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1. 22:33ㆍ국내 명산과 사찰
북한산 문수봉과 문수사
문수봉은 눈과 인연이 있는지 문수봉 가는 날은 대개 눈이 내린 이후 찾아가는 날이 많았다.
올해 첫 문수봉 산행도 쌓인 흰 눈을 밟아가며 오르게 되니 묘한 생각이 든다.
흰 눈이라. 몸과 마음을 흰 눈처럼 정화하라는 것인가?
세류(世流)야 흘러가는 꼴을 보면 가끔 울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탁(濁)하든 말든 내 의지로 될 일이지 않으니 덮어두자.
구기동 탐방 지원센터를 벗어나니 계곡마다 쌓인 눈이 겨울이 성큼 왔음을 느끼게 한다.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그렇게 심한 한기(寒氣)는 들지 않는다.
기온도 영상이라 눈이 녹기 시작하여 그렇게 미끄럽지 않아 다행이다.
그러나 문수사와 문수봉 오르는 길은 바위 너들길이라
북한산 등산로 중에서도 가장 평탄치 못한 길이다.
그래서 그런가? 시간대도 그렇지만, 오늘따라 탐방객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들머리는 구기동탐방지원센터다. 시계를 보니 10시 25분이다. 조금 이른가? 한산한 느낌이 든다.
북한산은 멋진 바위가 많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망원으로 바위를 잡아 본다.
사모바위도 눈에 들어 온다.
조금 높이 오르니 보현봉도 보이기 시작한다. 문수봉에서 보는 보현봉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문수봉도 보인다. 언제 보아도 멋진 문수봉의 바위들이다.
문수사다. 문수사는 일주문이나 천왕문이나 해탈문 등 경내를 상징하는 일체 문이 없다.
@문수사는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2번지 북한산 남장대(南將臺, 해발 716m) 앞
문수봉 아래에 자리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 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고려 16대 왕 예종 4년(1109년) 때 탄연(坦然) 스님이 이곳의 바위굴에서 수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문수암(文殊庵)이라는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1451년(문종 1) 연창공주(延昌公主)가 중창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듭해오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현재의 절은 1957년 신수(信洙)가 중건하였으며,
1985년 혜정(慧淨)이 삼성각을 중수하였다.
당우로는 대웅전·응진전(應眞殿)·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북한산 문수사는 예로부터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모시는 기도처로 유명했으며
아직도 그 치성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오백나한은 원래는 문수굴에 있었으나 지금은 응진전(應眞殿)에 옮겨져 있다.
입구 왼쪽 요사채 옆에 단청도 칠하지 않는 정자에 문수보살을 또 한분 모시고 있다.
석질과 형상이 추측컨대 문수굴의 보살상을 조성할 때 남은 그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대웅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상은 명성황후(明成皇后:1854~1895)가 모신 것이고,
석가모니불은 영친왕의 비인 이방자(李方子):1901~1989)가 봉안한 것이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옆의 탱화는 지장탱과 신중탱을 모시고 있다.
<문수보살10대원>
문수보살도 보현보살과 같은 여러 다른 불보살처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십대원(十大願)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①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하게 하고 갖가지 방편으로 불도에 들게 한다.
② 문수를 비방하고 미워하고 죽음을 주는 중생이라도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③ 문수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깨끗한 행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하거나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④ 문수를 속이거나 업신여기거나 불법승 삼보(三寶)를 비방하며 교만한 자들이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⑤문수를 천대하고 방해하며 구하지 않는 자까지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⑥살생을 업으로 하는 자나 재물에 욕심이 많은 자까지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⑦모든 복덕을 부처님의 보리도에 회향하고 중생이 모두 복을 받게 하며, 모든 수행자에게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⑧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수라·하늘·인간세상)의 중생과 함께 나서 중생을 교화하며 그들이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⑨ 삼보를 비방하고 악업을 일삼는 중생들이 모두 보리심을 내어 위 없는 도를 구하게 한다.
⑩ 자비희사(慈悲喜捨)와 허공같이 넓은 마음으로 중생을 끊임없이 제도하여 보리를 깨닫고 정각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문수보살의 십대원은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처럼 중생의 현실적 고통을 치유하는 차원이 아닌
오로지 보리심을 일으키고 부처가 되도록 하는 무한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다르다
지장탱
전형적인 신중탱이다. 대예적금강을 상단에 모시고 그 아래 위태천(동진보살)을 모신 탱이다.
북한산 문수사는 예로부터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모시는 기도처로 유명했다고 전하며
오백나한은 원래는 문수굴에 있었으나 지금은 응진전(應眞殿)으로 옮겨 놓았다.
