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8. 18:10ㆍ국내 명산과 사찰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일요일 아침. 날이 몹시 흐리다. 몸도 찌뿌듯하고 멀리 나들이하기는 틀린 날씨라
가벼운 코스를 찾다가 북한산 승가사가 생각이 들려보기로 했다.
승가사는 비봉이나 사모바위를 거처 문수봉을 오르면 하산길에 들리게 되는데
몸도 지치고, 사찰탐방 하기는 시간대도 맞지 않아 건성으로 탑만 보고 내려오기 일쑤였다.
오늘은 역(逆)으로 구기동에서 승가사가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해 산행은 포기하고 승가사만 둘러보기로 했다.
@북한산 승가사(僧伽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 소속으로 비구니 사찰이다.
756년(경덕왕 15)에 수태(秀台) 스님이 창건하여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하면서 생불(生佛)로 지칭되었던
승가(僧伽)대사를 기리는 뜻에서 절 이름을 승가사(僧伽寺)라 하였다.
그 뒤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 스님과 성언(成彦) 스님이 중창하였고,
1090년(선종 7)에는 구산사(龜山寺)의 주지였던 영현(領賢)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1099년(숙종 4)에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스님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하면서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불당을 중수하였다.
(승가사 셔틀버스 타는 곳이다.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며, 요금은 1000원을 받는다.)
1422년(세종 4)에 7종을 통합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통합할 때는 선종에 속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쳐 고종 때 명성황후와 엄 상궁의 시주를 얻어 일신, 중건하였다.
1941년에 도공(道空)이 다시 중수하였으나, 6·25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비구니 도명(道明)이 중창하여 대웅전과 영산전(靈山殿)·약사전(藥師殿) 등의 당우를 갖추었다.
그 뒤를 이어 비구니 상륜(相侖)이 불사(佛事)를 계속하여
현재는 산신각(山神閣)·향로각(香爐閣)·동정각(動靜閣)·범종각(梵鐘閣)·대방(大房)·
요사채 등의 당우들이 좁고 가파른 지형을 이용하여 알맞게 배열되어 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창건 이후 여러 왕이 행차하여 기도하였고,
조선 초기의 고승 함허(涵虛)가 수도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후기에는 성월(城月) 스님이 이 절에서 배출되어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의 직책을 맡아
쇠잔하던 불교를 크게 북돋는 등 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찰이다.
또한, 예로부터 기도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셔틀버스타는 곳에서 여기까지 도보로는 2~30분 거리다.
이 절의 유물로는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된 석조승가대사좌상이 있으며,
서북방 100m 지점에는 보물 제215호로 지정된 거대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부각되어 있다.
절의 뒤편 비봉에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유지비(遺址碑)가 세워져 있다.
승가사 사적비
통일호국대탑(정식명칭은 민족통일호국보탑)
1987 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완성한 25m의 9층석탑이다.
탑신 안에는 인도정부로부터 기증받은 부처님 진신사리 1과, 청옥와불1좌, 나한의 사리2과,
패엽경1질,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경판1질, 화엄경9질 등을 봉안했다고 하며
탑신 아래 감실은 경주석굴암을 본떠 석가모니부처를 중앙에 모시고
10대제자와 나한과 각종 동물 등이 부조되어 있다.
감실의 4면에는 사천왕상을 정교하게 양각으로 조성했다. 위 사진은 남방 수호신 증장천왕이다.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그리고 기둥 양면에 조각상은 서방 광목천왕과 동방 지국천왕이다.
서방 광목천왕
화염신광에 대예적금강신을 모셨다.
예적금강(穢跡金剛) 은 오추사마(烏樞沙摩)로도 불린다.
여래의 화현이며 일체의 더러움과 악을 제거하는 위력을 가진 명왕(明王)이다.
신중탱에서 예적금강의 모습은 19세기 초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곤두세운 험상궂은 얼굴에
손에는 금강저를 들거나 공수인(拱手印)을 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예적금강은 얼굴 3개에 눈도 3개이며 이를 드러내며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다.
8개의 팔을 갖고 있으며 손은 합장을 하거나 금강령, 뱀, 부적, 칼, 밧줄, 창 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또한 온몸을 불에 휩싸이게 그려 보다 극적으로 분노존(忿怒尊)을 표현하기도 한다.
북방 다문천왕
아래에서 올려다 본 승가사 전경. 공사 중인가 보다.
범종각
서래당. 요사채를 겸하고 있는 것 같다.
서래당이란 당우는 아마 達摩西來意란 말에서 빌려온 것 같다.
전각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먼저 마애불로 올라간다. 2개의 다리가 조성되어 있다.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北漢山舊基洞磨崖如來坐像)
거대한 크기의 이 불상은 승가사 뒤편 바위에 낮은 부조로 새겨져 있는 좌상이다.
승가사는 당나라의 신승(神僧) 승가(僧迦)의 성적(聖蹟)을 얻은 수대(秀臺)가
756년(경덕왕 15)에 삼각산 남쪽에 굴을 만들어 창건하였다고 전해 온다.
