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22. 20:49ㆍ국내 명산과 사찰
팔공산 동화사 금당암(金堂庵)과 수마제전(須摩提殿).
금당(金堂)이란 본존불을 안치하는 가람(伽籃)의 중심 건물을 말한다.
금당이란 명칭은 전각 안을 금색으로 칠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금색의 본존불을 내부에 안치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동화사의 금당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동화사가 소실된 후
선조 33년(1600년) 금당암 영역에 건립한 극락전을 금당(金堂)이라 했다.
또 이전의 수마제전을 고금당(古金堂)으로 기록한 것으로 볼 때
현재 대웅전 영역이 동화사의 중심이지만,
심지가 창건한 이후 오랫동안 동화사의 중심은 현재의 금당암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당암의 수마제전도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극락전도 또한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
하나의 암자에 같은 여래를 두 전각에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영혼을 서방극락정토로 천도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시대적 여망에 따라
사명대사가 아미타불을 모신 수마제전과는 별도로 극락전을 크게 건립하였다고 한다.
극락전이 동탑과 서탑 사이에 자리한 까닭은 동화사 창건 때부터 전해온 석탑을 보존하고,
아미타불을 달리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하는데 수명이 무량하여 열반에 들지 않아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 앞에는 부처님의 무덤인 탑을 세우지 않는 관례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 14년(1622년)에 중창된 극락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다포식 건물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원형과 방형초석 등을 사용했고,
고려 이전에 볼 수 있는 가구식 기단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금당암에는 400여 년 전부터 금당선원이 개설되었다고 전한다.
금당의 금당선원은 1900년 봄에 근세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경허스님이
선원을 다시 개원한 이래 석우(石友ㆍ1875~1958), 효봉(曉峰ㆍ1888~1966),
성철(性徹ㆍ1912~1993) 스님 등 위대한 선승이 오도(悟道)했던
성지로 한국불교의 선맥을 잇는 대표적인 참선수행 도량이다.
@지금의 금당암(金堂庵)은 건평 50평으로 공사비 4,900만 원을 들여서
1974년 5월에 해체하여 1976년 10월에 준공하였다.
금당암은 대웅전과 수시골에서 흐르는 시내와 경계하고 있다.
극락전(極樂殿)을 본당으로 삼고 있는 이 암자에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 극락전 앞뜰에는 보물 제248호로 지정된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과
대구광역시 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수마제전과 금당선원이 있다.
동화사와 금당암의 유래를 보면, 동화사사적기(桐華寺事蹟記ㆍ1732년) 등에는
「신라 소지왕 15년(493년)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하였다가
흥덕왕 7년(832년) 심지(心地) 대사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가
겨울에 상서롭게 꽃을 피웠다 하여 동수(桐藪)로 개창하였고,
그 뒤 동사(桐寺) 또는 동화사(桐華寺)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유가사(瑜伽寺)의 유가(瑜伽)는 중국에서 7세기 후반에 성립된
법상종의 성격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흥덕왕 7년(832년)에 심지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암은 창건 유래는 심지대사로 비롯되는 데,
<삼국유사>에는 「진표(眞表)가 영심(永深)에게 전한 간자(簡子:미륵보살의 수계를 의미하는 징표)를
심지가 받은 뒤 팔공산에 와서 간자를 날려 떨어진 곳에 절을 지으니
이곳이 바로 동화사(桐華寺) 첨당(籤堂) 북쪽 우물이 있는 곳이다.」라고 했다.
금당암(金堂庵) 수마제전(須摩堤殿)의 서쪽, 옛 금당 터 뒤에 있는 우물이 그곳이다.
보물 제601호도학동 석조부도
@ 동화사(桐華寺) 금당암 입구에 서 있는 이 부도는
원래 동화사에서 1㎞ 정도 떨어진 도학동의 내학(內鶴)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와 복원한 것이고 부도의 주인은 알 수가 없다.
일명 흥진국사부도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보물 제601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는 172㎝로 지대석만 방형이고 그 위의 부재들은 모두 8각 원 당형의 기본형을 갖추고 있다.
방형의 지대석은 부도가 실제로 유행하기 시작한 9세기부터 8각형의 지대석과
혼재되어 나타나며 방형의 형식이 주는 안정감에서 채용된 것으로 보인다.