응진전에 모시 석가모니불은 여느 사찰의 석가모니상보다 천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응진전의 신중탱
삼존불 좌우에 오백나한을 모시고 있다.
응진전의 범종
문수사의 백미(白眉)는 단연 문수동굴로 불리는 천연동굴이다.
이 동굴법당은 영험이 있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도 그의 어머니가 멀리 황해도 평산에서 이곳까지 와,
동굴 속에 모셔진 오백나한상에게 치성을 드린 끝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와 같은 인연으로 4 · 19 직전 이승만 박사가 당시 82세의 고령을 무릅쓰고
이곳을 방문하여 ‘문수사’ 현판을 직접 썼다고 하며,
당시 스님들과 함께 찍었던 빛바랜 흑백사진도 절에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북한산 비봉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유명한 신라 진흥왕순수비에는,
‘한성(지금의 경기도 광주 춘궁리 일대)을 지나 고개를 올라 … (중략)
한 도인(道人)이 석굴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이 근처에 있는 어느 석굴에서 도인을 만났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의 석굴을 바로 이 문수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천연동굴 문수동굴은 가운데 문수보살을 모시고 주위에 사자를 탄 문수보살의 소상들로 채워져 있다.
문수보살의 보관에는 무명을 짜르는 지혜의 검이 그려져 있다.
문수보살의 신앙은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널리 전승되었다.
보현보살과 항상 일대(一對)하여 왼편에서 석가모니불의 협시불로 지혜를 가리키는 문수보살은
경(經)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예: 妙德/무량경, 열반경. 妙首/관찰삼매경 대정법문경.
敬首/금강영락경. 妙吉祥/대일경)
일반적으로 문수사리(文殊師利), 문수시리(文殊尸利)나
만수실리(曼殊室利) 만수시리(滿殊尸利)로 불린다.
범어 원어는 만주슈리(Manjushri)이다.
문수(文殊) 혹은 만수(曼殊)는 묘(妙)의 뜻이고
사리(師利) 또는 실리(室利)는 두(頭), 덕(德), 길상(吉祥)의 뜻이다.
문수보살이 나오는 경전은 250년 무렵부터 만들어졌지만,
예술작품에는 400년 무렵부터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데
오른손에 무명(無明)의 구름을 잘라버리는 지혜의 칼을 높이 치켜들고
왼손에는 패엽(貝葉)으로 된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을 들고서
왕자처럼 치장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문수보살의 조상(彫像) 중 사자, 공작을 타는 것은 그의 지혜가 용맹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것은 일체중생의 번뇌를 끊는다는 뜻이고,
왼손에 청련화를 쥐고 있는 형상은 일체 여래의 지혜와 무상(無相)의 지덕(智德)을 맡아서
제법에 물들지 아니하여 마음이 머무르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불교학 사전에 의하면 청련화(靑蓮華)는 연밭이 아니라 쇠똥에서 피는 연꽃이라고 한다.
머리에 상투를 맺고 있는 것은 지혜를 상징하며,
다섯 개의 상투는 대일여래의 오지(五智)를 표현한 것이다.
다섯 동자로 문수의 분신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일설에는 이 문수보살이 석가의 교화(敎化)를 돕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몸을 바꾸어 보살의 지위에 머물고 있으나,
오랜 옛적에 이미 성불하여 용존상불(龍尊上佛)·대신불(大身佛)·
신선불(神仙佛)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또 미래에 성불하여 보견여래(普見如來)로 불릴 것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일설에는, 현재 북방의 상희세계(常喜世界)에 있는
환회장마니보적불이 곧 문수보살로,
이 부처님의 이름을 들으면 사중죄(四重罪)가 없어진다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8세기 무렵부터 문수보살 숭배가 널리 유행했으며,
산시성[山西省]에 있는 우타이산[五臺山]은 문수보살의 성지로서 그를 모신 사찰로 가득 차 있다.
천계에 있는 보살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인도에 실재했던 인물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한국에서는 문수보살 신앙이 삼국시대부터 유행했는데 신라의 고승 자장은 그 유포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오대산은 중국의 우타이산(청량산/오대산)과 마찬가지로
문수보살의 상주처(常住處)로서 중시되어 왔는데,
643년(선덕여왕 12)에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자장은
오대산 중대(中臺)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함으로써 오대산의 중요성을 널리 부각시켰다.
황룡사의 9층 탑도 문수보살 신앙을 굳건히 하고자 한 자장의 노력으로 세워졌다.
그 뒤 문수보살 신앙은 계속 유행되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찰의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문수보살이 봉안된 것을 볼 수 있다.
