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20. 22:10ㆍ국내 명산과 사찰
보물 제822호 이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利川映月庵磨崖如來立像)
이천의 희화적(戱畵的)인 마애불 소고리 마애여래좌상과 삼존불을 탐방하고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마애여래불을 보기 위해 영월암으로 향했다.
영월암(暎月庵)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에 있다.
영월암은 이천 시민의 <희망봉>이라 불리는 설봉산의 정상 부근에 해당하는 높은 곳에 있어
오르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다. 이천의 서쪽으로 산 아래에는
2001 세계도자기엑스포가 열렸던 이천도자기박물관이 있고,
관고저수지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설봉공원이 형성되어 있으며, 설봉공원 위쪽에 설봉서원이 있다.
@설봉산 자락에 있는 영월암은 이천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서,
‘북악사(北岳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영월암 중건기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인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했으며,
이때의 사명(寺名)은 북악사(北岳寺)였다고 한다.
이후 1774년(영조 50) 영월대사(映月大師) 낭규(朗奎) 스님이 북악사를 중창하고,
자신의 법호를 사용해 ‘영월암’으로 사명(寺名)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창건연대를 뒷받침할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다만 절 안에는 마애여래입상(보물 제822호)을 비롯하여
석조광배, 연화좌대(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 모두 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이를 근거로 영월암의 창건은 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 초기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절 입구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이 짚었던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수령 600년이나 되는 은행나무가 있다.
@영월암의 가람배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바로 옆에는 극락전과 안심당(安心堂)이 배치되어 있으며,
안심당 뒤쪽에 삼성각이, 대웅전 맞은편에는 종각이 있다.
영월암에서 대웅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인근의 향교의 건물을 옮겨다 지은 것으로 전한다.
1948년에 인근 향교의 명륜전을 해체한 후 1953년에 현재의 대웅전으로 복원했다고 전한다.
(대웅전)
당우로는 대웅전, 안심당, 아미타전, 삼성각과 범종각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과
이천 유형문화재 제3호 지정된 석조광배와 연화대가 있으며,
건립 시기를 알 수 없는 3층 석탑 1기가 있다.
(아미타전)
(안심당)
영월암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꽃 심기 행사로 법당마다 참배객이 자리하고 있어
법당 참배는 하지 못하고 전각 외각만 대충 둘러보고 마애불로 향했다.
조성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은 3층 석탑.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가는 뒤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보불제822호로 지정된 이천 영월암 마애여래불입상은 대웅전 뒤쪽을 돌아가면 둔덕이 보이는데
그곳에 놓인 높이 약 10m, 두께 4미터가량의 동남간을 향한 자연 암반에 선각(線刻)되어 있다.
마애불상은 높이가 9.6m 어깨 폭이 3미터가량으로 규모 면에서 경기도에서 제일 큰 불상이다.
머리는 승려 모양의 맨머리여서 지장보살의 상으로 여겨지며,
얼굴은 둥근 형태의 살찐 편이며 입이 커서 투박한 느낌을 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왼손은 가사 자락을 움켜쥔 모습으로 왼손으로부터 늘어진 가사의 주름이
무릎 아랫부분까지 늘어져 있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올려
손바닥을 펴서 밖을 향하게 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조성 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말 고승인 나옹선사가 부모님을 천도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용주사본말사지>에 따르면 “이 마애석불은 고려 중기 산악(山岳)법사가 새긴 것이라”고 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10m 높이의 바위 위에 새겨진 불상은
머리와 손은 저부조로 새겼으며 몸은 선각으로 표현돼 있다.
머리는 소발 형태로 민머리며 육계가 없다. 눈은 감은 듯 가로로 길게 트여 있다.
콧방울이 넓고 인중은 짧지만 도드라지게 표현됐으며 입술은 두툼하다.
귀는 길어 어깨에 닿을 정도다.
목에는 삼도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으로 법의를 입고 있으며
가슴 부근에는 내의를 입은 매듭이 보인다.
법의 주름은 다소 형식적인데 왼쪽 어깨 옷 주름이
오른쪽으로 흘러 살짝 올라가는 형태로 ‘J’자 문양이다.
왼쪽 어깨에서 하체까지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법의가 새겨진 가운데,
왼팔에는 법의 끝자락이 물결문양으로 새겨져 있다.
이 마애불은 신체의 다른 부위보다 얼굴과 손을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오른손은 엄지와 약지를 맞댄 채 손바닥이 바깥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안으로 해 아래로 내린 상태에서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다.
아미타구품인의 하품하생을 표현한 듯하다.
이 마애상은 지정 당시의 명칭이 마애여래입상으로 되어 있으나 조사 결과,
머리가 승려 머리인 점이나 복식(服飾)이 가사 형식인 점 등으로 보아
나한상이나 조사상(祖師像)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마애상은 불상이라기보다는 영월암의 창건조사(創建祖師)
혹은 이 사찰과 인연이 깊은 고승을 기리기 위하여 조각된 상으로 추측할 수 있다.
보살이나 여래가 아닌 조사상이라고 하면
이는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된 북한산 승가사 승조대사상과 함께
유례가 드문 마애조사상(磨崖祖師像)이 된다. 조성 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마애불에서 내려다 본 사찰 전경
민머리로 보면 지장보살로 여겨지며, 수인으로 보면 아미타불일 수도 있지만,
영월암 마애상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이 마애상은 지정 당시의 명칭이 마애여래입상으로 되어 있으나 조사 결과,
머리가 승려 머리인 점이나 복식(服飾)이 가사 형식인 점 등으로 보아
나한상이나 조사상(祖師像)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마애상은 불상이라기보다는 영월암의 창건조사(創建祖師)
혹은 이 사찰과 인연이 깊은 고승을 기리기 위하여 조각된 상으로 보는 견해다.
이는 민머리인데다가 부처님 상징 가운데 하나인 육계가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견편단의 가사를 입고 있는 것을 이유로 들기도 한다.
보통의 여래상이 법의를 입고 있는 것과 달리 왼팔에
가사 끝자락이 명확히 새겨져 있는 것으로 미뤄보아 스님의 복식이라는 것이다.
스님을 조각한 것이 맞는다면 고려 시대 보기 드문 마애승가상이 틀림없다.
@고영섭 동국대 교수는 ‘이천 북악사(영월암) 역사와 인물’에서 미륵불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산악스님이 불상을 조각할 당시는 유가학을 대표하는 혜소정현스님이 안성 칠장사에 머물던 시기다.
고 교수는 “칠장사와 봉업사, 이천 북악사와 원주 법천사,
남동으로 중원 미륵사, 남으로는 보은 법주사를 축으로 하는
미륵신앙 벨트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영월암 마애불상이 미륵불이라고 밝혔다.
[불교신문3399호/2018년6월13일자]
위 사진 상단 우측에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은 독특한 구성으로 조성되어 있다. 좌우에 산신과 칠성탱을 조성하고
독성은 따로 뒤편 바위에 조성하여 유리벽을 통해 보도록 되어 있다.
독성의 지물이 특이하다. 보주를 들고 있다.
<석조광배와 연화좌대>
광배의 높이는 156cm, 폭은 118cm, 두께 45cm 이다.
연화 좌대는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이 그런대로 선명하다.
연화대좌 높이는 107cm이다.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1980년 비로자나 불상을 조성하면서 복원했다.
석조 광배, 연화 좌대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심당과 대웅전 사이에 있는 암벽에 반 감실을 조성하여 여래를 모셨다.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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