하대석과 중대석은 8각으로 별다른 조식(彫飾) 없이 간결하게 표현되었고
상대석은 앙련의 연화문으로 장식하고 상면에는 탑신 괴임이 마련되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부도의 구성에서 볼 때 상대석은 탑신석을 받치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곳에 표현된 연꽃문양은 선문(禪門)에서 부처에 못지않게 중시하는
선사(禪師)에 대한 존경심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한다.
탑신은 사리가 안치되는 곳으로 석탑의 탑신부나 석등의 화사석과 같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 부분으로 탑신석 역시 전형적인 8각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탑신을 덮고 있는 옥개석도 8각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데 목조건축의 요소가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부도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9세기에 정립된 8각 원당형 석조부도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극락전(極樂殿)
금당암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시야에 들어오는 건물이 극락전이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현존건물은 서기 1702년 (숙종28)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각 양쪽에는 동서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1986. 12. 5 지정)
전각은 2중 기단을 하고 있는데 상단 축대 아래쪽 정면 중앙에는
연꽃이 양각된 방형(方形)의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다.
이것은 9세기경 신라 시대의 조각 양식을 하고 있다.
극락전 기단의 구조는 지대석을 놓고 돌기둥을 세운 다음 판석을 끼워 놓고
다시 갑석(甲石)으로 마무리한 가구식(架構式) 기단을 하고 있는데
이 또한 신라 시대 것으로 극락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 중 하나이다.
갑석의 모퉁이는 <ㄱ> 자형으로, 꺾이는 곳을 부드럽게 하여 곡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갑석의 일부는 없어졌으나 지대석, 면석 등은 거의 남아 있다.
기단 위에 놓인 초석들은 각형 바탕에 둥근 기둥 받침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이중으로 모양을 내기 위해 골을 낸 옛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건축양식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장방형으로 다포식 단층 팔작지붕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2출목. 내2출목으로 초기의 다포양식 수법을 보인다.
가구는 내부에 앞뒤 평주의 기둥 배열에 맞추어 각각 4개씩, 모두 8개의 고주를 세웠으며
이들 고주와 평주 사이에는 퇴보를 걸고 고주사이에 대들보를 걸었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처리하였으며 천장은 중앙의 종보가 걸리는 곳을 한층 더 높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극락전의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이 불상은 높이가 한길이 넘는 대불이다.
불상 뒤에 걸렸던 후불탱화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강희(康熙) 24년. 즉 1703년(숙종 29년)의 기년을 가진 것으로 보면
이 시기 정도에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이것은 진경산수화 시기의 절박한 사생미가 돋보이는
우수한 불상으로 대웅전의 불상보다 한층 더 격조가 높다.
<동서삼층석탑>
보물 제248호. 금당암 극락전 앞에 동서로 자리하고 있는 2기의 석탑으로,
동탑의 높이는 5.62m이고, 서탑의 높이는 5.24m이다.
동화사는 수시골에서 흘러내리는 시내 계곡을 중심으로
동서의 두 사역(寺域)으로 구분되는데, 금당암은 동쪽 사역에 있다.
이 석탑은 동화사 안에 있는 여러 석조물과 비교하면, 동화사 창건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탑은 받침돌 대부분이 후대에 보수되었기에, 원래의 결구(結構) 수법은 조화를 잃었다.
아래층 받침돌은 바닥돌과 면석을 하나의 돌에 새겼는데,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특히 모서리 기둥은 대나무 모양으로 조각되어 특이하다.
덮개돌은 윗면 가운데 부분에 ‘정(井)’자형의 테두리 장식이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위층 받침돌의 면석 역시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조각되었다. 덮개돌은 널돌 2장을 옆으로 붙여서 덮었는데,
밑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을 새겼고, 윗면에는 2단의 테두리 장식을 두었다.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올렸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 외에 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 받침을 새겼고,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서
2단의 테두리 장식으로 새겼으며, 전각(轉角)에는 풍탁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위에 복발(覆鉢)·앙화(仰華)·
보륜(寶輪)·보주(寶珠) 등의 장식이 모두 남아 있다.
