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기행(6/6) 금당사(金塘寺)

2018. 12. 3. 21:41국내 명산과 사찰



마이산기행(6/6) 금당사(金塘寺)

탑사를 나와 탑영제의 수변공원을 따라 마이산기행의 마지막 코스인 금당사(金塘寺)로 향한다.

금당사는 제1부에서 포스팅한 나옹화상의 수행처였던 고금당에서 옮겨온 사찰이다.

 금당사의 일주문은 남부주차장 쪽에 있다. 주차장을 들어서면 바로 <마이산금당사>란 일주문이 서 있고

 약사여래가 인자한 모습으로 좌정해 있다.

남부주차장에서 금당사로 바로 가면 20여 분 정도 거리지만

이번 마이산기행은 고금당을 거쳐 비룡대, 암마이봉,

은수사, 탑사를 경유하는 산행이었기에 마지막 코스가 된 것이다.



 

@마이산 탄연봉의 자연동굴인 고금당의 나옹암에서 옮겨 온 마이산(馬耳山) 금당사(金堂寺)

열반종의 본찰로 고대 불교사에서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총사령부였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 소속이다.



금당사는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650(의자왕 1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무상(無上)

그의 제자인 금취(金趣)와 함께 세웠다고 한다.

당시 위치는 지금보다 약 1.5떨어진 탄현봉에 있는 고금당(古金塘)으로,

그 바로 아래 있는 자연동굴인 나옹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1675(숙종 1)의 일이다.

금당사 창건주로 알려진 무상(無上)과 제자 금취(金趣)

고구려 고승 보덕(普德)화상의 제자로, 보덕은 원래 고구려 고승으로

연개소문이 도교를 받아들이고 숭상하자 이에 반대해 백제로 망명한 스님이다.



다른 하나의 창건설은 신라 헌강왕 2(876) 혜감(慧鑑) 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금당사는 한때 큰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고 여러 차례의 중건 및 중수를 거쳤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쇠락하였으나 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였다.

그 뒤 1978년에는 명부전, 1987년에는 산신각, 1990년에는 극락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 지장전, 삼성각, 대방(大房) 등이 있다.

 

그 밖에도 극락보전 앞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탑 1기가 있는데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마이탑사(馬耳塔寺)와 단군을 받드는 이산묘(駬山廟)가 있다.


고금당에서 내려다 본 금당사









남부주차장에서 들어서면 금당사 초입이 된다. 배불때기 포대화상이 탐방객을 맞는다.



@지장전

지장전에 봉안된 금당사 목불좌상(木佛坐像)은 수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보전 옆에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은 금당사 연못에 있는

전라북도 지방문화재122호로 지정된 석탑을 본뜬 것으로 근래에 조성한 모양이다.


이 석등 또한 극락보전을 신축하면서 근래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삼성각



삼성각에는 칠성, 산신, 독성 세분을 모시는 것이 상례인데

금당사의 삼성각에는 독성 대신 용왕을 모신 것이 특이하다.




나한전



나한전의 탱화가 별스럽다. 본존불 좌우에 코끼리와 사자를 탄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나한들이 나열되어 있다.






@보물 제1266호로 지정된 진안 금당사 괘불(높이 8. 29m×4.55m)1692년에 그려진 것으로,

관세음보살상이 그려져 있고 화려한 기법으로 채색되어 있다.

조선 시대 괘불의 대표적 형식 중 하나인 보살형 부처를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삼베 13폭을 이어 붙인 대형의 화면에 보살의 모습으로 꽃을 들고 있는 석가모니불로

꽃을 들어 진리를 나타냈다는 염화시중을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네모에 가깝고 좌우로 치켜 올라간 눈 꼬리에 음영법을 적용한 눈동자,

굳게 다문 작은 입 등이 부처의 위엄을 보여준다.

신체는 얼굴에 비해 왜소하나 하반신을 가늘고 길게 표현하여 장대한 느낌을 준다.

 

광배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연꽃을 배치했는데, 이 연꽃에는 28자의 범자문(梵字文)이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괘불 가운데 광배에 범자문을 장식한 예는 찾아볼 수 없어 금당사 괘불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괘불은 당당하면서도 중후한 모습으로 신체 비례가 균형을 이뤄

17~18세기 괘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하단의 화기(畵記)에 따르면, 이 불화를 처음 조성할 당시의 사찰 이름은

 聳出山 金堂寺(용출산 금당사)’였으나, 이후 어느 시기에 馬耳山 金塘寺(마이산 금당사)’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괘불을 그린 화원은 명원(明遠), 처헌(處軒), 위청(偉淸), 치헌(致軒)’ 등 네 명이다.

금당사 괘불은 현재 보물 제12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괘불에 얽힌 전설

보물 1266호로 지정된 금당사 괘불은 고금당의 나옹굴과 같이 나옹스님과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이곳에서 수도하던 수도승의 생활은 신선과 같았고 부처님의 높은 도를 깨우친 분이었다고 한다.

어느 해 늦은 봄이었다. 매우 가뭄이 심하여 사람들은 금당사에서 수도하는 스님에게 찾아가 애원하였다.

스님은 정색하며 기우제를 드리자고 하고 밤이 되자 스님은 호랑이 등을 타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이 기우제 준비를 마치고 사흘을 기다리니

스님이 절의 뒷마당에 사람을 그리고 그곳을 백자만 파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모두 주저하였으나 스님의 말대로 파기 시작했고

드디어 백자가 되는 땅속에서 부처님이 그려진 한 폭의 괘불이 나왔다.

이 괘불을 절에 걸고 기우제를 올리자 기다리던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가뭄이 심할 때면 금당사에서 괘불을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틀림없이 비가 온다고 한다.

 

어느 날 스님의 제자 여럿이 스님의 도술을 시험해 보기로 하고

달걀을 개어 떡을 구워놓고 스님에게 살아있는 병아리를 만들어 보이라고 하였다.

스님은 경을 외며 조용히 꿇어앉아 살아있는 병아리로 만들어 보이었다.

상좌들과 마을 사람들은 스님의 도술에 크게 탄복하여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이 스님이 바로 공민왕 때의 고승 나옹스님이다.

금당에서 북쪽으로 500m 거리에는 나옹 대사가 크게 대각을 얻었다는 고금당이 있다.

또 이곳에서는 동학 혁명의 주체인 녹두 전봉준 장군의 딸이 10년간 피난했다는 일설이 있다.

~출처:진안문화관광~


@극락보전

예전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에 새로 건립하여 편액을 극락보전으로 편액을 바꾸었다.

옛적의 대웅전은 약 300여 년 전에 건립한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지만

현재의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새로 지은 것이다.

 아직 불단이 마무리되지 않아 아미타 삼존불 뒤 탱화가 없다.






대북이다. 한쪽은 찢어져 있다.












금당사를 마지막 둘러 보고 귀경길에 나섰다.

땅거미가 내려앉는 귀경길 도로 위에서 마지막 담아 본 마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