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기행) 선읍리입상석불과 이천 신흥사

2019. 3. 12. 22:59국내 명산과 사찰



(이천기행) 선읍리입상석불과 이천 신흥사

선읍리 석불입상(利川 善邑里 石佛立像)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에 있는 불상으로

 이천 신흥사 가는 입구에 있다. 1986414일 이천시의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統一新羅 末)에서 고려초기(高麗初期)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천 신흥사는 사찰보다 선읍리 석불입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설성산 기슭의 신흥사로 오르는 진입로 옆에 있는 이천 장호원읍 선읍리 석불입상(利川 善邑里 石佛立像)

 원래는 불상 전체를 1석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대좌(臺座)와 동체(胴體), 두상(頭像), 보개(寶蓋) 4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1석으로 조성해 연결해 안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각 부분이 선읍리 마을 앞 시냇가와 그 옆 논바닥에 흩어져 묻혀 있었는데

 1978년 여름에 장마로 흙이 씻겨 내려가면서 밖으로 드러나게 되자

마을 앞 광장에 두었다가 신흥사 주지 월선 스님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봉안하였다.



그런데, 불두(佛頭) 부분이 발견되지 않아 1983년 새로운 돌로 만들어 복원해 놓았다.

신흥사의 주지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발굴 당시 2기였다고 한다.


당시 사찰에 오르는 길도 없는 시절이라 1기는 간신히 옮겨 극락보전 옆에 모시고,

다른 1기는 사찰 입구에 모셨는데

그 불상이 지방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된 선읍리 석불입상이라고 한다.


 

대좌는 자연석 윗부분을 다듬어 5()의 연잎을 두른 복련으로 새겨 넣었으며,

그 위로 회호(回護)를 이룬 1단의 족좌(足座)가 있고,

그 위를 딛고 선 두 발과 양옆으로 떨어진 법의(法衣)의 자락을 표현했다.

대좌 윗면 한가운데 홈을 파고 촉을 넣어 불신과 연결했다.

대좌의 크기는 높이 20cm, 97cm 정도이다.  




  

보개는 긴 쪽이 103cm, 짧은 쪽이 86cm인 타원형 판석을 불두 위에 얹은 형태이다.

둥근 보개를 얹은 채로 조성된 두상과 동체 부분은 신광(身光)을 갖춘 불신(佛身)

둥글게 다듬은 바위 편에 돋을새김으로 표현했다.




수인(手印)은 왼팔을 들어 손바닥을 내 향(內向)해 가슴에 대고

오른손 역시 손바닥을 내향 하여 복부(腹部)를 감쌌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으로 양팔에 걸쳐 의문(衣文)을 흘렸으며,

소매는 넓고 길게 족좌(足座) 부분에까지 흘려 내려져 있다.

가슴의 의문은 원호를 그리다가 밑으로 내려오면서 타원을 이루었는데, 그 선이 뚜렷하고 유려하다.

  


  

법의(法衣)의 형태나 몸에 아무런 장신구의 표현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여래(如來)의 상()임을 알 수 있다.

 전체높이 257cm, 신광의 폭은 113cm, 두께는 15~16cm이며

불상의 높이는 234cm, 어깨 폭은 59cm이다.




뒤모습




마애여래상이 있는 도로를 따라 신흥사를 오르면 설성산성이 나온다.




이천 신흥사는 일주문이 없다. 오르는 길은 좁은 편도1차선도로다.

이천 신흥사(新興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391번지에 있다.

절은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 성터 안에 있는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절이 위치한 곳은 설성산(雪城山) 정상부 설성산 산성 안에 있다.

설성산은 성산(城山)이라고도 불렸으며, 조선 시대까지는 음죽현(陰竹縣)에 속하였으며,

음죽현의 주산이었다.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주변의 평야 지대를 아우를 수 있는 만큼

군사적인 요충지였으며, 설성산 산성은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절의 역사는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절의 역사를 알려주는

문헌 기록이 없어 그 창건 내력을 정확히 알 수 없고,

근래에 들어와서의 중창 내력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사찰 경내에 비치된 전설기(傳說記)에 의하면 신라 내물왕(재위: 356~402)

설성을 축조한 한 장군을 위하여 절을 창건하고 설성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이 527(법흥왕 14)이므로 연대에 대한 신빙성이 부족하다.








그 뒤 오랫동안 폐사가 된 채 내려오다가 1700년대 말에 중창하였으며, 1918년에 3창 하였다.

1944년에 수해로 유실된 것을 당시의 주지 해송(海松) 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당우로는 극락보전과 산령각, 나한전, 지장전,

월성각 그리고 요사채 2동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절 동쪽에 있는

마애지장보살상(磨崖地藏菩薩像)을 비롯하여 옛 설성사의 폐사지로 추정되는

석축 일부가 신흥사 하단 밭 가에 남아 있으며, 탑재(塔材) 및 와편(瓦片)도 출토되고 있다.



(신흥사 종무소)


이 가운데 마애지장보살상은 불상 측면에 지장보살이라는 한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조성연대는 조선 시대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체높이 117에 원형두광(圓形頭光)이 있고 두 손은 합장하고 있다.



신흥사가 세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산 아래 조성된

선읍리석불입상(향토유적 제10) 때문이다.

신흥사의 스님의 말을 빌리면, 발굴 당시는 2기였는데 1기는 옮겨 극락보전 옆에 모시고,

다른 하나는 산 아래에 모셨다고 한다. 산 아래 모신 석불 여래가 선읍리 입상 석불이다.



종무소 옆에 조성된 승탑과 탑비







범종각 앞에 포대화상, 약사여래, 석가모니, 그리고 선읍리입상석불 등이 조성되어 있다.




석가모니불







극락보전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지장탱




칠성탱

신중탱










월성당

지장전, 나한전, 신령각





삼층탑의 왼쪽은 산령각, 우측은 나한전이다.


삼층에 대한 안내판이 없어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오래된 석탑은 아닌 것 같다.


나한전의 법당










산령각




이 석조구조물은 승탑의 상륜부와 석등의 기단부 같기도 한데..





@극락보전 옆에 있는 이 석조 여래가 1983년 선읍리 석불입상과 같은 개울가에서 발굴된

2기 중 하나로 고려 시대 조성된 높이 150cm의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입상도 자세히 보면 삼도를 드러내는

 목부위의 석질이 두부와 몸신과는 색이 일치하지 않아 새로 조성한 것으로 사료된다.

수인은 선읍리석불입상과는 반대다. 오른 손을 가슴 위로 올리고 왼손은 내려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