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기행) 동사지의 3층석탑과 5층석탑

2019. 3. 28. 20:56문화재

(하남기행동사지의 3층석탑과 5층석탑

하남시 춘궁동에 있어 <춘궁동동사지>라 불리던 동사지(桐寺址)

이성산 남쪽에 있는 고골 저수지 옆의 야산 중턱에 있는 동사(桐寺)라는 옛 절터이다.

사적 제35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절터 중앙부에는

 보물 제12·13호로 지정된 신라 양식을 계승한 3층 석탑과 5층 석탑이 나란히 서 있고,

또 북쪽에는 신라 때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이성산성(二聖山城)이 있다.

절터 동쪽에 고곡(古谷) 또는 궁마을로 알려진 옛 마을이 펼쳐져 있어,

이 일대가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라는 설도 있다.

 

 

 

동사지는 1988년 판교구리 간 고속도로가 건설될 당시,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이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金堂) 4곳의 건물터가 드러나고

금동불상, 기와, 도자기, 동으로 만든 불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기와 중에서 '동사(桐寺)', '신유광주동사(辛酉廣州桐寺)', '흥국삼년(興國三年)'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동사(桐寺)의 옛터라는 사실과

10세기경 새롭게 지어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발굴된 기와의 무늬와 질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며 명문으로 미루어볼 때

광종 대(949975)에서 경종 대(975981)에 걸쳐 창건 또는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동사명기와가 여러 점 출토되어 이곳이 동사지(桐寺址)였음을 알 수 있는데

동사지에서는 경주 황룡사 금당지에 버금가는 거대한 규모의 금당지가 발견되었다.

그 외에도 집이 있던 자리 4곳과 2기의 석탑도 발견되었는데 석탑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 조사연구팀에 의하면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하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에서

 동사라는 절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어, 이 절에 대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 시대에 초창된 후 고려 시대 들어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지면서

석탑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유물을 통해 조선 전기까지는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로 남아 있었으나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람배치는 33금당인지 22금당인지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금당 터는 넓은 평지로 약 2m 높이의 기단 위에 거칠게 다듬은 사각 초석이 줄지어 있다.

 초석 배열을 통해 금당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2층 불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라 시대 경주 황룡사 금당에 필적하는 규모이다.

금당의 중앙에는 본존불 대좌의 하대석으로 생각되는 팔각형 석재가 남아 있는데

지름이 5.1m에 달하여 당대 최대규모인 것으로 판단된다.  

20117하남 춘궁동 동사지에서 하남 동사지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현재 다보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

 

 

 

 

<보물제13호 하남동사지3층석탑>

동사지 절터 중앙에 신라 양식을 계승한 3층 석탑과 5층 석탑이 나란히 서 있는

하남 동사지 3층 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높이는 3.6m1963121일 보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이중 기단의 정사각형 석탑으로,

기단 일부가 땅속에 파묻혀 있고 일부 부재가 깨지고 없어졌다.

위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위층 기단의 면석은 모든 면이 1매씩 모두 4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남면의 돌 1매가 없어졌다.

지붕돌은 아랫면이 반듯하고 윗면도 완만한 경사를 보이지만,

네 귀퉁이가 치켜올려져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 탑은 1층 탑신이 지나치게 광대한 것에 비해 2, 3층 탑신이 급격히 줄어들고,

지붕돌도 이에 비례해 작아져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된 느낌이 든다.

조성연대는 고려 중기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리라고 짐작된다.

 

 

 

 

 

 

 

 

 

 

<보물제12호 하남 동사지 5층 석탑>

3층 석탑은 신라 시대 양식이라면 5층 탑은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3층 석탑과 나란히 있다.

보물 제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7.5m이며,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이 있는데,

상륜부는 일반적인 법식을 따른 노반(露盤: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둔 장식)만 남아 있다.

 

기단은 여러 개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설치되어 있으며,

지대석 윗면에는 1단의 굄이 있어 중석을 받치게 되어 있다.

중석도 수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얕게 모각되어 있다.

 

 

 

중석의 남쪽 면이 파손되어 내부 중심에 높이 1.1m, 너비 0.93m

거대한 찰주석(擦柱石: 탑의 중심기둥 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갑석(甲石)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밑에는 부연(副椽: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

윗면에는 탑신 굄대가 모두 낮게 표시되어 있다.  

윗면은 현저한 경사를 이루며, 우동(隅棟: 탑 옥개석의 귀마루)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탑신부의 구조는 특이하여 1층 옥신은 갑석 위에 네 개의 방형석(方形石)으로 1단을 만들고,

그 위에 1판석을 얹어놓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 이상의 옥신은 각각 1석으로 체감률이 강한 편이고,

1층 옥신을 비롯하여 각 층의 옥신에는 모두 우주 모양이 얕게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는 4판석으로 조성되어 있고, 4층은 2판석, 5층은 1판석으로 되어 있다.

 

옥개 아랫면의 받침은 1층이 5, 2층부터 4층까지가 4, 5층이 3단으로 차례로 줄어들었고,

상층에 이를수록 옥신을 따라 급속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각 층의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었고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나,

우동은 뚜렷하며 전각의 반전도 경쾌하다.

 

 

층마다 옥개석 윗면에 1단의 굄이 있어서 각 층의 옥신을 받치게 되어 있다.

이 탑은 신라 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은 정사각형 석탑으로,

1층의 옥신이 2단으로 이루어진 점이 특징이다.

이것은 신라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으로

 보물제109호로 지정되어 있는 광주광역시 남구의 성거사지 오층석탑과 같은 양식이다.

 

 

각 부의 결구(結構)는 규율성이 있고 탑신부의 각층 비례도 조화를 이루어,

아직도 격을 잃지 않은 우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건립 연대는 고려 중기일 것으로 생각된다.

19651219661월에 삼층석탑과 함께 보수공사를 할 때, 2층 기단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탑의 구성명칭을 위한 보조자료사진)

 

 

동사지 안에 있는 이 사찰은 다보사다. 법당이라 쓰인 한곳 외에는 다른 전각은 보이지 않는다.

요사채를 비롯하여 현재 건물은 임시 가건물인듯 하다.

법당을 잠시 둘러 보았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 관음불, 그리고 지장보살을 모셨다.

 

 

 

 

 

은박으로 부조된 신중탱이 모셔져 있다.

 

 

법당 좌측에 모셔진 석조 산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