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기행) 설봉서원(雪峯書院)과 관고동 오층석탑(官庫洞 五層石塔)

2019. 3. 22. 20:41문화재

(이천기행) 설봉서원(雪峯書院)과 관고동 오층석탑(官庫洞 五層石塔)

 

설봉산 영월암을 조금 내려오면서 도로 좌측에

 설봉서원(雪峯書院)이란 이정표가 보여 잠시 들려 보았다.

서원(書院)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거나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제사하던 곳이다.

 

 

 

그러나 조선의 서원은 본래의 취지보다 폐단이 심해 대원군이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만동묘를 철폐를 시작으로,

1868년에는 사액서원을 제외한 전국 1,000여 곳의 서원을 정리하고,

 1871년에는 대대적인 서원철폐령을 내려 대부분의 서원이 정리되었다.

그중에서도 살아남아 오늘날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은

최초의 서원으로 백운동서원이 사액을 받은 소수서원,

추사 김정희의 현판 글씨로 유명한 옥산서원,

퇴계 이이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이 유명하다.

이를 삼대 서원이라 일컫는데 도동서원과 병산서원을 추가하여 5대 서원이 유명하다.

 

 

참고로 이를 정리해 보면,

#소수서원(紹修書院) 경북 영주 순흥면 내죽리 151-2

옥산서원(玉山書院) 경북 경주 안강읍 옥산리 7

도산서원(陶山書院) 경북 안동 도산면 토계리 680

도동서원(道東書院) 대구 달성 구지면 도동리 35

병산서원(屛山書院) 경북 안동 풍천면 병산리 30

 

 

이천시 관고동 설봉공원 안에 있는 설봉서원은

1564(명종 19)에 이천 부사 정현(鄭賢)을 중심으로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서희(徐熙이관의(李寬義김안국(金安國)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는 서원으로 2007920일 이천시의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설봉서원은 1593(선조 26)에 이천시 관고리로 옮겨 세우고,

최숙정(崔淑精)을 추가배향 해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 5)에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 자리에 매안(埋安)하고 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 왔다고 한다.

그 뒤 19779월에 현충탑을 건립하여 네 명 선조의 우국충정을 추모하는 글을 새겼으며,

그 옆에 설봉서원유허비(雪峯書院遺墟碑)를 세워 매년 9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불행히도 설봉서원은 개방일시가 정해져 있는지 몰라도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발길을 돌렸다.

 

 

 

 

 

 

이천 관고동 오층석탑(利川 官庫洞 五層石塔)은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설봉공원에 있는 오층석탑으로 조성 시기는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1986414일 이천시의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의 유래는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가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사라쌍수(沙羅雙樹) 밑에서 열반한 후

그의 제자들은 유해를 당시 사회의 풍속에 따라 다비(茶毘 : 火葬)하였는데,

이때 인도의 여덟 나라에서 그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이 일어나게 되자

도로나(徒盧那)의 의견에 따라 불타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나라에 나누어 주어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고 하였다.

유골을 분배받지 못한 부족은 유골을 담았던 병을 가지고 가서 병탑(甁塔)을 세웠고,

어떤 부족은 재를 가지고 가서 회탑(灰塔)을 세웠다.

사리 신앙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불탑 역시 이때 기원한다.

 

 

탑은 범어 stūpa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탑파(塔婆)의 준말이다.

스투파는 유골을 안치하고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 올린 무덤이라는 뜻이므로

방분(方墳) · 원총(圓塚) · 고현처(高顯處)라고 번역한다.

원래는 유골을 안치한 것을 탑이라 하고,

안치하지 않은 것을 지제(支提, caitya)라고 했으나 보통 구별하지 않고 모두 탑이라 한다.

 

 

관고동 오층석탑은 원래 관고리 저수지 위쪽 밭에 도괴되어 각 부재가 흩어져있던 것을

1978년에 수습, 옛 절터 앞에 복원(復元)한 것인데,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原位置)인지는 알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의 상태는 탑두부(塔頭部)4개의 옥신이 놓여있고,

그 위에 5개의 옥개석이 쌓여 있는데 이 부재(部材)들이 모두 동일 석탑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1매의 판석형으로 이루어진 지대석 위에 4매의 판석으로 기단을 구성했는데,

면석은 약간의 경사가 있어 네 귀퉁이에 합각이 뚜렷하며, 2단으로 이루어졌다.

 1층 옥신은 1석으로 되어있고 각 면에는 양 우주가 정연하다.

 중적된 옥개석은 1층 받침이 4, 2층 이상은 모두 3단씩이다  

 

 

 

5개의 옥개석은 그 크기가 1층에서부터 각각 150cm, 122cm, 100cm, 74cm, 70cm의 폭을 가지고 있다.

낙수면은 비교적 넓고 평평한 편이나 5층 모두 하면에 낙수 홈이 없다.

원래의 탑은 전체의 높이가 8m를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높이는 4.3m이다.

재료는 화강암이며, 조성연대는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여기저기서 많이 발견되어

관고리5층석탑은 그 희소성 가치면에서 보면 세인의 큰 관심을 얻지 못하지만

이 탑이 발견된 지역에 만약 가람이 발굴된다면 그 의미가 달라질 것으로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