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의 명소 사인암(舍人巖)

2019. 2. 14. 21:27명승지

단양의 명소 사인암(舍人巖)

 

@단양 명소인 사인암은 단양팔경의 하나로

단양읍에서 남쪽 8지점인 대강면 사인암리에 있다.

운계천이라고도 불리는 남조천 강변을 따라 화강암으로 구성된 지반 가장자리에

 석회암으로 된 암석이 병풍모양의 수직절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사인암의 바위 정상에는 소나무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고,

 , 수직절벽의 바위틈에도 마치 분재와 같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사인암의 석벽과 조화를 이룬다. 그 풍광이 아름다워 2008년에 명승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사인암(舍人巖)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3~1342)

 정4품인 사인(舍人)’이라는 관직에 있을 때 사인암 근처에 초막을 짓고 기거했는데

 훗날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로 부임한 임재광이

우탁을 기리기 위해 이 바위를 사인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역동(易東)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우탁이 경사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정주학(程朱學)이 처음 조선에 들어 왔을 때 아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자

한 달 동안 홀로 탐구하여 성리학에 능통하였는데,

그가 원나라에 갔을 때 중국 학자 정관이 우탁의 역학(易學)에 대한 식견에 놀라

 우리가 논하는 주역은 동쪽에 이미 있었다라고 말했다.

정관의 이 말이 있은 후에 역동(易東)이 그의 별호가 되었다.

 

 

 

 

 

 

 

 

 

 

 

김홍도의 사인암도

 

 

 

 

 

 

 

 

 

 

 

사인암에서 바라 본 청련암

 

 

 

 

 

 

 

 

 

 

 

 

@우탁의 시비로 백발가(白髮歌)가 돌에 부조되어 있다.

 

한 손에 막대 잡고(우탁)의 작품

한 손에 막대 잡고 한 손에 가싀 쥐고,

늙는길 가싀로 막고, 오는 白髮(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白髮(백발)이 제 몬져 알고 즈럼길노 오더라.

< 출전 > 청구영언 <연대> 고려 충혜왕

 

 

 

 

우탁(禹倬, 1262~ 1342)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단양,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이다.

 단양 우씨 시조 우현(禹玄)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우천규(禹天珪)의 아들이다.

1278(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급제하여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있을 때 요신(妖神)의 신사를 철폐하였다.

 

 

 

1308(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원나라를 통해 정주의 역전(易傳)을 연구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역학자였다.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명승지로 단양 팔경의 하나인 사인암(舍人巖)은 그

가 고려 말기에 사인 벼슬로 있을 때 그곳에 휴양을 가서 이름이 붙여졌다.

1570(선조 3) 이황(李滉)의 발의로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열전에는 우탁이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부임했을 때

 민간신앙이었던 팔령신(八鈴神) 때문에 백성의 폐해가 심하자

신사를 철폐하는 혁신적인 자세를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는 벼슬을 버린 후에는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