이 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돌로 만든 상은 석탑의 받침돌을 보수할 때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탑은 동탑과 달리 2층의 받침돌로 이루어졌는데,
주변에 받침돌의 덮개돌 조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받침돌이 3층이었는지,
아니면 동탑의 것을 옮겨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바닥돌 위에 있는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은 4장의 돌로 구성되었으며,
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함께 1개의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위층 받침돌의 면석은 각 면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두 면에만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을 새겼고,
다른 두 면에는 가운데 기둥만을 새겨 양쪽에 모서리 기둥을 새긴 면석 사이에 끼워 두었다.
이에 따라 이 면석의 모서리 기둥은 양쪽에 모서리 기둥을 새긴 면석의 옆면으로 처리하였다.
덮개돌은 아래층 받침돌의 경우 널돌 2장을 붙여서 덮었고,
위층 받침돌은 1장으로 덮었는데, 윗면에 각지고 둥근 테두리 장식을 새겨 놓았다.
탑신부는 동탑처럼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올렸다.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 외에 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고,
지붕돌에는 밑면과 윗면에 각각 4단의 받침과 2단의 각지고 둥근 테두리 장식이 새겨져 있다.
서탑은 1957년에 해체한 뒤 수리하였는데, 당시에 탑 속에서
소탑(小塔) 99개를 비롯하여 사리장치(舍利藏置)가 발견되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노반과 찰주(擦柱)만이 남아 있고 다른 머리장식은 없어졌다.
이 두 석탑은 결구 수법이 같고 균형이 잘 이루어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양식으로 보아, 모두 신라 하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탑이 모두 고준하고 경쾌한 감을 주며, 옥개석 네 귀에 풍경이 달려 있는 등 예술적 가치가 크다.
#동화사사적비문에는 이 석탑이 863년(경문왕 3)에 건립되었으며,
불사리(佛舍利) 7과가 봉안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마제전>
수마제전(大邱 桐華寺 須摩提殿)은 조선 시대의 건축물로,
1986년 12월 5일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이전의 수마제전을 고금당(古金堂)이라 하였는 데 이를 유추해 보면
현재는 대웅전 영역이 동화사의 중심이지만,
심지가 창건한 이후 오랫동안 동화사의 중심은 현재의 금당암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화사는 493년 극달이 ‘유가사’라 하며 세웠고,
통일신라 흥덕왕 7년(832)에 왕사였던 심지가 고쳐 지으면서 ‘동화사’로 부르게 되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지은 것으로 전하는 수마제전은 극락전의 다른 이름으로 쓰인다.
수마제전(須摩提殿) 건물의 구조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장대석 기초 위에 막돌 주춧돌을 놓아 기단부를 이루고 있다.
지붕의 구조는 겹처마의 맞배지붕으로 다포양식을 따르고 있다.
건물의 전체적인 모습은 단칸집으로 단아하고 소박하면서도 엄숙미를 함께 느낄 수 있다.
조선 시대 중 후기 다포양식의 소박한 기법과 짜임새를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수마제(須摩提)는 범어(sumati)에서 음사된 것으로 서방극락의 별명(別名)이다.
번역하여 묘의(妙意), 또는 호의(好意) 등이라 한다.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 「서방(西方)의 아미타를 염(念)하면
지금 현재 그곳에 있더라도 문(聞)과 염(念)에 따라서 온다.
이곳에서 십만억불찰(十萬億佛刹)을 지나면 수마제(須摩提)가 있다.」라고 했다
. <영서소경소(靈棲小經疏二)>에 「극락(極樂)은 범어(梵語)로 수마제(須摩提)라 번역하여
안락(安樂)하며, 안양(安養), 청태(淸泰), 묘의(妙意)라 한다.
이름은 비록 조금 다르나 모두 극락(極樂)의 뜻이다.」 하였다.
@수마제전 안 봉안된 아미타불 금동불좌상은 비지정 문화재로
불상의 크기는 177cm이며, 무릎 폭은 119cm, 석조대좌의 높이는 137cm이다.
수마제전 내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조선 시대 초기의 대형 금동불로,
금을 입힌 철불로 보기도 한다. 이 불상은 1702년에 건립된 수마제전에 안치되어 있으나
원래 있었던 장소는 알 수 없으며 현재 광배 부분이 없어진 상태이다.
간단한 형식의 석조 팔각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는데 허리가 길게 표현된 반면
무릎 높이가 낮고 평행을 이루어 균형감이 부족하다.