불상의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보물 제2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크기는 전체 높이 5.94m, 너비 5.04m이며 고려 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고 큼직한 살상투[肉髻]를 갖춘 머리는 민머리[素髮]이며,
백호공(白毫孔)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네모꼴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하게 처리된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콧날과 꾹 다물고 있는 입, 가늘게 내리뜬 눈과 눈썹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두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졌다.
목에는 가는 선으로 조각된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나타나 있다.
왼쪽 어깨에 걸쳐 입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는 넓은 옷깃이
왼쪽 어깨로부터 오른쪽 겨드랑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옷 주름 선은 유려하고 활달하다.
그러나 형식화된 각진 어깨와 밋밋한 가슴 등은 입체감이 결여되어 있다.
팔을 약간 벌려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 모양을 한 손은 당당한 불격(佛格)을 나타내 준다.
그뿐만 아니라 오른쪽 손목을 안쪽으로 꺾이게 함으로써 율동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화사한 중판연화문대좌(重瓣蓮花文臺座) 위에서 가부좌한 양 무릎은 넓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손 밑의 발은 호화로운 연꽃 대좌와는 대조적으로 탄력성을 잃어버린 채 손과 같이 큼직하게 조각되었다.
대좌로부터 시작되는 광배는 굵은 선으로 아무런 장식 없이 조각된 키 모양의 거신광(擧身光)이다.
머리 위에는 개석(蓋石) 아랫면에 연꽃잎과 자방이 아름답게 조각된
팔각형의 다른 돌을 바위에 붙여서 보개(寶蓋)로 삼고 있다.
머리 위쪽 좌우와 양어깨 옆으로 파여 있는 네모꼴의 구멍은
목조전실(木造前室)의 가구(架構) 흔적으로서 마애석굴(磨崖石窟)을 모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풍만하고 당당한 체구에 장중하고 단정하면서도 자비가 넘쳐흐르는
통일신라 시대의 마애불상들보다는 다소 둔화되고 형식화된 감이 있다.
하지만 신체 표현은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혀 있으며, 얼굴 표정 또한 부드러움과
자비로움이 잘 간직된 10세기의 고려 시대 불상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니며 이 불상과 가장 친연성이 있는 것으로는
월출산 마애불좌상(月出山磨崖佛坐像)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불상은 11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묘적암 마애불좌상(妙寂庵磨崖佛坐像)과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불좌상(大興寺北彌勒庵磨崖佛坐像),
법주사 마애불의상(法住寺磨崖佛倚像) 등과의 영향 관계까지도
짐작하게 해주는 고려 시대 마애거불상의 하나이다.
마애불의 하대 조각상
마애불에서 바라 본 향로각 지붕, 연꽃을 지붕에 장식한, 참 독특한 전각이다.
마애불에서 경내 전각을 보러 내려간다.
향로각 옆은 약사전으로 석조승가대사좌상 봉안하고 있다.
약사전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의 높이는 76cm, 광배 130cm로,
옛적에는 승가굴로 불리었지만, 지금은 약사전 안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승가대사좌상은 삼국시대부터 여러 승려가 수도했던 석굴로 유명하며
그 안에 주존으로 안치된 상은 인도의 고승으로 중국 당나라에서 법을 전수하여
이름을 떨친 승가대사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광배 뒷면에 있는 명문에 의하면 1024년(현종 15)에 지광 등이 발원하여
승려 광유(光儒) 등이 만들었다고 한다.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등신대 크기의 좌상이나 대좌는
나중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넓은 편으로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이마에 주름살까지 표현했으나
전체적으로 호분이 두꺼워 세속적인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넓고 편평한 가슴 위에는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옷 주름은 굵고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상체가 길고 유난히 넓어 안정감을 주고 있는 점은 당시 고려 초기 철불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고 있으나 왼손은 소맷자락 속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않는다.
광배는 상에 비해서 상당히 큰 편으로 두광과 신광이 합쳐져 마치 배 모양을 이루고 있는
주형광배(舟形光背)이다. 두광 안에는 연화 무늬를 새기고 그 주위에 덩굴무늬와 모란무늬를 돌렸으며
신광에는 덩굴무늬와 보상화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부조했다.
이 상은 전체적인 비례감이나 세부표현, 옷 주름의 처리 등에서
고려 초기 조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명문에 의해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 시대 초상조각으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명부전
승가사의 전각 안에 조성된 탱화는 모두 양각으로 부조된 것이 특징이다.
지장보살탱
대웅전이다. 법당 안에는 명부전과 마찬가지로 양각으로 부도된 탱화가 조성되어 있다.
석가여래삼존불
독성탱
석가모니삼존불 좌우에 나한상들 역시 양각으로 조성되어 있다.
위태천의 모습이 참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동진보안대보살로 알려진 위태천신은 신중(神衆) 가운데
불법을 수호하는 대표적인 신장(神將)으로 유리광불이 출현하셨을 때
도를 이루어 보안보살이라 하였으며 그 후 석가여래회상에서 도를 이루어 동진보살이라 불렀다.
팔만 사천 근이나 되는 금강보저를 손에 들고 불불(佛佛)이 출세토록 불법을 보호하겠다고 서원하셨고,
우리나라 사찰의 신중탱화에서도 예적명왕과 함께 중요인물로 등장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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