루


<설정각>

설악산은 높이가 1,707.86m이다.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며 2의 금강산이라고 불린다.

설악이라 불린 이유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한 눈이

하지에 이르러야 녹는다 하여 설악이라 불린다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이 눈같이 희다고 하여 설악이라 이름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밖에 설산(雪山설봉산(雪峯山)이라고도 불렀다.

설정각(雪井閣)이란 전각 명은 여기서 비롯된 것 같다.

설정각은 일반사찰의 수각에 해당되며 감로병을 든 관음보살을 모셨다.





보제루와 범종루



보제루














극락교 풍경




좌측 다리는 극락교, 우측 다리는 세심교


세심교


극락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