머리 모양은 나발로 중앙에 육계가 표현되었으며,
얼굴 모습은 약간 비만형으로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나타나 있다.
칼로 빚은 듯 좁고 우뚝한 코와 치켜 올라간 눈,
꼭 다문 입과 군살 진 턱의 모습은 다소 낯선 느낌을 풍긴다.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으며, 몸체는 당당해 보이나
신체의 굴곡이 무시된 채 밋밋한 가슴과
통견의 법의에 반복된 옷 주름으로 인해 생동감은 다소 떨어진다.
U자형으로 트인 가슴의 옷깃 사이로 타원형의 군의(裙衣) 끝단과
단정하게 묶은 띠 매듭이 드러나 있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한번 접혀 내려오다
가슴의 옷깃 속으로 법의 자락을 여며 넣은 착의법(着衣法)이 특징적이다.
두 손의 수인은 오른손은 손바닥을 편 채 위로 들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연상시키며,
왼손은 배 언저리에 들고 있다. 법의는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렸는데,
특히 발목의 크기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무릎 밑으로 흘러내린 법의 자락은
양 무릎 밑에서는 톱니형으로, 발목 밑에서는 부채꼴로 주름져 마무리되었다.
특히, 발목 밑의 부채꼴 옷 주름은 고려 시대 철불의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조성 시기는 고개를 숙여 움츠린 듯한 상의 자세와 경직된 얼굴 모습
그리고 균형을 잃은 신체 비례와 판에 박은 듯
일률적으로 나열된 평판적인 옷 주름 등으로 보아 조선 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보물 제254호 동화사 당간지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 을 당간지주라 한다.
동화사 당간지주는 보물 25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시대다.
이 당간지주는 두 기둥이 66㎝의 간격으로 마주 보고 서 있다.
기둥이 마주 보는 부분과 앞뒷면은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었을 뿐 아무 장식이 없고,
바깥면에는 모서리를 깎고 중심에는 세로로 능선을 조각하였다.
기둥의 꼭대기는 반원으로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둥의 앞면 중간 부분 1m 정도를 살짝 들어가게 새겼다.
이러한 수법은 통일신라 시대에 자주 보이는 장식 수법이다.
기둥의 위와 아래에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위는 네모난 모양이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다.
당간을 받치던 석재가 없어지고 전체의 형태가 경쾌한 맛은 없지만
견실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이 지주가 만들어진 시기는
당간지주에서 둔중함이 엿보이고,
동화사의 창건 시기가 신라 흥덕왕 7년(832)인 것임을 참작하면 신라 후기로 추정된다.
<인악당 탑비>
금당암에서 봉황문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좌측에
금당암 동화사(桐華寺)의 인악당(仁嶽堂) 의첨(義沾, 1693∼1764) 승탑이 있다.
인악당의첨은 18세기 초 동화사를 중창한 운암당(雲岩堂) 옥준(玉峻)의 4세손으로,
조선 후기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대구 달성 출신이었던 그는
동화사에 머물며 문하에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문집과 유물, 유적이 많이 남아 전하고 있다.
동화사에 남아 전하는 그의 진영은 특히 능숙한 초상화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며,
온후한 성품까지 잘 묘사된 점에서 18세기 후반 작품으로 추정된다.
탑비의 비신(碑身)은 귀부(龜趺) 위에 세우고 그 귀부는 대개 거북이인데 반하여
동화사의 인악비의 귀부는 봉황(鳳凰)인 것이 특이하다.
그 연유를 보면, 숙종 14년(1688년)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ㆍ1625∼1707)은 산중일기에서
‘동화사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터는 고르고 평평하여
진실로 팔공산 가운데 명당(明堂)’이라 했는데,
동화사는 예로부터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명당으로 널리 알려졌다.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들며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고 하여
예로부터 동화사에는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다.
동화사는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에 맞추어 일주문을 봉황문(鳳凰門)이라 하였고,
대웅전으로 진입하는 누각을 봉서루(鳳棲樓)라 하고
그 앞에 있는 큰 바위 위에 봉황 알을 상징하는 둥근 바위 3개를 올려두었다.
이런 연유로 동화사 인악대사비(仁嶽大師碑)의 비대(碑臺: 귀부)가
거북이 아니라 봉황 형상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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