삼성각, 가파른 언덕에 위치하여 철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인데 얼굴형상이 조금 이국적(?)이다.
삼성각에서 바라 본 보현봉
문수사는 북한산 안에 있는 사찰 가운데 주위 경관이 좋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문수봉 아래 위치한 문수사는 앞으로는 보현봉을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비봉이 절을 감싸고 있어,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좇아 이곳을 찾아 시를 읊곤 했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의 이장용(李藏用)과 탄연스님, 조선 시대의 최립(崔立), 홍세태(洪世泰)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문수사의 창건주인 탄연 스님이 이곳 문수사에 대해 읊은 시 한 수가 전하고 있다.
한 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일만 인연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고 가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속에서 일어나네.
누구 저 스님 따라,
고요히 앉아 참 낙을 배우려나.
~탄연(坦然) 스님 작(作)~
@북한산 문수사의 창건주로 알려진 탄연(坦然: 문종24년(1070)~고려 의종 13년(1159)) 스님은 고려의 승려이다.
속성은 손씨(孫氏). 호는 묵암(默庵). 경상남도 밀양 출신이다.
고려 중기 선종을 부흥시키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분이다.
8, 9세에 글을 읽고 시를 지었고, 13세에 6경의 내용을 이해했다.
15세에 명경과에 합격하고, 궁중에 들어가 후일 예종이 된 세자를 가르쳤다.
19세에 궁중을 몰래 나와 개성 북쪽 안적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 뒤 광명사로 옮겨가 혜소국사에게 선(禪)을 배웠다.
1104년 대선에 합격했고, 1106년 대사, 1108년 중대사, 1114년 삼중대사가 되면서 법복을 하사받았다.
1117년 선암사 주지가 되었고, 1120년 선사가 되었다. 1127년 보리연사 주지가 되었고,
1131년 대선사로 제수받을 때 금란가사를 하사받았다.
1135년 보제사 제석원 주지 겸 영원사 주지, 1139년 광명사 주지가 되었다.
1147년 진주 단속사로 은퇴하여 제자들을 양성했다.
탄연 스님은 서예에도 능했다. 특히 왕희지체를 잘 썼는데,
청평 문수원(文殊院) 중수비와 예천 복룡사비 및 삼각산 승가사 중수비는 모두 그의 글씨이다.
저서로는 시문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으며,
〈삼각산문수사시 三角山文殊寺詩〉 등의 수 편이 〈동문선 東文選〉에 전해진다.
제자로는 연잠(淵湛)이 있고, 국사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대감(大鑑)이다.
의종13년(1159년) 6월 병이 나서 문인(門人)들에게 부촉하기를,
"내가 돌아갈 곳을 스스로 알고 있으니, 너희들은 각기 수도 정진에 전력하고,
삼가 세속의 예를 따라 장례식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 게송을 설하여 이르기를,
단정히 홀로 앉아 심종(心宗)을 관(觀)해
확연히 스스로 쾌락(快樂)하면서
청풍(淸風)과 더불어 유희하노라.
게송을 설(說)하여 마치고 단정히 앉아 차수(叉手)하고 입적하시니 안색(顔色)이 평소와 같았다고 한다.
그때 춘추(春秋)는 90세다. 나라에서는 대감(大鑑)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고,
진주(晋州) 소남역(少男驛)북쪽 산에서 다비(茶毗)하였으며,
28일에 유골을 단속사 북쪽 독립산정(獨立山頂)에 봉안하였다.
탄연 스님의 일대기를 찬한 대감국사비(斷俗寺大鑑國師碑)가 진주 단속사에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비(碑)는 멸실되고 탁본만 문경 금용사(金龍寺)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수사를 나와 문수봉을 오르기 위해 대남문으로 향한다. 보현봉의 새로운 면을 다시 바라 본다.
보현봉을 다시 한번 더 보고 문수봉을 오른다.
문수봉에서 내려다 본 문수사. 문수봉 바로 아래이다 보니 지붕만 보인다.
문수봉에서 바라 본 나한봉능선
문수봉에서 바라 본 보현봉
보현봉
대남문으로 내려와 하산한다.
구기계곡을 내려오면서 바라 본 문수봉
'국내 명산과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구니 도량 탑골승방 낙산 보문동 미타사 (0) | 2018.12.17 |
---|---|
도봉산 원통사 (0) | 2018.12.15 |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0) | 2018.12.08 |
마이산기행(6/6) 금당사(金塘寺) (0) | 2018.12.03 |
마이산기행(5/6) 은수사에서 탑사로 (0) | 2018.12.01 |